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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자에게 ‘교수 어머니’라 불리는 주선애 명예교수 인쇄하기
이름 NKnet
2012-04-13 09:56:44  |  조회 3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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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간절한 소망은 탈북청년들이 북한 재건 과정에 인재로 쓰임 받길 원하는 거예요. 저 역시도 북한 재건 일꾼을 키운다는 마음의 긍지를 갖고 있고요. 남한 학생들은 돈 많이 벌어 잘 먹고 잘 살겠다고 하는데, 그 청년들은 황폐한 곳에 가서 일하겠다는 마음이 있거든요. 이런 부분에 있어선 남한 학생들보다 낫죠. 고생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주선애 장신대 명예교수는 탈북 청소년을 돕는 의미를 불과 몇 년 후가 될 수도 있는 북한 재건에 쓰일 인재 양성을 위한 투자라고 강조했다.

주 교수는 대학원생 3명을 포함해 현재 15명에 달하는 탈북 대학생들에게 수년째 매월 장학금을 전달하고 있다. 탈북자들을 사랑하는 마음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주 교수의 나이는 올해로 89세다. 적지 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그는 서울 종로구 효자동 주한 중국대사관 앞에서 진행되는 탈북자 북송 반대 캠페인에도 적극 참석하고 있다. 인터뷰가 있던 6일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캠페인에 참석하고 있다고 했다. 이날 인터뷰도 곧바로 캠페인에 참석하기 위해 중국대사관 인근 한 카페에서 이뤄졌다.

“탈북자들 사지에 몰리는데 가슴 아프지 않나”
평양 정의여자고등학교를 나온 주 교수는 이날 고등학교 동창회 임원진 모임에서도 캠페인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고 했다. 주 교수의 호소로 많은 동창들이 캠페인 현장을 찾았다.

그는 “오늘 모임에서 내가 가장 말이 많았어요”라며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3·1절 때는 총칼 앞에서도 저항하고 나섰는데, 요즘은 개인주의가 팽배해서인지 탈북자 몇 십 명이 사지(死地)로 내몰릴 위험해 처해 있다고 얘기했는데도 시민들이 마음 아픈 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요”라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이날 몇몇 후배가 노구의 몸을 이끌고 중국대사관까지 함께 와줬다고 한다. 그리고 동창들이 모아준 75만 원이 든 두툼한 돈 봉투를 꺼내 보이더니 캠페인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김밥과 물이라도 사서 돌리려 한다고 말했다.

주 교수는 이북5도청에서도 평안남도 행정자문위원을 맡고 있어 함경남도, 평안남도 지사 등이 자발적으로 100여 명을 조직해 캠페인에 참여했다고 한다. 이 정도면 이번 탈북자 북송 반대 캠페인을 물밑에서 움직이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주 교수가 캠페인에 매일 찾는 것은 이곳에서 단식농성을 하고 있는 이애란 북한전통음식문화연구원 원장 때문이기도 하다. 주 교수와 이 원장과의 인연은 지난 2005년 양재동에 설립한 탈북자종합회관에서 함께 일하면서부터다.

주 교수는 “이애란 박사가 어제는 ‘이제 단식이 더 이상 어려울 것 같다’고 얘기하는데, 저는 조금만 더 있어 보라 얘기했어요. 마음이 아팠지만 이러한 사람들의 희생이 있기 때문에 지금 대한민국이 움직이고 있잖아요”라고 말했다.

주 교수는 사람은 소명, 사명에 사는 거라고 강조하면서 “나도 나라를 위해 단식하다 죽으면 참 좋겠는데, 아직은 자신이 없네요”라고 고백했다. 그는 90을 앞둔 고령에도 활동량은 젊은 사람들 못지않았다. 인터뷰 직전에도 다섯 개 일정을 소화했고 약속시간 30분 전에 도착해 조용히 책을 꺼내 읽고 있었다.

탈북여성·고아 구출, 더 이상 늦추지 말아야
탈북학생들에 관한 얘기가 이어지자 주 교수의 표정이 밝아졌다. “한 달에 한 번씩 집에 오면 냉면 파티를 해요. 치킨도 시켜먹으며 이런저런 얘기도 나눠요. 한번은 고기를 먹이려고 준비했는데 냉면이 없다고 매우 섭섭해 해요. 그래서 지금 우리 집에는 냉면이 박스로 있어요. 다음 주에는 손양원 오페라가 온다고 해서 애들과 함께 보려고 티켓 15장을 끊어 놨어요.” 오페라는 여수·순천 10·19사건 당시 아들을 처형했던 범인을 용서하고 양아들로 삼아 전도사로 키워낸 손양원 목사의 일대기를 그린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사랑의 원자탄’으로 널리 알려졌다. 주 교수는 “아이들한테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떻게 죽어야 하는지를 보여주고 싶다”고 했다.

그런 그는 3년 전부터 인권운동가가 중국에서 탈북자들의 임시 거처로 운영하고 있는 쉘터(shelter) 2곳에 매달 60만 원을 지원하고 있다. “처음에는 망설였는데 사람을 직접 구하는 일이어서 시작했어요. 30만 원이면 1곳의 집세, 생활비, 약값 등으로 쓰일 수 있데요.” 가끔은 중국에서 붙잡힌 탈북자들을 빼내는 합의금도 대줘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주 교수는 최근 탈북고아들을 위한 시설도 세우고 있다. 서울 관악구 신림동의 재개발지역에 한 건물을 리모델링했다. ‘사단법인 푸른청소년센터’란 간판을 달았다. 주 교수는 이 센터의 이사장을 맡았다. ‘그룹 홈’ 형태로 탈북고아 6, 7명 정도가 함께 생활하는 것을 염두에 두었다고 한다.

“아마 애들이 매우 거칠고 사나울 거예요. 도둑질밖에 모를 수 있는 아이들인데 사람을 만들려면 사람 수가 적어야 합니다.” 아마 5월이나 6월쯤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거라고 했다. 시설운영을 위해서는 사회복지사와 청년지도자 자격증을 소지한 사람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이미 남한에서 생활하고 있는 탈북대학생 한 명이 올해 3월부터 관련 대학에 편입해 청년지도자로 준비를 하고 있는 상태다.

아무래도 탈북고아의 특성을 잘 알고 있는 북한 출신 선배의 세심한 지도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일 것이다. 주 교수는 6·25전쟁 당시 50여 명이 있던 고아원을 운영해 본 경험이 있다. 미국 유학을 준비했던 주 교수는 미국인 선교사들에게 영어를 배우러 갔다가 당시 문제가 발생한 고아원을 봐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그런 계기로 당시 29살이었던 주 교수는 2년 동안 원장 역할을 했다고 한다. “전쟁고아라서 소매치기, 도둑질에는 선수였어요. 은어도 쓰고, 당시 원장 노릇하느라 많이 혼났죠.” 그 중에 목사가 된 사람도 3명이나 되고, 큰 회사에 이사로 일하다 은퇴한 사람, 군 장교 출신, 공무원 출신도 있다고 한다.

“신앙을 갖고 사는 게 그저 고맙죠. 지금 어떻게 됐는지 모르는 아이들도 있어요.” 주 교수는 이미 70대를 넘겼을 당시 고아원생들을 추억했다. 이번에 청소년센터를 만드는 데는 5천만 원이라는 돈이 필요했다.

작년 8월 한국YWCA연합회가 제9회 한국여성지도자상 대상에 수여한 상금 2천만 원과 친척들로부터 받게 된 돈, 센터 이사들이 모은 돈 등으로 어렵지 않게 돈을 마련했다며 뿌듯해 했다.

주 교수는 “5천만 원은 하늘의 별따기처럼 만들기 어려운 금액인데 마음을 비우니 일이 풀리기 시작했다”며 “이제 그 비결을 알았다”라며 연신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1호에 이어 2호, 3호 청소년센터가 들어설 수 있다고 봐요. 팔려 다니는 북한 여성들을 구해내야 해요. 먹을 것이 없어서 자꾸만 넘어오는 고아들을 데려와야 해요. 이제 더 이상 늦추지 말고 시작을 해야 합니다.”

황장엽과의 만남이 北 인권활동 출발선
주 교수는 1940년대에 남한으로 내려온 실향민이다. 주 교수가 고(故) 황장엽 북한민주화위원회 위원장을 먼저 찾아간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황장엽 선생을 생각해 고향 음식인 만두와 콩비지를 싸들고 매주 토요일마다 황 선생이 강연을 했던 탈북자동지회의 문턱을 넘었다.

이렇게 시작된 황 선생과의 인연은 특별한 내용은 없지만 허물없이 매일 전화통화를 할 만큼 가까운 친구 사이로 발전했다. 황 선생에게는 유일한 이성 친구인 셈이다. 그래서 주변으로부터 연인이라는 오해를 사기도 했다.

“황 선생이 참 안됐다, 불쌍하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그래서 도우면서 가까워지고 가까워지면서 전도의 사명을 하겠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분을 전도하면 주체사상이 무너져 북한 전도가 쉬워질 것 같다고 생각해 열심히 다녔어요.”

이런 모습에 경찰로부터 의심을 받아 조사를 받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제가 모스크바에 교환 교수로 간 적이 있는데, 황 선생의 모스크바 유학과도 연관시키더군요. 전 90년대 갔다 왔는데 말이죠.” 황 선생 역시 주 교수를 각별히 생각해 주위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여러 모임에서도 주 교수를 각별히 챙겼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복잡한 식사 자리에서 옆 자리를 권하고 와서 기도하라고 하는데, 내가 이렇게 복잡하고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 어떻게 하냐고 하면 둘이서만 기도하면 될 것 아니냐고 하시더군요. 꼭 어린애같이 그랬어요.” 그가 황 선생을 위했던 마음은 황 선생이 주 교수에게 썼던 편지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선생님의 변함없는 우정과 배려는 쇠약해가는 저의 생명에 새로운 생명을 보태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새로운 생명은 ‘아가페’적 사랑의 완벽한 체현자만이 주실 수 있는 고귀한 선물일 것입니다.”(2003. 3. 8.) 주 교수는 유물론자였던 황 선생을 전도하려고 노력했지만 그 성공 여부는 하나님만이 아는 일이라고 말했다. 다만 “황 선생은 책상 위에 놓은 성경을 가리키면서 ‘봐라, 성경을 보지 않나’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탈북자들로부터 ‘교수 어머니’로 불려
황 선생과의 만남은 주 교수가 북한인권, 탈북자 문제에 발을 들여놓게 하는 계기가 됐다. 당시 처음 탈북자들을 만난 느낌은 매우 낯설었고, 심지어 불편하기까지 했다고 회상했다. “싸움도 잘하고, 어찌나 술도 많이 먹는 사람들이 많던지, 서로 야단도 치고, 땡강 부리기도 하고….” 이런 첫 느낌과 달리 주 교수는 결국 2005년도에 탈북자종합회관을 세우게 된다. “당시 탈북자들을 만나 보니 정착이 잘 안 되더군요. 사랑을 깨닫게 하고 마음의 안정을 갖게 해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홀트’에 데려가 인간의 존엄성을 알게 해주고, 최일도 목사의 ‘밥퍼’에도 데려가서 이렇게 사랑하며 살면 천국이겠구나라는 점을 깨닫게 해주고 싶었어요.”

당시 탈북자 대상 복지는 초창기로 복지관에서는 탈북자들에게 당장 도움이 되는 의료검진, 이발활동부터 상담소 운영, 각종 세미나, 지도자 양성 프로그램 등을 운영했다. 지금은 더 이상 운영되지 않지만, 주 교수의 헌신적인 모습에 많은 탈북자들은 관장이었던 주 교수를 ‘교수 어머니’로 기억한다.

주 교수는 기독교계에서는 널리 알려진 유명 인사다. 우리나라 최초의 기독교 교육학 교수로 기독 교육의 기초를 놓은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여성 지도자로 통한다. 할머니, 부모로부터 기독교를 이어 받았다. 아버지 역시 목회자였는데, 23살에 폐병으로 사망했다. 집안 어른들 역시 폐병으로 사망하고, 형제들도 없었던 주 교수는 어머니와 둘만 남았다.

주 교수는 당시를 떠올려 “외롭고 힘들어 죽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사람이 왜 사는가’라는 물음을 학교를 다니면서 많이 가졌어요. 지금은 학교 친구들이 학교 다닐 땐 말 하나 없이 조용했던 사람이 왜 이렇게 떠들고 다니냐고 말할 정도예요. 당시에는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고민하고 다녀서 조용하고 말도 없었죠.”

이런 주 교수를 방황의 터널로부터 나올 수 있도록 안내했던 한 권의 책이 있었다. 빈민굴에서 기독교 전도활동을 했던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의 자전적 소설인 『사선을 넘어서』라는 책이다. “그 사람도 나와 같은 고민을 했는데, 빈민과 함께 살면서 기독교 진리를 찾고, 그들을 돕는 것에서 보람을 느끼고 살아가죠. 그 책을 보고 감동 받고, ‘삶이란 이런 것이다’라는 해답을 얻었어요. 바로 약한 사람, 가난한 사람을 돕고 사는 것이죠.” 주 교수는 주위 사람들을 만나 캠페인이 나가 사람들에게 힘을 주자고 얘기하면 다들 어려워한다고 말했다. “나이가 들어 50년 이상을 그렇게 살아와서 어쩔 수 없다”면서도 “나는 보고 못 견디겠는 걸… 이렇게 살아와서 내게는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주 교수는 지난해 뉴욕신학대가 수여하는 제2회 김마리아상을 수상하기도 했는데, 당시 수상 소감에서 주 교수는 탈북자들의 남한 정착을 위해 여생을 헌신하겠다고 다짐했다.

주 교수는 “현재 수많은 탈북여성들과 버려진 고아들이 중국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현실을 기억하며 한국 기독교가 북한 구원을 위해 열정을 다해 기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터뷰 내내 그는 몸을 의자에 기대면서도 테이블 위에 두 손을 살포시 올려놓고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간혹 말 중간 중간에 수줍어하는 표정에서는 앳된 소녀의 모습이 비쳐지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어느 순간에는 “제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설명이 좀 필요하겠군요.”,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를 아세요?”라고 말하며 대화를 주도하는 적극적인 모습도 보였다.

“사람을 사랑했던 스승으로 기억됐으면”
약속했던 1시간 인터뷰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인터뷰 막바지가 되자 주 교수의 제자인 70대 목사로부터 전화가 빗발쳤다. 전화기 너머로 “교수님, 여기 중국대사관 앞인데 날씨가 매우 쌀쌀합니다. 나오지 마시고, 그곳에 계세요. 바로 그쪽으로 모시러 가겠습니다”라는 통화음이 들렸다. 하지만 주 교수는 잠시 고심하더니, 이내 중국대사관으로 발길을 옮겼다. 추가적인 대화가 필요했으나 더 이상의 인터뷰는 어려웠다.

그렇게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는 여생을 산에 가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 강원도 포천에 있는 장로회신학대학 영성훈련원에서 조용히 기도하고 싶다고 했다. 그럼 좀 쉬시지 그러느냐고 하자 “지금은 일이 많아서…”라며 말끝을 흐렸다. 그는 자신이 20대에 얻은 진리라고 했던 ‘나보다 못한 사람을 도와야 한다’는 신념을 실천해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기자와 헤어지면서 “제자들에게 올바르게, 의롭게, 사람을 사랑했던 스승으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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