NK뉴스
[기고]나는 어떻게 주사파 전위조직원이 되었나 인쇄하기
이름 NKnet
2012-07-19 09:42:46  |  조회 4333
트위터 페이스북 미투데이 요즘

 

원고 청탁을 받고 며칠 동안 고민했다. 이 글을 쓸 것인지, 말 것인지! 내가 1980~90년대 주사파(주체사상파)의 평균적인 실태를 대변할 수 있는 사람인지, 그리고 이제 와서 이런 글을 써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쓴다면 대체 어떤 식으로 쓰는 것이 역사의 순류(順流)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인지…. 1997년 이른바 전향(轉向)을 다짐한 이후로 나는 과거 몸담았던 조직에 대해 이야기해본 적이 없다. 물론 전향 이전에도 없었다. 그런데 15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새삼스럽게 이런 이야기를 공개하려는 나 자신이 경망스럽고, 지금 이렇게 펜을 들 수밖에 없게 된 세태가 한심스럽다.

통합진보당 선거 부정 사건을 계기로 종북(從北)주의가 국민적 화제가 되고 있다. 지금 내가 다니는 회사는 이런 분야와는 한참이나 거리가 멀지만 우리 회사 회식자리에서까지 화젯거리로 종북 문제가 떠오르는 것을 보니 ‘종북’이 신기하긴 하나 보다. 하긴 대명천지 21세기에 북한 봉건왕조를 추종하는 주사파들이 아직까지(!) 존재한다니, ‘과연 그럴까’ 하는 의문을 갖는 사람마저 주위에 적잖다. 정상적인 국민들로서는 그들의 의식 구조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될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을 자세히 설명하자면 청탁받은 지면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할 것 같고, 먹고살기 바쁜 우리 국민들이 주사파들의 의식 구조를 자세히 알고 있어야 할 이유 또한 없다. 다만 어떤 경로를 통해서 주사파가 되었던 것인지, 그 변태 과정을 가급적 소상히 소개하고자 한다. 새로운 ‘종북 백치(白痴)’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예방의 차원에서 약간이나마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렇게 펜을 들었다.

운동권이 된 배경
나는 고등학생 때 주사파가 된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다. 고교 1학년이던 1989년에 학생운동을 시작하였고, 2학년이던 1990년 초부터 주체사상과 NLPDR(민족해방민중민주주의혁명) 이론을 따르게 되었으며, 곧이어 ‘평생을 직업적인 혁명가로 살겠다’고 다짐하고 활동가 조직에 가입하게 되었다. 대학생이 되어서는 고등학생 운동을 지도하는 지하 전위(前衛)조직의 일원으로 배후에서 활동하였다.

운동권이 된 계기와 주사파가 된 계기는 나눠서 설명하는 것이 좋겠다. 운동권이 된 배경을 돌이켜보니 광주(光州)에서 태어나 자란 지역적 영향이 컸던 것 같다.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8살에 불과했고 나주(羅州)에 있었지만 “광주에서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고 어른들이 수군거리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중학교 은사님들이 대체로 30대 초중반이셨는데, 수업 도중 정치나 현대사에 대한 이야기해 주시는 분들이 많았다. 어느 날 친구가 갖고 온 광주민주화운동 사진첩을 함께 보았는데, 피해자들의 끔찍한 모습에 며칠 동안 밥을 제대로 먹지 못했다.

중학교 시절에 우리 반에 돌아다니던 <바른길>이라는 비밀 팸플릿이 있었다. 중고등학생 운동권들이 제작하던 팸플릿 형태의 잡지였는데, 우연히 그것을 펼쳐보니 내가 좋아하는 서정주 시인이 일제 말기에 썼다는 ‘마쓰이 오장 송가’라는 시가 실려 있는 것이 아닌가. 가미카제 특공대를 찬양하는 친일(親日)시였다. 분노에 치를 떨며 그 뒤로는 서정주 시인의 시는 거들떠보지도 않게 되었다. 친일문학에 관심을 갖고 있던 중 『교과서와 친일문학』이라는 책을 손에 넣게 되었는데, 그 책은 잠재되어있던 민족의식에 기름을 끼얹는 역할을 하였다. 전교조(전국교직원노동조합) 사건이 일어나자 각종 집회에 참여하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KAL기 사건의 진실
1989년 9월 ‘전교조 합법화와 해직교사 복직’을 요구하는 집회가 전남대에서 열렸는데, 그 집회를 마치고 고등학교별로 이른바 ‘총화(總和)’를 하는 시간이 있었다. 집회 참여 소감을 말하고 앞으로의 결의를 밝히는 그런 시간이었다. 그때 내 발언이나 행동을 눈여겨보았던 2학년 선배가 따로 불러내 “학습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권유한 것이 처음으로 지하서클에 들어가게 된 계기다.
학습은 우리 학교를 졸업한 대학생 선배가 지도하였다. 첫 교재는 『들어라, 역사의 외침을!』이라는 역사책이었고, 1학년 친구들 대여섯 명이 함께 학습을 받았다. ‘남침이 아니라 북침(혹은 남침유도)’이라는 생경한 이야기들로 가득 차 있어 약간의 토론이 오가긴 했지만, 지도하는 선배가 워낙 열정적으로 ‘북침’을 주장하니 모두가 그대로 수긍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무언가에 빠져들면 집요하게 파고드는 성격인지라 선배에게 ‘보충교재’를 부탁하였고, 『미제침략사』와 『KAL기 사건의 진실』이라는 책을 받아들게 되었다. 섬뜩한 제목의 『미제침략사』보다는 『KAL기 사건의 진실』이 훨씬 충격적이었다. 김현희는 가짜이며 KAL기 폭파 사건은 안기부가 만들어낸 자작극이라지 않은가! 내용도 구체적이고 근거도 확실해 보였다. 메가톤급 충격이었다. 같은 반 친구들에게 책 내용을 소개해주며 그런 주장들을 전파하였다. 그 책을 읽은 뒤로는 남한 정권이 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믿지 않게 되었으며, 모든 사건의 뒤에는 계획적인 음모와 배후가 존재한다는 고정관념을 갖게 된 것 같다.

친북 의식을 심어준 계기가 된 책
의식에 불이 붙으면서 대학가 서점을 내 집 드나들 듯했는데, 거기에 있는 책은 손에 잡히는 대로 읽었다. 그때 운명을 바꿔놓은 또 하나의 책이 북한의 혁명소설 『꽃파는 처녀』다. 애초에 갖고 있는 민족의식이 반미(反美)의식으로 전환되고 있었지만 아직 ‘북한’은 꺼림칙하던 때에, 서점 한쪽에 몰래 비치되어 있던 그 책을 읽게 된 이유는 단순한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시 서울의 어느 대학 학생들이 북한의 혁명가극 <꽃파는 처녀>를 공연하려다가 구속되었다는 신문 보도를 보았는데, 대체 무슨 내용이기에 그러는지 알아보아야겠다는 생각에 읽게 되었다. 질풍노도(疾風怒濤)의 시기에는 이렇듯 ‘막아보려 할수록, 알려고 기를 쓰는’ 법이다.

책을 펼쳐들자마자 밥조차 거른 채 쉼 없이 읽었다. 부모님 몰래 읽느라 이불을 뒤집어쓰고 보았는데, 이불 속에서 엉엉 우는 바람에 동생이 “대체 무슨 책이냐”고 물을 정도였다. 『꽃파는 처녀』 이후로 북한 ‘원전(原典)’이라고 하면 닥치는 대로 다 읽었다. 1997년 전향하기 전까지, 남한에서 출판된 북한 서적 가운데 내가 읽지 않은 책은 아마 한 권도 없을 것이다. 1992년경부터는 남한에서 출판되지 않은 책도 읽게 되었다. 개인용 컴퓨터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파일 형태로 제작된 북한 서적이 운동권에 넘쳐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혁명가로 살겠다는 목표 갖게 한 『강철서신』
당시 학생운동권은 NL(민족해방)과 PD(민중민주)라는 양대 그룹으로 나눠져 있었다. 광주지역은 NL이 압도적으로 많았고, 나 역시 이미 내가 NL과 가깝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구체적으로 NL이 뭔지는 몰랐다. 그래서 선배에게 NL이 뭔지 가르쳐 달라니까 권해준 책이 『강철서신』과 『NLPDR론』이었다.

『강철서신』은 아주 강렬한 인상을 받은 책이었다. 그동안 읽었던 이념서적은 상당히 차갑다고 해야 할까, 딱딱하고 도식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는데, 『강철서신』은 느닷없이(!) 사람의 ‘품성(品性)’ 이야기로 시작하고 있었다. 읽는 내내 속으로 ‘우와!’ 하는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나중에는 그 책에서 강조하는 ‘솔직·겸손·소박·성실·용감’이라는 5대 품성을 모든 교과서의 맨 앞 장에 적어놓을 정도로 좌우명처럼 여겼다.

그 책을 읽기 전까지는 새로운 이념을 배운다는 신비감과 일종의 영웅심에 들떠 있었는데, 그 책을 통해서 ‘대중 속에 모범적인 존재가 됨으로써 내가 갖고 있는 사상을 세상에 뿌리내리도록 하겠다’는 운동가로서의 생활자세, 인생의 목표 같은 것을 갖게 되었다.

『NLPDR론』은 사실 기대에 비해 실망이 컸던 책이었다. NL이론이 무언가 거창한 이론일 줄 알았는데 내용이 단순하였고, 분량도 100여 페이지 남짓으로 조금 얇았다. ‘더 많이 알고 싶다’고 선배에게 부탁했더니 다른 학습서클을 권유하였고, 그때부터 3~4명 정도가 참여하는 ‘조금 더 높은’ 수준의 서클에 참여하게 되었다. 거기에서 본격적으로 주체사상을 학습하게 되었다. 1990년의 일이다.

‘더욱 북한스럽게’ 보이려는 노력
주체사상에 대한 첫 학습교재는 김정일이 썼다는 《주체사상에 대하여》라는 논문이었다. 주체사상과의 첫 만남은 사실 약간 허탈했다. 고작 이 정도의 사상을 막아보려고 남한 정부는 그렇게 악을 쓰는 것인가 하는 허탈감을 느꼈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언가 대단히 과학적인 사상의 요체일 것이라는 환상이 깨지는 허탈감을 느꼈다. 기대가 컸던 탓일까, 주체사상은 소박하다 못해 초라하게 느껴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동안 읽어왔던 맑스-레닌주의에 비해 이론적이거나 체계적인 냄새가 약하다는 인상이었다. 분량도 A4용지로 스무 장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한 감정을 솔직히 토로했더니 “그것이 바로 주체사상의 위대성”이라는 선배의 대답에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그래, 좋은 사상이 무조건 복잡할 필요는 없는 것이지! “그동안 읽어왔던 책들은 모두 잊고 주체적인 관점에 서보라”는 선배의 충고에 따라, ‘주체적인 관점’으로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 무진장 애를 썼던 것 같다. 그래서 그 논리 체계를 익히고, 북한 원전에 적혀있는 북한식 표현법까지 그대로 따라하려는 노력을 하게 되었다. 운동권 전반에 ‘더욱 북한스럽게 보이는 것’이 ‘더욱 충실한 운동가로 보이는 것’이라는 등식이 성립되어가던 시점이었다.

NL운동권에 북한 노래나 북한식 호칭, 심지어는 김일성-김정일 부자의 초상화를 몰래 간직하는 경향까지 생겨난 것은 누군가의 강압이나 지시에 의한 행동이 아니었다. 1990년대 초반부터 이러한 친북-종북적인 분위기가 자발적으로, 그리고 압도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나도 ‘김일성 장군의 노래’ ‘불멸의 꽃 김정일화’ 등의 노래를 이때에 배웠다.

전위조직과 대남방송
낮은 단계의 서클에서 점차 높은 단계의 서클로 올라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이 끝은 어디인가?’라는 궁금증을 갖게 되었는데, 그래서 ‘전위조직’이라는 것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당(黨) 말이다. 그것도 지하당!

이미 상당한 의식화가 되어있었기 때문에 지하당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전혀 두렵지 않았고, 오히려 그곳에 들어가고 싶어 조바심이 났다. 그 조직의 이름은 ‘한민전(한국민족민주전선)’이라고 했다. 이름도 멋있게 느껴졌다. 한민전은 라디오 전파를 통해 매일매일 방송을 내보내고 있는데 적들(남한정부)의 방해전파에 막혀서 쉽게 들을 수 없다고 했다. 전파는 서울의 모처에서 비밀리에 발사한다고 했다. 모든 것이 정말로 드라마틱하게 느껴졌다.

그때에 BC문건이라는 것도 받아보게 되었다. Broadcasting 문건을 줄여서 그렇게 불렀는데, 한민전의 <구국의 소리> 방송을 그대로 채록하여 배포하는 문건이었다. 방송의 내용은 특별한 것이 없었지만, 남한 혁명을 총지휘하는 이런 지하당이 존재한다는 암시 자체가 커다란 믿음과 동경을 갖게 했다. BC문건은 방송된 날짜보다 보통 일주일에서 보름 늦게 배포되었는데, 그 기간을 참기 힘들어 단파 라디오를 입수하여 직접 듣기도 하고, AM에서 비교적 선명한 음질로 들을 수 있는 평양방송을 청취하기도 했다. 거의 절반쯤은 ‘간첩’이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전위조직원이 되어
전위조직 가입이 인생의 목표이던 때, 평소 존경하던 A선배로부터 광주전남지역 중고등학생 운동을 총괄하는 전위조직을 만들자는 제안을 받게 되었다. 몇 개 학습서클과 대중조직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활동가들 대여섯 명을 규합하였고, 그때부터 주체사상 집중 학습을 시발점으로 자생적인 전위조직을 만드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내가 속해 있던 소조는 책임자를 포함해 3명으로 구성되었는데, 일주일에 1~2차례, 매회 3~4시간 정도씩 ▲주체사상 총서, ▲주체의 변혁이론, ▲김일성 회고록 학습 등을 강도 높게 진행했다. 장소는 대학의 빈 강의실이나 카페, 자취방 등에서 이루어졌다. 학습은 혁명 열사를 기리고 ‘장군님’의 노고를 생각하는 묵념으로 시작하였고, 어차피 모두가 의식화된 사람들이다보니 격렬한 토론 위주가 아니라 거의 해설과 암기 위주로 진행됐다. 학습을 마칠 때면 늘 ‘총화’하면서 장군님의 전사로 평생을 살아가자고 다짐했다.

그렇게 1년 정도를 꾸준히 학습하고 조직생활을 계속하던 어느 날 A선배가 나만 따로 불러내어 지시를 내렸다. 어느 카페의 위치를 알려주면서, 그곳의 몇 번 방에 들어가면 어떤 사람이 있을 텐데 그를 만나보라는 것이다. 직감적으로 ‘특별한’ 기회가 찾아왔음을 느꼈다.

그날 일어난 일, 그리고 그 후로 일어난 일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는 것은 이 글의 취지상 별다른 의미가 없을 것 같아 간략히 서술하겠다. 그 자리에 만난 사람은 초면이었음에도 나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었고, 조직 가입을 권유했다. “무슨 조직이냐”고 물으니 “비밀조직”이라 했고, 내가 “한민전이냐”고 물으니 “그렇게 보아도 된다”고 했다. ‘그렇게 보아도 된다’는 표현의 정확한 의미는 시간이 한참 흘러서야 알았지만, 여하튼 그렇게 해서 나는 꿈에도 그리던 전위조직의 성원이 되었다.

조직은 1명의 책임자를 포함해 4명의 소조원으로 구성됐다. 모두가 자신의 조직사업 단위를 갖고 있었다. 곧바로 결성을 했던 것은 아니고 6개월 정도의 학습과 준비 기간을 거쳐 1992년 여름에야 정식으로 결성식을 가졌다. 조직의 이름은 《○○○○동맹》이었고, 광주전남지역을 기반으로 한 계층 단위 전위조직 가운데 하나라는 설명만을 들을 수 있었다. 조직은 1997년에 해산했다.

지하당 운영의 실제
최근의 종북주의 비판 여론이 뜨거운 가운데 “주사파는 어떻게 해야 없어질 수 있겠느냐”고 물어보는 사람들이 있다. 주사파라는 ‘개인적 신념체계’가 없어지는 문제와 ‘주사파 조직’이 절멸하는 문제로 나누어 보아야 할 것이다.

전자(前者)라면 사상투쟁을 위주로 하여야 한다. 내가 주사파 전위조직원이 되기까지의 과정에서 알 수 있듯, 잠재된 민족주의·반정부의식 → 운동권 → NL → 주사파로 이어지는 변태의 고리를 끊어야 하는데, 무엇보다 ‘인터넷과 서점가를 장악하라’는 처방을 내리고 싶다. 특히 요즘 서점에 가보면 참으로 끔찍할 지경이다. 좌파 일색으로 채워진 도서 진열장을 보면서, ‘주사파가 태어날 토양은 아직도 충분하구나’ 하는 한숨이 절로 나온다. 물론 나처럼 글 쓰는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반성해야 할 대목이다.

그럼 ‘주사파 조직’은 어떻게 하면 없어질 것인가. 주사파가 없어지면 당연히 없어지겠지만, 끊임없는 공안사건에도 불구하고 그들 조직이 절멸되지 않는 ‘비결’에 대해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그 영생(?)의 비밀을 이해하면, 주사파 조직이 언제 없어질 수 있을지 해답이 보인다.

내가 몸담았던 조직을 예로 들어 설명하자면, 조직은 책임자와 소조원으로 구성되는데 원칙상 1개 소조는 5명을 초과하지 않는다. 조직 회합은 1~2주일에 한 번 정도 열리고, 생활총화 - 사업총화 - 사상학습 순으로 회의가 진행된다. 소조 전체가 만날 때도 있고, 책임자가 특정 소조원만 따로 불러내어 그 사람이 맡고 있는 사업단위에 대한 보고를 받고 지시를 내리기도 한다. 모든 보고는 구두(口頭)보고를 원칙으로 하고, 부득이하게 서면보고를 할 때에는 조직 명칭, 조직원 이름 등은 암호화한다.

소조원들은 각자 사업단위에 별도의 하부 조직을 구축하는데, 횡적(橫的) 관계에 있는 다른 소조원의 하부 조직에 대해서는 내가 알 수 없고, 알려고 노력해서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렇게 철저하게 단선(單線)연계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설령 누군가 체포된다 한들, 그는 횡적 관계에 있는 3~4명과 상부 책임자 한 명, 하부 조직원 몇 명밖에는 말할 수 있는 근거가 없다.

게다가 각 소조원들의 하부 조직 명칭이 서로 다르다. 예컨대 우리 소조의 이름은 ‘○○동맹’이지만, 하부 소조는 △△회, ××회 등으로 서로 다르게 부여한다. 혹시 하부 소조원이 체포되어 우리 조직의 이름이 ‘○○동맹’이라고 공안당국에서 발표하는 내용을 들으면, 그는 사건이 조작되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자기가 알고 있던 조직의 명칭은 그것이 아니었으니까.

이런 단선연계-복선포치의 조직 운영 방식은 지하당을 영원히 ‘자가증식’하는 세포로 만드는 획기적인 방법이다. 혹시 상급 조직이 발각되더라도 하부 조직은 살아있게 된다. 또한 하급 조직의 상황이 단선을 통해 상급 단위로는 계속 보고되고 있었기 때문에 조직원 전체가 한 명도 빠짐없이 일망타진되지 않는 한 체포되지 않은 상급 책임자는 체포되지 않은 또 다른 하급 소조원을 찾아 조직을 재건할 수 있다. 예전의 하급을 상급으로 끌어올리고 체계를 약간 재정비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남한 지하당의 최고 상급이자 모든 보고가 총화되는 곳은 바로 북한의 조선노동당이다. 따라서 북한이 붕괴되지 않는 한 남한의 지하당은 절대로 절멸하지 않는다. 조선노동당이 없어질 때에야, 당연히, 한국의 종북주의자들도 자취를 감출 것이다.

지하당의 규모
그럼 이러한 주사파 지하당의 조직원 규모는 얼마나 될까? 의미 있는 질문이기 때문에 약간 주관적이더라도 추정을 해볼 수밖에 없다.

전남대와 같이 학생운동이 활발했던 대학은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하여도 전체 학생 가운데 10% 이상은 학생운동에 참여했다. 신입생이 4,000명이면 400명 정도는 운동권이 되었고, 그중에서 주체사상과 NLPDR를 어느 정도 받아들이는 사람은 20~30%였다. 한 학년에 100명 남짓 주사파가 되었다고 보면 된다.

전남대의 특별한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그 20배로만 추산해보아도 한 해에 우리나라 대학에서 2,000명 정도의 주사파는 탄생하였다. 이것도 굉장히 보수적으로 추산한 것이다. 1992년 한양대에서 열린 전대협(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출범식에 약 5만 명의 대학생들이 참가했는데, 이 중에서 20%인 1만 명 정도는 주체사상까지 받아들인 상태였다고 보면 된다. 한국의 대학가에 주체사상이 본격적으로 흘러들어온 때가 1986년경이고, 퇴조하기 시작할 때에 일어난 사건이 1996년의 연세대 점거 사건이다. 그 10년 동안 최소한 3만 명 정도는 주체사상의 세례를 받았을 것이라 개인적으로 추정한다.

이렇게 대학시절 주사파였던 사람들 가운데 절반 이상은 사회에 진출한 후 ‘어린 나이의 치기’ 쯤으로 생각하고 자체 전향을 하였을 것이지만, 반미 반정부적 성향은 거의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자신의 주사파 경험은 ‘진보’의 일환이었다고 스스로 위안 받고 싶으니까 그럴 것이다.

생각을 전혀 바꾸지 않은 나머지 절반은 직장생활을 하면서 사회단체에 소속되어 있거나, 아예 사회단체 상근자로 일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럼 그중에 아직도 지하당 활동을 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지하당’이라는 개념의 범위가 약간 애매하긴 하지만, 이른바 전위가 되어 평생을 김일성-김정일 정권을 위해 목숨 바치겠다고 다짐한 사람, 그리고 특정한 조직사업 단위를 지도하는 사람은 전체 주사파 가운데 3~5% 정도 될 것으로 직감한다. 남아있는 주사파가 1만 명 정도라면, 그중에서 오늘도 수령님과 지하당의 지시를 관철하기 위해 ‘총폭탄’의 정신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300~500명 정도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 사람들이 지금 통합진보당 선거 부정 사태의 주역이라고 보면 된다.

고작(!) 300명 정도라고 무시하면 안 된다. 내 주위에도 ‘한줌도 안 되는 주사파 세력이 대한민국을 어떻게 할 수 있겠어?’라고 다소 안이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계시는데, 이들 300명은 스스로를 ‘일당백(一當百)’이라고 부른다. 실제로 운동권이 100명이면 그중에 1명 탄생할까 말까 한 사람들이다. 세상과 정세를 바라보는 수준은 거의 구석기 시대에 머물러 있지만 자기들끼리의 강한 규율성이나 집행력, 헌신성 같은 것은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이 점을 간과하고 우습게 여기면 대한민국이 ‘큰 코’ 다칠 것이다. 이번에도 범(凡)주사파 국회의원들을 10명 가까이 배출해내지 않았던가!


■곽대중 광주 출생으로 광주진흥고등학교 학생회장과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을 지냈다. 전향 이후 북한민주화네트워크 Keys 편집장과 데일리NK 논설실장을 역임하고 현재는 개인사업 중이다. 저서로는 『웃기는 김정일』 외 다수 있다.

   
257 김정은 시대 '선물통치'…사치품 수입 70%↑  NKnet 12-10-05 3584
256 "통영의 딸 송환에 獨정부 직접 나서야"  NKnet 12-10-05 3472
255 北, 국가안전보위부에 김정일 단독 동상 건립  NKnet 12-10-04 3707
254 추석맞은 北주민 "3만원 들고 시장 나갔더니…"  NKnet 12-10-04 3720
253 "'6·28방침' 앞두고 부실 공장·기업소 통폐합"  NKnet 12-10-04 3492
252 "회령 22호 정치범수용소 지난 6월 해체"  NKnet 12-10-04 3546
251 北 "인권영화제 동족대결 노린 南정부 모략극"  NKnet 12-09-17 3547
250 9월은 '북한인권의 달'…"국민운동 본격화 시동"   NKnet 12-09-05 3611
249 "北, UFG 기간 민방위 소집해 실탄훈련 실시"  NKnet 12-09-05 5645
248 “北 독재정권 지원은 안돼, 조그련과 관계도 끊어야”  NKnet 12-08-13 4440
247 김일성 우상화 후 종교인들 ‘반혁명 분자’ 낙인  NKnet 12-08-13 4804
246 탈북자 출신 전도사 박영숙 씨가 말하는 북한 종교탄압 실태  NKnet 12-08-13 6808
245 北, ‘세계 최악 종교탄압국’11년째 선정  NKnet 12-08-13 5273
244 장성무의 평양25時  NKnet 12-07-31 4232
243 [종북주의 해부하기]-11  NKnet 12-07-30 4256
242 "2010년 북중정상회담서 中유휴지 경작 합의"  NKnet 12-07-30 3544
241 김영환 "中 국가안전청 조사과정서 가혹행위"  NKnet 12-07-25 3771
240 17, 18대 국회서 제정 못한 ‘北인권법’ 19대선 가능할까?  NKnet 12-07-19 4030
239 [기고]나는 어떻게 주사파 전위조직원이 되었나  NKnet 12-07-19 4333
238 北 내부서 "김정은 3살 아들 있다" 소문  NKnet 12-07-19 3726
12345678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