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사실 이런 넋두리를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뻔뻔스러운 사람이란 거 잘 압니다. 다만 그저그저 제 아내와 가련한 두 딸의 운명에 관심을 가져주시길...”

장년의 남성이 말했다. 조금은 일그러진 얼굴로 그는 말 한마디 하는 것도 버겁다는 듯이 행간마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천천히 말했다.

5일 서울 중구 국가인권위에서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북한인권시민연합, 정치범수용소해체본부, 국가인권위원회가 공동 주최로 열린 ‘신숙자 모녀 구출을 위한 우리의 책임과 역할’ 세미나에 참석한 오길남 박사는 “설명하기가 힘이 든다”고 말했다.

벌써 25년. 1986년 아내는 눈물로 남편의 등을 떠밀었다. “우리가 못 따라가거든 죽었다 생각하고 올바르게 살아주세요.” 떨어지지 않았지만, 서너달이면 빼올 수 있으려니 생각했었다. 그 믿음은 1992년 4월 독일주재 한국대사관에 자수할 때까지도 계속됐다. 하지만 그게 영영 이별이 됐다.

세미나를 주최한 북한 인권 단체들에 따르면 오 박사는 국내에 입국한 뒤 아내와 딸의 구명을 위해 몇 차례 시도를 했지만 무산된 바 있다. 1993년 2월 ‘김일석 주석, 내 아내와 딸을 돌려주오’라는 책을 펴내고 본격적인 구명운동을 펼치려 했지만, ‘남북관계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우려한 당시 한완상 통일부총리가 국가안전기획부을 통해 대중적 판매를 제한해 무산됐다. 같은 해 한번 더 구명시도가 제기된 바 있다. 장기수 이인모의 북송과 맞바꾸자는 의견이 국가안전기획부 내에서 나온 것. 그러나 이 역시 청와대의 반대로 무산됐다.

신씨 모녀의 생사확인은 1994년 국제사면위원회 사무총장이 신숙자씨와의 면담을 요청했으나 북한이 “본인이 바라지 않는다”고 거부한 게 유일한 공식 기록이다. 이 외에는 모두 요덕수용소 출신의 탈북자 등이 전한 정보가 전부다.

이날 오 박사의 증언 제목은 ‘나는 가족을 파멸로 이끈 바보였다’. 오 박사의 통한은 깊었다. 건강이 좋지 않은 몸으로 참석한 그는 말하는 내내 한숨을 쉬었고 시선을 아래를 향했다. 두 딸과 아내의 사진이 담긴 동영상이 상영될 때에는 눈을 떼지 못했다.

오 박사는 북한에 두고 온 가족들을 “갸냘픈 아내와 가련한 두 딸”이라고 표현하면서 “이런 넋두리도 할 자격도 없고 (내가 얼마나) 뻔뻔스러운지 잘 안다”고 말했다.

오 박사는 “미물같은 인간이 되었지만, 가족과 헤어진 후 매일 밤 아내와 사랑하는 두딸, 혜원이 규원이가 아빠라고 부르는 호곡성을, 저 죽음의 골짜기 속으로 자지러지는 호곡성을 아직도 듣고 있다”고 한숨쉬었다.

이어 “북한에 들어갔다가 탈출하게 된 경위를 다 설명하기 어렵다”며 “관심을 가져주시는 여러분께 심심한 사의를 표하고 싶다. 길게 말을 할 수 없는 것을 양해해달라”고 고개 숙였다.

신숙자씨가 수감됐던 요덕수용소에서 그녀와 두 딸을 목격한 탈북자들의 증언도 이어졌다. 이들은 “서독집으로 통했고, 사람들과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말도 섞지 않았다. 남편 때문에 들어왔다고 했는데, 힘없는 모습으로 기억한다”면서 ‘납북자·국군포로 문제를 푸는 고리로 접근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요덕수용소에 1988년부터 1992년까지 수감됐었던 김태진 정치범수용소해체운동본부 대표는 “88년 요덕수용소에서 신숙자씨를 만나봤다”며 “그 때는 신숙자라는 본명은 알 수 없었고 그냥 ‘서독집’으로 불렀다”고 기억을 더듬었다.

김 대표는 “겨울에는 산에서 나무를 해서 불을 때야 하는데 여자들만 있으니 그게 어렵지 않나. 우연찮게 (신숙자씨 모녀에게 나무를 해줄) 기회가 생겨 해다 준 적이 있는데 옥수수가루로 네모난 구멍이 있는 빵을 해준 기억이 난다”며 “남한에 와서 보니 그게 와플이더라. 수용소 안에서 옥수수 가루는 특식이라서 아껴 먹는 건데 그 귀한 걸 (일 도와줬다고) 감사의 표시로 구워주었는데 참 맛있게 먹은 기억이 난다”고 했다.

김 대표는 “오 박사도 ‘우리집에 와플기계가 있었다’고 (내가 만난 사람이) 신씨가 맞다고 했다”며 “북한에서 오 박사를 다시 데려오려고 부부를 독일에서 해후시킬 계획을 세웠는데 신씨가 거부했다고 들었다. 한 가족의 문제가 아니라 납치자나 국군포로 등을 푸는 고리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모든 노력을 다해서 조속히 구출해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92년부터 1995년 사이 요덕수용소에 수감됐던 또다른 탈북자 김수철씨(가명)도 “본명은 몰랐지만, 기가 자그마하고 머리가 새하얗게 된 여자분이었다”면서 “남편이 독일에서 도망쳐서 딸 둘이랑 인질로 (잡혀)있는 집이라고 들었다”고 밝혔다.

김씨는 이어 “평양 음악대학 출신의 한 여자 동지와 친했는데 그가 신씨와 친한 덕분에 신씨의 집에 갔었다. 평양에서 유일하게 전축이 있던 집이었다”며 “한번은 식사를 같이 했는데, 거기서 만난 신씨나 아이들 모두 말도 없고 사람들을 피하는 눈치였다. 평소에도 길을 다닐 때 고개를 숙이고 다니고 말을 걸어도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여기 말로 대인기피증이었다”고 회상했다.

김씨는 “다만 기억이 나는 게 유일하게 다른 사람들과 간간히 말을 하던 혜원이가 ‘아버지가 빨리 와서 여기 나갔으면 좋겠다. 명절마다 옷 곱게 입고 사진을 찍어서 편지와 같이 아버지에게 보낸다’는 말을 했었다”고 전했다.

국군포로의 자녀였던 탈북자 김기철씨(가명)는 “91년부터 94년까지 요덕수용소에 있었고, 이후에도 요덕수용소를 관리하는 보위부원을 통해 신씨의 소식을 건너 들었는데, 2003년 9월까지는 생존해있었던 것으로 안다”며 “방2칸짜리의 신씨집은 불만 때면 온집안에 연기가 가득차서 이걸 빼야 잠을 잘 수 있을 정도록 형편없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정치범수용소 관리자가 ‘저 아주머니 그냥 두면 죽을 것 같으니 일도 시키고 햇빛도 쪼이게 하고 생활 편의를 챙겨주라’고 해서 3달에 1번씩 동료와 교대로 땔감도 해다 주고, ‘고기가 먹고 싶다’는 혜원이에게 병아리를 길러 보라고 준 적도 있다”며 “신씨가 아프니까 혜원이가 여름용 어른 신발을 신고 한겨울에 허리까지 쌓인 눈을 헤치고 나무한다고 산을 오르던 것이며, 새벽 5시에 일어나 젖은 나무로 아궁이에 불 때느라 애를 쓰던 게 떠오른다”고 씁쓸해했다.

또 김씨는 8.15 광복절을 맞아 열린 범민족대회 사진을 보며 신씨가 “윤이상에게 속아서 우리가 여기 왔다”고 울고 있던 기억이 난다면서 “재독 한국인 인텔리들을 북한으로 유인하는 임무를 신씨가 ‘양심상 못하겠다’고 거부했다고 들었다. 이런 사람들을 미국이나 일본처럼 왜 데려오지 못하는지 가슴 아프다”고 격앙된 어조로 목소리를 높였다.

세미나에 참석한 전문가들은 국제사회와의 공조를 통해 조속히 구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제성호 중앙대 교수는 “신씨 모녀의 생사확인이 가장 시급하지만, 현재의 남북관계 현실을 감안할 때 남북 당국 간 직접 대화를 통한 문제 해결은 쉽지 않다. 때문에 국제회의에서 공식촉구, 공론화함으로써 대북 압박 및 설득을 병행하는 방안을 추진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제 교수는 올 9~12월 제66차 UN총회 기간 중 개최되는 산하 제3위원회(인권문제를 다루는 국제회의체), 2012년 3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제 19차 유엔인권이사회(UNHRC) 고위급 회의 등을 통해 국제공조를 얻어야 한다면서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의 ‘선의의 중재’ 권한을 활용해 북한 측을 압박하는 방안도 고려해볼 수 있다”고 밝혔다.

또 제 교수는 “자국민 보호 차원에서 책임성과 시급성을 갖고 적극 대처해야 하는 만큼, 정부 차원에서 태스크포스팀을 구성해 통일부, 외교부, 국정원 등 관계부처간의 적절한 역할분담이 필요하다”며 “특히 외교부는 UN 총회 결의에 이들의 귀환을 촉구하는 내용을 포함시키는 방안을 고려하는 동시에 의원외교를 강화해 미국, 일본, EU 국회와도 긴밀히 협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원웅 관동대 교수는 "신씨 모녀 구출을 위해 UN을 포함한 국제사회의 양심 세력과 인권 비정부기구(NGO), 국민들의 힘을 합쳐야 한다"면서 “북한이 정치범수용소의 존재를 부인하고 있는 상황에서 힘든 도전이 되겠으나, 장기적이고 치밀한 국제 인권압력을 가해야 한다”고 밝혔다.

이 교수는 구체적으로 UN과 북한이 가입한 국제인권협약 국가보고서 심의과정에서 정치범수용소 문제를 집중 거론해야 한다며 “이를 위해서 서독의 경우처럼 우리 정부도 정치범수용 실태를 조사하고 북한인권침해 기록보존소를 운영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더불어 이 교수는 “정치범수용소 문제를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제소해 압박하고, 북한에 대한 정보를 계속적으로 발굴해낼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한기홍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대표는 일본인 납북자 요코다 메구미 사례를 들어 가족들의 노력과 정부 차원의 압박, 시민사회와의 연대 등 3박자가 조화를 이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 대표는 “최근 신씨 모녀의 구출운동이 언론의 관심을 받으면서 통영을 중심으로 서명운동이 전개되고 있어, 국민운동으로 전환할 수 있는 요건을 갖췄다”며 “오길남 박사와 시민사회단체, 종교단체 등이 광범위하게 참여할 수 있는 국민운동기구 구성함으로써 민간 차원의 협력을 확대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는 “내년 국회의원 출마자들, 특히 통영 등 경남지역 출마자들의 경우, 이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정치적 약속을 받아내는 것도 의미있는 활동이 될 것”이라며 “무엇보다 젊은 층 사이에서도 이 이슈가 확산될 수 있는 방안을 고심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통영의 딸’로 불리는 신숙자씨 모녀는 1985년 작곡가 윤이상씨와 북한 공작원 등의 월북 권유를 받은 남편 오길남 박사를 따라 북한으로 넘어갔다. 그러나 체제의 실상을 깨달은 오 박사가 이듬해 탈북하면서 함경남도에 위치한 요덕수용소(15호관리소)에 수용됐다.

이후 1991년 오 박사가 베를린에 있는 윤일상씨의 집에 방문해 아내와 두딸의 사진, 육성 녹음테이프를 건네받은 뒤 신씨 모녀의 소식은 끊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