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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대담] 핵심 주사파 운동권 출신 구해우-최홍재 인쇄하기
이름 NKnet
2012-07-06 09:34:01  |  조회 6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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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북주의 세력이 진짜로 존재하는 것일까? 종북주의, 주사파(주체사상파)라고 하면 ‘색깔론’으로 치부되었던 게 사실이다. 북한 독재정권의 실상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어느 누가 북한 정권을 추종하겠느냐는 아주 상식적인 판단에서다. 그러던 찰나에 지난 4·11 총선 과정에서 통합진보당 내 비례대표 부정선거가 저질러졌고, 그 배후가 주사파 세력인 ‘경기동부연합’이란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민들도 ‘어 진짜 종북세력이 있나보다’라는 인식을 갖게 됐다. 은 종북세력의 실체를 보다 더 사실감 있게 들여다보기 위해 과거 주체사상을 받아들이고 변혁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두 사람을 통해 종북주의 논란을 진단해 보기로 했다. 대담에 임한 구해우 미래전략연구원 이사장은 고대 83학번으로 1980년대 중반 자생적 주사파 조직인 ‘자주·민주·통일’ 그룹을 이끌던 리더였다. 고대 87학번인 최홍재 남북청년행동 대표도 1990년 고대 총학생회장을 역임한 주사파 운동권 출신이다. 현재 두 사람은 사상적으로 노선전환을 하여 북한 선진화 운동과 북한 민주화운동에 매진해 오고 있다. 편집자주

 

 

최홍재: 최근 통합진보당 부정선거 사태로 촉발된 종북(從北) 논란으로 세간이 시끄럽습니다. 종북을 야기하는 근본인 주체사상과 관련하여 먼저 한 말씀해 주시죠? 주체사상을 어떻게 받아들였고, 또 어떤 계기로 버리셨나요?
구해우:
학생운동을 시작해서 맑스레닌주의를 받아들이고 주체사상을 받아들인 것은 1985년 말에서 1986년 초였던 것 같아요. 그런데 사회주의에 대한 회의를 가지게 된 것은 소련과 동구 사회주의권 국가들이 붕괴되면서였죠. 그러면서 새로운 책들도 보고 1994년에 중국에 가서 중국 사회주의의 실상을 한번 보자고 결심했죠. 2주 동안 여행 일정으로 당의 간부나 공장 책임자, 노동자, 교수 등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서 사회주의를 체험해보려고 생각했어요. 그때 중국 사회주의를 보고서야 맑스레닌주의를 완전히 버린 셈이죠. 그런데 주체사상에 대한 미련은 남아 있었어요. 주체사상에 대한 미련, 어쨌건 통일에 관한 문제와 관련해서 협력적인 차원에서 해볼 수 있는 게 아니겠느냐는 생각을 했죠. 그리고 맑스레닌주의와 주체사상은 무언가 차이가 좀 있지 않겠는가라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어요. 또 북한이 망하지 않았으니까요. 그런 것들이 작용하면서 주체사상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는데, 하여튼 그런 상태에서 운동의 방향 전환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죠. 그래서 1994년 중국에 갔다 온 직후부터 운동의 방향 전환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고민했고, 그때부터 김영환 선배를 만나서 새로운 조직을 한 번 준비해보자는 마음을 먹었죠.

최: 그게 ‘푸른 사람들’이라는 단체인가요?
구:
그렇죠. 1994년 중국에 갔다 와서 사회주의는 아니다라는 결론을 내렸는데 사회주의는 아니지만 주체사상에 대한 미련은 남아있었어요. 그때 김영환 선배와 같이 운동의 방향을 전환해보고, 모든 것을 합법 조직으로 끌어내야 한다는 몇 가지 명제를 가지고 시작을 했죠. 그래서 한 1년 정도 준비를 해서 1995년에 ‘푸른사람들’을 만들어 주로는 김영환 선배와 같이 일을 했어요. 그러다가 1996년에 이견이 생겼던 것은 북한 문제예요. 일단 작게 얘기 하면 김영환 선배는 북한 민주화운동으로, 당시에는 ‘북한 붕괴론’을 주장 했었던 편이었는데 저는 당시 햇볕정책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었어요. 그래서 햇볕정책을 통해서 북한을 개혁개방으로 변화시켜 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죠. 이후 김영환 선배는 북한 민주화운동 쪽으로 가고, 저는 계속해서 변화되는 과정을 밟아 북한 선진화운동으로 발전이 되었던 것이죠. 그러니까 저는 주체사상을 극복하는 데 1994년부터 시작해서 10년 정도가 걸린 셈이에요. 2004년이 되어서야 노선 전환을 했으니까요. 계속해서 변화되는 과정이 있었는데, 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바꾸는 게 그렇게 쉽지 않다고 봐요. 어떤 사상이론을 공부하고 뜻을 가지고 실천했던 사람이 무언가를 바꾼다는 건 대단히 쉽지 않아요. 그래서 개인적으론 공부도 계속하고 고민도 하고 새로운 경험도 쌓으면서 10년이라는 시간이 걸렸죠. 2004년부터는 ‘북한 선진화운동’을 해오고 있죠. 북한 선진화를 실행하는 것이 통일로 가는 지름길이라는 거죠.

최: 한국 주사파 운동의 태동부터 현재까지 국민들이 이해하기 쉽게 간략하게 정리를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구:
1980년대 주사파 4대 조직이라는 표현이 일부 언론에서 나왔는데 사실 정확한 표현은 아닙니다. 전두환, 노태우 정권까지는 자생적 주사파 조직이 주로 활동했던 시기이고, 1990년대 이후에는 북한 노동당(간첩)과 연결되어 있는 조직들이 활동을 합니다. 북한 노동당과 직접 연결되는 조직들이 많이 늘어난 거죠. 민혁당(민족민주혁명당)이 그중에 하나이고, ‘중부지역당’도 그렇고 ‘구국전위’이나 ‘일심회’ 사건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1980년대는 소위 자생적 주사파 조직이 만들어졌는데, 1985년 하반기 때부터 시작이 된 거죠. 거기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게 <강철서신>과 <예속과 함성>이라는 팜플릿이에요. <예속과 함성>은 김성만(구미 유학생 간첩단 사건 사형수) 씨가 쓴 것으로 알고 있는데, 골자는 한국 현대사를 반미투쟁사로 쓴 것이죠. 아주 선동적으로 말입니다. 그런 게 상당히 강렬한 영향을 미쳤어요. 그러면서 1985년 말부터 학생운동권에서 생긴 하나의 경향이 북한 방송을 듣는 거였어요. 평양방송, 중앙방송 등에서 주체사상 강좌가 방송되니까 이것을 다 녹취를 해서 책으로 만들었어요.
그 다음에 통혁당(통일혁명당)의 후신인 ‘한국민족민주전선’(한민전)이 있는데, 이게 한국 사회에서 주사파가 확산되는 중요한 계기가 됩니다. 1985년에 한민전이 등장하면서 나타나는 특징은 구체적으로 학생운동 조직의 투쟁지침, 전략전술 등을 계속해서 제공한 것입니다. 그래서 1986년부터 본격적으로 주사파 조직이 등장하게 되는데, 1980년대 주사파의 대표적인 조직이라면 1986년에는 구학련(구국학생연맹)이 있어요. 김영환 선배가 주도했던 구학련이 학생운동을 주도했고, 1987~1988년에는 조혁 선배가 주도했던 ‘반미청년회’가 주도했습니다. 반미청년회는 학생운동 주사파 조직을 중심으로 해서 학생운동을 주도했어요. 그 일부가 언론에 나오면서 주사파 4대 조직(자민통, 조국통일촉진그룹, 반제청년동맹, 관악자주파)이라고 얘기하는데 그건 맞지 않아요.
반미청년회가 약간 퇴조하면서 1988년 하반기부터 1989년 상반기까지는 여러 조직들이 나타났는데, 그때 생긴 조직들을 두고 4대 조직이라고 표현한 것 같아요. 하지만 ‘관악자주파’나 ‘조통’그룹 같은 경우는 1년 정도 짧은 시기에 존재했던 작은 조직이에요. 조통그룹의 특징은 임수경 평양방북 과정을 기획해서 추진했던 그룹이고, 정책적인 기획에서 일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거지 규모가 큰 조직은 아니에요. 관악자주파 같은 경우 서울대 구학련 조직이 깨지면서 그 와중에 1년 정도 서울대를 중심으로 역할을 했던 조직이지 큰 조직이 아니었어요. 반제청년동맹은 김영환 선배가 주도했던 구학련이 재편된 거고, 이게 나중에 민혁당이라는 하나의 흐름이 됐다고 봐야 합니다. 그래서 1980년대 대표적인 주사파 조직을 꼽는다면 구학련, 반제청년동맹, 민혁당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흐름과 또 하나는 자민통과 반미청년회가 있는 셈이죠.

최: 자민통이 어떤 조직인지 자세하게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구:
당시 반미청년회가 학생운동 주류에 있었고 자민통은 비주류였어요. 그런데 주사파 노동운동 조직과 연계를 가지면서 전국 조직화된 거죠. 이게 구 자민통이에요. 구 자민통은 상대적으로 정통 주사파와 가깝고, 개인적으로는 1988년 상반기부터는 교조적 주사파가 문제가 있었다고 보았습니다. 한국 현실을 잘 고려하지 않았죠. 그 부분을 극복할 수 있는 방향 전환이 필요했습니다. 사실 구 자민통을 만드는 역할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지만 혼자 나와서 새롭게 시작하게 됐어요. 1년 정도 새롭게 활동하고 조직하고 해서 1년 뒤에는 구 자민통의 입장을 바꾸게 돼요. 그리고 전국에 있는 중소조직까지 통합했어요. 그래서 통합적인 전국조직을 만드는 게 1989년 하반기입니다. 그게 신 자민통인데 규모가 아주 커졌어요. 그래서 안기부에서 1990년에 발표할 때 조직원이 2만 명이라고 발표했는데, 실제 조직원은 200명 정도였습니다. 전국 각 대학의 활동가 조직을 포괄해서 그걸 모두 따지면 2만 명 정도 되니까 안기부 발표가 비교적 정확한 셈이죠.
그런데 안기부 수사발표는 구 자민통과 관련해서 나옵니다. 당시 외대에 있는 방송청취팀이 발각돼서 외대를 중심으로 발생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사실 자민통의 실체는 30%정도밖에 드러나지 않았어요. 제가 묵비권을 행사했기 때문이죠. 사실 학생운동 역사를 보면 1989년 하반기부터는 주체사상을 수용하기는 하는데 한국적인 현실, 노학연대를 강조하면서도 한국적인 현실을 강조하자는 입장입니다. 그러면서 노동운동 조직이 새벽파(NL 제3주사파 조직) 조직과 연계를 가지면서 소위 말하는 신 자민통 조직이 되는 거죠. 이 조직이 1990~1991년까지의 학생운동을 주도하는 거죠.
그 뒤 1992년에 제가 구속이 됐고 이후에 나타나는 경향은 학생운동 전체에서 소위 교조적 주사파가 다시 세를 형성해 나가는 모습을 볼 수가 있어요. 사건으로 보면 1992년 중반에 중부지역당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러면서 교조적인 주사파 세력이 다시 세력을 형성합니다. 한총련으로 이어지면서 그 경향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 것 같습니다. 1993년 이후에는 제가 학생운동에 관여를 안 했기 때문에 구체적인 흐름은 모르는데 하여튼 한총련이 등장하면서 대중운동 차원에서는 학생운동이 소수화되고 고립화되는 것 같았습니다. 이념적인 차원에서는 역으로 다시 교조적인 경향을 띠게 되었다고 생각해요.

최홍재

▲ 최홍재
최: 저는 1992년, 1993년도에 한총련에서 활동을 했었는데 상당히 교조화되어 있었어요. 전대협에서 논의할 때는 국민들 정서가 상당히 많이 고려되고 국민들 눈높이에서 구호나 전술을 수립하려고 애를 썼어요. 한민전 방침도 그 안에서 해석하려고 했고요. 물론 거기에서도 긴장은 있었죠. 한민전 방침은 무조건 관철해야 한다는 그룹도 있었고, 어쨌든 우리 실정에 맞게 해야 한다는 입장이 강해서 전체적으로는 전대협이 크게 국민들로부터 고립된 행동은 안 했어요. 그런데 이게 93년에 한총련이 출범하면서 이른바 국민정서나 국민의 눈높이에 맞추려는 경향이 퇴조하고 굉장히 교조화됐어요. 가장 대표적인 게 범민련을 둘러싼 논쟁인데, 저는 대중조직인 한총련에 있었기 때문에 그 밑의 지하조직들이 어떤 입장을 가졌는지 모르겠어요.
구:
사실 그것은 자민통 문제와 연관이 있습니다. 자민통이 1989년 하반기부터 학생운동을 전국적인 통일 조직으로 만들고, 그러면서 대부분의 문제를 실질적으로 주도하고 있었어요. 이게 1990년 사건이 터지면서 상당히 와해가 된 거죠. 그 이후 제가 두 차례에 걸쳐서 재건을 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래도 집중적인 수배를 받고 감시상태에서 조직활동을 했기 때문에 조직활동이 대단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죠. 그러면서 신 자민통이라고 부른 세력이 계속 축소되는 거예요. 1991년부터 주요한 의사결정에만 관여를 하고 구체적인 결정은 못할 정도가 됩니다. 그러면서 조직도 위축되었고요. 이 과정에서 전대협 내에서도 끊임없이 논쟁이 있었어요.
사실 뿌리는 한민전과도 연관이 있는데 한민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를 놓고 고민에 빠졌죠. 자민통이 조직 장악력이 있었을 때는 어쨌든 우리 실정에 맞게 해야 한다고 힘으로 밀어붙였는데, 조직이 위축되다보니까 한민전 방송을 직접 듣고 활동하는 중소그룹들이 확산되어 나갔죠. 그러면서 등장한 조직이 중부지역당이에요. 제가 감옥에 있으면서 관련자들을 만나기도 했었는데 그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봤을 때도 그렇고, 한민전 방송에 대한 충실성에 기초해서 활동해야 한다는 세력들이 엄청 확대됐어요. 전대협에서 한총련으로 넘어가면서 교조적 주사파가 확대된 것은 자민통 활동이 위축되면서 교조적 주사파가 확대된 과정이라고 볼 수 있었죠.

최: 그 당시 학생회 조직과 관련해서 기억나는 에피소드 같은 것이 있나요?
구:
여담이기는 하지만 사실 윤진호의 경우는 1989년 말에 총학생회장으로 내정이 되면서 1990년에는 전대협 의장(4기)이 될 예정이었어요. 그런데 그 결정을 제가 뒤집었어요. 당시 새로 뽑힌 서울지역 대학 총학생회장들이 모여서 윤진호를 전대협 의장으로 옹립하자고 거의 합의를 한 상태였어요. 그런데 생각해보니 1990년이 광주 민주화운동 10주년이었잖아요. 그래서 제가 새로운 제안을 했어요. 의장직을 전남 쪽으로 넘기는 게 좋겠다고 말입니다. 1990년은 주체사상파(주사파)가 가장 융성해서 학생운동 진영을 조직적으로 장악했었던 때죠. 그래서 1990년 봄에는 전남대에서 전대협 발족식을 10만 명 정도 모아서 하자는 생각이었고, 결과적으로 당시 전남대 총학생회장으로 당선된 송갑석이 제4기 의장에 올랐죠.

최: 최근에 우리 사회 안팎에서 종북주의 실체에 대한 논란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여기서 종북의 의미, 종북의 기원을 어떻게 보십니까?
구:
현재 종북 주사파 논쟁이 있는데 이 부분은 역사적인 맥락에서 정확히 분석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단 전체 좌파세력을 봤을 때는 세 가지 범주로 나눠서 생각할 수 있다는 거죠. 하나는 종북 주사파, 하나는 친북좌파고 하나는 친중파로 볼 수 있습니다. 1980년대 주사파 운동의 시작은 종북 주사파에서 시작이 된 거란 말이에요. 김영환 선배도 그렇고, <예속과 함성> 등도 북한과 연계해서 들어온 자료죠. 가장 크게는 한민전 방송이 영향을 미쳤어요. 한민전이 뭡니까? 통혁당에 뿌리를 두고 있고, 실질적으로 노동당의 지휘를 받는 조직이라는 거죠. 즉 노동당의 지휘를 받는 남한의 주사파 조직이라는 거죠. 이 조직으로부터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으면 종북 주사파라고 봐야 되는 거죠.
현재 통합진보당 안의 문제는 종북 주사파 문제라고 봐야 합니다. 그 사람들이 현재 어떤 식으로 직간접적인 연계를 가지고 있고 어떤 식의 활동 메커니즘을 갖고 있는지는 잘 모르지만 기본적으로 그 영향력하에 있다고 보는 것이죠. 그런 점에서 그 사람들의 사고방식의 문제라든가 정책 등을 종북 주사파와 연관해서 분석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또 하나는 종북 주사파 문제 못지않게 중요한 문제가 친북좌파 문제입니다. 친북좌파는 주사파의 직접 영향을 받지 않지만 1980년대 주사파의 간접 영향을 받아서 형성된 세력이라고 봅니다. 1980년대에 대해서 제대로 분석해볼 필요가 있는데, 1986년부터 1992년까지만 잡아서 얘기하더라도 이 과정에서 형성된 주사파 활동가들이 10만 명은 넘는다고 봐야 합니다.

최: 주사파 활동가가 10만 명이 넘는다면 엄청난 숫자가 아닌가요?
구:
그들은 주사파의 직간접적인 연계를 받아서 공부를 한 사람들이에요. 이 사람들이 전교조에도 가고 사회 곳곳에 진출했습니다. 이게 촛불시위 등의 과정에서 무슨 역할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분석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현재 종북 주사파와 같이 주사파의 직접적인 영향, 북한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사고 자체는 주사파적인 사고를 하고 있고, 주사파적 사고의 핵심은 반미친북이라고 봅니다. 그 사고가 광범위하게 퍼져있다는 거죠. 이 사람들이 국가 정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중대한 과오를 저지르게 한다는 거죠. 이들이 친북적 입장을 가지고 있다 보니 한-미 FTA, 천안함 사건, 제주도 해군기지 문제, 북한인권법 문제 등에서 잘못된 입장을 내세우고 있는 겁니다. 예를 들어 한-미 FTA나 한-EU FTA는 기본적으로 큰 차이가 없는데도 한-EU FTA 할 땐 아무말도 안 하다가 한-미 FTA는 무조건 반대 목소리를 냅니다.
한-미 FTA를 반대하며 내세웠던 중요한 이유가 한국 농업이 망한다는 것이었는데 지금 보면 한-중 FTA에 대해서는 또 가만히 있어요. 그런데 한-미 FTA와 한-중 FTA를 비교하면 농업에 미치는 타격은 한-중 FTA가 훨씬 크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시위가 없단 말이죠. 그러니까 반미친북적인 인식과 연관해서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천안함 문제도 마찬가지죠. 북한과 중국 정부의 발표와 거의 비슷한 내용으로 북한의 소행으로 보기에는 구체적인 근거가 부족하다는 입장이에요. 의혹이 많다는 식으로 몰고 갑니다. 그 근본 배경을 반미친북적인 인식과 연관해서 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북한인권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최: 1980년대 주사파 운동은 학생운동을 주도하고 사회운동으로 외연을 확대해나갔다고 했는데, 1990년대 주사파 운동이 전체적으로 종북주의였다고 규정하는 것인가요?
구해우

▲ 구해우
구:
1980년대 학생운동에 대해서 정확히 평가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1980년대 초기에는 맑스레닌주의 영향을 받았고, 1986년 이후에는 주사파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 역사적인 배경을 평가하는 게 중요하다고 봐요. 1980년대 학생운동의 본질은 민주화였단 말이죠. 우리가 맑스레닌주의, 주체사상을 받아들인 것도 민주화운동의 수단으로 받아들인 거죠. 이게 본질입니다. 주체사상을 받아들여서 문제가 된 것도 있는데, 전체적인 차원에서 평가한다면 민주화 투쟁의 수단으로 삼았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1992년까지는 공(功)이 70%고 과(過)가 30%라고 생각합니다.
공이 70%인 것은 주체사상을 수용하고 영향을 받았다 하더라도 반독재 민주화의 수단으로 삼은 측면이 있고 민주화에 기여하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과정에서 과도 30%는 있습니다. 분명히 종북적인 부분도 있었죠. 한민전 방송을 따르는 등 종북적인 행태가 나타났죠. 평양축전 참가 같은 경우도 종북적인 정책결정이기 때문에 역사적 평가를 내려야 하는 문제라고 봅니다. 1988년 올림픽이 남한에서 개최가 될 때 북한에서는 그에 대한 대응으로 평양축전을 이벤트로 만들었는데 이것이 북한 체제에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에 대해서도 분석해야 합니다. 30%의 종북적인 부분이 있었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는 반성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 보편적인 인권과 민주주의를 개선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70%의 공이 있다는 것이군요. 그런데 92년으로 한정지은 것은 어떤 의미인가요?
구:
1993년 이후에는 부족하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민주주의 정부가 들어섰단 말이죠. 그러한 상황에서 주체사상의 영향을 받아서 활동하는 것은 그야말로 종북적인 행위라고밖에 말할 수 없단 말이죠.

최: 현재 크게 보면 세 부류가 있는 것 같아요. 1992년도까지의 긍정성과 약간의 부정성이 잉태된 운동이 세 갈래로 나뉘어졌는데 하나는 종북세력, 하나는 북한 민주화운동, 하나는 애매모호한 386들, 이렇게 크게 분류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 각각의 특성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구:
저는 1992년도에 운동의 방향전환이 필요했다고 보는 것이고, 그런 맥락에서 아까 말씀드렸지만 김영환 선배와 함께 운동의 방향전환을 모색한 ‘푸른사람들’을 만들었죠. 김 선배는 북한 민주화운동으로 간 것이고, 저는 북한 선진화운동의 방향으로 갔죠. 그리고 한편에서는 주사파의 흐름이 지속됐고 또 한 흐름은 주로 민주당에 포진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 상당수가 친북좌파적인 인식이 지속되는 상태인데 아까 애매모호하다고 표현했지만 가장 중요하게는 여러 가지 생각들이 현실화된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인 인식에서 반미친북적인 생각들이 변화되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얼마 전 임수경 씨의 발언이 적나라하게 표현해주고 있지만 그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반미친북적인 인식이 깔려있기 때문에 제가 아까 말씀드린 4대 이슈, 한-미 FTA라든가, 천안함 사건, 북한인권법 문제, 제주 해군기지 문제 등 중요한 이슈가 나타날 때마다 여러 가지 고민은 하지만 최종 결정할 때는 한쪽으로 치우친 방향으로 간다는 것이죠. 이게 심각한 문제죠. 종북주의자는 아니지만 친북좌파라는 거죠. 종북주의와 친북좌파는 또 구분해야 하지만 이것도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해요.

최: 많은 386 출신들이 국회에서 10여 년 넘게 활동해 오고 있는데, 왜 그런 애매모호한 태도를 계속 취하고 있을까요?
구:
저는 두 가지가 있다고 보는데, 아까 말씀드렸지만 사상이라는 것은 쉽게 바뀌지 않습니다. 현실 속에서 고민하더라도 젊은 시절 10여 년 넘게 사상적인 세례를 받으면 그런 영향을 극복하는 것이 절대 쉽지 않다는 것이죠. 그래서 그런 인식들이 많이 남아있다고 봐요.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이 1998년 김대중 정부 이후에 그 사람들이 10년 동안 집권했다는 거죠. 그러면 소위 좀 전에 표현했던 친북좌파 세력은 단순히 이념적인 세력이 아니라 현실적 이해관계 세력으로 바뀌었다는 거죠. 민주당은 사실 한국 사회에서 강력한 집단이고, 그러니까 여러 가지 이해관계가 얽혀있다는 말이죠. 10년 동안 집권하면서 여러 이해관계까지 얽혀있고, 대단히 강력한 정치집단으로 형성됐잖아요.

최: 친북좌파들의 애매모호한 태도가 초래할 위험성은 없다고 보십니까?
구:
종북 주사파 문제도 간과해서는 안 되는데, 더 큰 문제는 친북좌파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아까 4대 문제에 대해서 잘못된 방향으로 감으로써, 향후 통일 전략과 한국의 진로와 관련해서 심각한 악영향을 미친다는 거죠.

최: 제가 봐도 현재 386 국회의원 대다수는 현실정책에서 좌충우돌 내지는 대한민국을 혼란에 빠뜨리는 표리부동한 정책을 구사하고 있는데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요?
구:
이번 종북 주사파 파동과 관련해서 진보당과 민주당 내에서 종북 주사파 문제만 다룰 것이 아니라 친북좌파 문제까지 포함해서 깊게 분석하고 근본적으로 다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야당에서 주장하듯이 선거 때 이용하려고 하는 것 아니냐 하는 이야기가 계속 나옵니다. 따라서 진짜 근본적으로 해결하고 나가야 한다는 겁니다. 이번이 아주 좋은 계기가 될 수 있어요. 제가 아까 10만 명이라는 표현도 했지만 이게 심각한 문제라는 거죠. 전교조문제라든가 여러 가지가 모두 걸쳐있다는 거죠.
제가 아까 반미친북적인 인식을 말씀 드렸지만 반미친북적인 인식이 굉장히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데, 이 사람들은 나이도 들고 현실 생활도 하면서 현실화된 측면이 있단 말이죠. 이야기하다 보면 유연해지는 것도 있어요. 그런데 중요한 정책결정을 하는 시점에서는 항상 방향을 틉니다. 그 이유를 따져봐야 합니다. 이념적인 경향이 남아있는 것도 있고, 이해관계까지 얽혀있어서 이를 극복하려면 어찌 보면 강력한 사상투쟁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반미친북적인 인식, 이것이 한국사에서 가지는 의미가 뭔가? 이것이 어떻게 형성돼 왔는가? 이것을 정치공학적인 차원이 아니라 사상투쟁적 차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야 정책결정에서 잘못 선택하는 것을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최: 일반적으로 종북주의자에 대해 말하면 일반 국민들은 안 믿었어요. 대한민국과 북한의 차이가 매우 뚜렷해졌는데 어떻게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북한을 추종한단 말이냐, 또 28살짜리 아이가 북한 지도자가 됐는데 어떻게 저 아이를 추종한단 말이냐고 하는 등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기 때문에 종북주의자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실제 존재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그들은 왜 지금까지도 비상식적인 생각과 활동을 하고 있는 걸까요?
구:
그 문제도 역사적으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고 보는데, 한국에서 주사파 문제는 아주 뿌리가 깊다고 봅니다. 따지자면 해방정국까지 올라가는 거죠. 실제 좌우파 논쟁을 하고 주사파 논쟁을 하다보면 대한민국의 정통성문제, 독립운동의 정통성문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거죠. 어떤 사람들은 대한민국에 정통성이 없다고 하고, 약하게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정통성이 부족한 것 아니냐고 하면서 은근히 항일무장투쟁 세력을 정당히 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게 다 연관이 돼 있죠. 그래서 지금까지도 북한사회가 가난하고, 여러 문제가 있긴 하지만 어찌됐건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평가해야 하는 거 아니냐, 사회주의 가치 또는 민족 주체적인 가치를 평가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합니다. 또 한국전쟁을 논하면서 반미적인 가치를 끊임없이 양산하고 발전을 시켜왔단 말이죠. 저는 이것도 중요하게 봐야 한다고 생각해요.
효순·미선 양 사건도 우리가 제대로 검토를 해야 돼요. 미군이 의도적으로 사고를 내서 죽였다면 저라도 나가서 항의를 할 텐데, 그때 상황을 보면 우발적인 사고이고 비극적인 사건이란 말이죠. 그런데 의도적으로 죽인 것처럼 왜곡하고 수십만 명이 모여서 데모를 했잖아요. 그 배경이 뭐냐? 밑바닥에서 반미적인 정서를 확산시키려는 세력이 있다는 거죠. 이것을 간과해서는 안 돼요. 광우병 사태도 마찬가지라는 거죠.

최: 그런 종북세력의 영향력이 얼마나 크다고 보세요?
구:
한마디로 말해서 간과해서도 안 되고 과장해서도 안 된다고 봐요. 과장해서 안 된다는 것은 노무현 정부 시기에 일부 상당히 강경한 우파 진영에 계신 분들이 노무현 정부나 열린 우리당을 간첩들이 장악해서 좌지우지하는 것 아니냐고 봤어요. 그렇게까지 가는 것은 과장입니다. 종북 주사파 세력은 개인적으로 봤을 때 많진 않는데, 엄연히 존재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뿌리가 깊고 북한의 지하당 전술이나 통일전선전술이 지속되고 있기 때문에 간과해선 안 됩니다.
이보다는 간접적인 영향을 받는 친북좌파적인 사람들, 이 사람들도 연관해서 분석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거죠. 제가 봤을 때 메커니즘이 있다는 거죠. 효순·미선 양 사건, 광우병 사건은 본질적으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는 거죠. 천안함 사건도 마찬가지죠. 의혹이 있으면 친북좌파세력이 이것을 이용한단 말이죠. 그런데 국가 전체로 봐서는 친북좌파들이 국가의 주요 사안에 대해 결정을 내리는 부분에 있기 때문에 이 메커니즘을 이해해야 합니다. 이를 분리해 보면서도 대응을 해서 근본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지 않고 종북 주사파 문제만 봐서는 이 문제에 제대로 대응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 그러면 종북 주사파 세력의 수가 많지는 않지만 모든 문제의 진앙지고 강력하게 조직돼 있어서 뭔가 내용이 보급되면 친북좌파와 연결되는 지점이 있다는 거군요. 그 메커니즘이 작동되면 대한민국이 혼란에 빠지는데, 대표적인 게 효순·미선 양 사건과 광우병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는 거네요. 그러면 이 연관 메커니즘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구:
저는 그 메커니즘이 분명히 있다고 생각하지만 조직적인 연계는 아니라고 봅니다. 또한 종북 주사파의 문제는 두 가지로 봐야 하는데 본질적으로 대응하면 된다고 봐요. 국가보안법, 형법에 기초해서 무슨 문제가 있으면 처벌을 하면 됩니다. 그런데 친북좌파의 문제는 법률적으로 대응이 안 되기 때문에 사상투쟁에 기초해서 왜 그런 태도를 취하는 건지, 전면적인 논쟁을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 좀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서 통진당 문제에 있어서 일반 국민들은 종북주의자가 있다는 사람들을 향해 오히려 거짓말을 한다고 몰기도 했습니다. 당 내부에서는 이석기, 김재연 씨 제명을 둘러싼 갈등이 심각해지는 상황인데, 자체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시나요?
구:
통진당 내에서 종북주의 청산 문제는 그 내부에서도 문제의식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내부에서 분파투쟁이 일어났고, 그 결과에 따라 달라지는 것인데, 이 문제는 원칙적으로 대응해야 할 문제죠. 저는 개인적으로 더 중요한 문제가 친북좌파 문제라고 보기 때문에 이는 법률적인 대응이 아니라 정치적인 대응을 해서 그들이 갖고 있는 문제를 국민들이 제대로 알 수 있도록 전면적인 논쟁을 할 필요가 있다는 거죠. 그리고 또 한 가지 전체 좌파 차원에서 중요하게 고려할 것이 친중파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은 다들 의식하다시피 북한 같은 경우 어떤 매력을 갖는 국가가 아니라는 거죠. 굶어죽기도 하고, 세습독재 문제도 있어요. 하지만 동북아 정세의 큰 흐름으로 봤을 때는 아시다시피 중국이 세계 초강대국으로 발전하고 있고, 북한을 지원하면서 강력한 동맹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조건에서 한국 좌파의 흐름을 봤을 때 그들은 앞으로 친중파가 될 것이라고 봅니다.

최: 그것은 별도로 논의할 필요가 있을 것 같고요.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건에 좀 더 천착해봤으면 좋겠습니다. 임수경 씨가 탈북자와 북한인권 운동가들을 “변절자 xx”라고 했단 말이죠. 탈북자들과 저 같은 북한인권 운동가들에게 했는데 그 말의 의미야 해석의 여지가 없을 것 같고, 문제는 이 발언이 임수경 씨 개인의 발언으로 그치는 것인지 반미친북적인 정치인들의 일관적인 생각으로 볼 수 있는 건지 궁금합니다.
구:
그 부분도 역사적인 배경을 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원래는 북한 노동당이 진짜 주사파라고 볼 수 있을 텐데 이 사람들은 자기들과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 정적이 되는 사람들을 계속해서 배신자다, 변절자다, CIA 스파이다, 종파주의자 등으로 규정했습니다. 박헌영, 이승엽 등도 CIA 스파이다, 변절자다고 해서 처벌한 것이죠. 이것이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그런 사건들이 계속 있었습니다. 이번에도 보니까 통진당 안에서 유시민 씨에게까지 CIA 세작이라고 표현했다는데, 자기와 견해가 다른 세력에 대해 그런 식으로 규정하는 것은 도덕적으로도 정당하지 못하죠. 그리고 저는 전향이다, 변절이다, 배신이다 그런 것은 단어를 정확하게 사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경우 10년 정도를 스스로 연구하고 경험하며, 고민한 결과, 통일전략과 국가전략의 문제에 있어서 스스로 중도보수로, 북한선진화운동으로 노선변경을 한 것이지, 전향이나 배신을 한 것이 아니지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안기부 지하밀실에서 고문 받으면서도 한 사람도 동료의 이름을 불은 적이 없고 잡히게 한 적도 없습니다. 그런 원칙은 철저히 지키면서 살아왔고, 스스로 노선전환을 해온 것이지, 어떤 수사기관의 강압에 의해서 신조를 꺾었다거나 이해관계에 의해서 생각을 바꾼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이 배신, 전향, 변절이라는 말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최: 저는 딱 두 자로 표현하면 ‘진화’라고 표현을 합니다. 의미성으로 보면 진화가 맞을 것 같아요.
구: 진화라는 측면도 있죠. 노선변화라는 측면도 있고요.

최: 지난 총선에서 민주당이 통진당과 선거연대를 했고 실제로 민주당에서 주요 지역을 통진당에 내줬어요. 이로 인해 종북파들이 국회에 들어가게 됐는데 민주당의 반미친북적 흐름과 종북주의자들 간에 연관성이 있다고 보시나요?
구:
두 세력의 연대에는 본질적으로 두 가지 의미가 작용했다고 봅니다. 하나는 원칙적으로 주사파나 북한 노동당의 입장은 통일전선전술이기 때문에 광범위한 세력과의 연대는 항상 추진하는 것이죠. 민주당 차원에서는 본인들이 부정하든 부정하지 않든 간에 또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반미친북적인 인식이 밑바닥에 깔려 있어요. 또 정권을 잡아서 권력을 같이 공유해 나가는 이해관계가 양측 간에 얽혀있기도 합니다.

최: 민주당이 올바른 방향으로 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구:
반미친북적 인식을 극복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민주당 안에서도 반미친북적 인식을 갖는 사람들에게 비판적인 사람들이 분명히 있어요. 한-미 FTA, 제주 해군기지, 북한인권법, 천안함 사건 등 네 가지 이슈는 이것을 가르는 중요한 리트머스라고 봅니다. 이 같은 사안에 대해 논쟁이 붙었을 때 민주당에서도 반미친북적 인식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들이 적을 때는 30% 많을 때는 50%까지 되기도 하는데, 내부에서 투쟁을 통해 친북좌파적인 세력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한국 사회의 건전한 진보세력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유럽의 사민주의 등을 지향하는 세력이 되기 위해서는 민주당 내에서 반드시 친북좌파 세력을 극복해야 합니다. 이것이 민주당에 주어진 과제입니다.

최: 결국 합리적 세력이 민주당 내 등장하는 것이 해법이겠지만 쉬운 일은 아닐 것 같다는 말씀이군요. 이번 통진당 사태를 통해 이념문제가 정면에 등장했습니다. 그러나 민주당은 절차의 문제로 접근해야지 무슨 색깔론이냐고 하고 있고, 새누리당은 어쨌든 이념문제를 문제시하고 있어요. 양측 간의 입장 차는 어떻게 봐야 하나요?
구:
지금의 종북 주사파 논쟁을 계기로 한국 사회에 대한 근본적 분석을 다시 하고 대한민국이 어디로 가야 할지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사상 투쟁도 망설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진보당 문제는 법률에 따라 처리할 게 있고 정치적 차원에서 해야 할 일이 있죠. 그러나 우려스러운 것은 새누리당 내에서도 이것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고 법률적, 정치적 대응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죠. 제대로 된 대응이 이뤄지지 못하면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 뿐이에요. 정치적 대응을 하기 위해서는 종북 주사파나 친북좌파 세력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비판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과잉 대응을 하면 한국 사회의 특수성이 결부돼 서로 난타전으로 번지게 되고 결국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안 되게 됩니다. 새누리당이나 보수 진영에서 절대로 과장해서 대응해서는 안 돼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가지고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대응해야만 종북 주사파를 제대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또 다른 정쟁으로 흐를 가능성이 있어요. 지금 현재로서는 후자의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입니다.

최: 끝으로 우리 국민들이 종북주의 문제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그리고 정치권은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구:
현재 종북주의 문제는 향후 우리가 통일을 어떻게 해나갈 것인지, 한반도 미래전략을 어떻게 세울 것인지와 관련해서 중요한 시기에 부닥치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입니다. 따라서 정쟁으로 흐르지 않도록 지혜롭게 관리하면서도 단호하고 강력한 사상투쟁, 정책투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기초하여 종북좌파, 친북좌파, 친중파의 본질을 국민들이 똑바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북한의 선진화에 기초한 통일된 선진국가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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