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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 인터뷰]야누스 오니슈키에비치 전 유럽의회 부의장 인쇄하기
이름 NKnet
2012-11-19 09:51:24  |  조회 3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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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동유럽과 소련에서는 세계를 뒤흔든 대격변이 진행 중이었다. 반세기 이상 계속되어 온 냉전체제와 인류의 3분의 1 이상을 지배해온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붕괴한 것이었다. 공고해보이기만 했던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를 가져온 것은 바로 동유럽 시민들의 자발적인 민주화 운동이었다. 이 동유럽 민주화 운동은 동독의 교회에서,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의 광장에서, 그리고 폴란드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들불처럼 일어났다. 소련 군대의 탱크는 시민들의 평화롭지만 단호한 의사표현 앞에 포구를 돌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편 동유럽의 민주화와 공산권 붕괴를 가능케 했던 탄탄한 시민사회 역량은 북한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산정권의 붕괴와 민주화,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공고화 과정에서 보여준 동유럽 각국의 경험은 향후 북한의 미래에 중요한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북한이 어떠한 과정의 변화를 겪든지, 독재정권의 붕괴, 민주화, 시민사회의 등장은 피해갈 수 없는 필연의 과정이다.
지난 10월 8일부터 12일까지 미국 국립민주주의연구소(Nat-ional Democratic Institute) 초청으로 방한한 폴란드 출신의 야누스 오니슈키에비치(Janusz Onyszkiewicz) 전 유럽의회 부의장은 북한의 미래 시민사회, 민주화를 위해 뛰고 있는 한국 내 시민사회단체들에게 동유럽의 귀중한 경험을 전수할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된 모습이었다.
“북한과 폴란드의 경우는 분명히 다릅니다. 하지만 나는 폴란드의 민주화가 향후 북한이 미래에 겪을 변화에 어떤 시사점을 줄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오니슈키에비치 전 부의장은 방한 기간 중 과 인터뷰를 갖고 이같이 말하면서 폴란드 민주화 운동 당시와 공산정권 붕괴 이후의 민주주의 정착과정에 대해 설명했다.
야누스 오니슈키에비치는 1937년 12월 18일 폴란드의 르보프 (현 우크라이나 르비프)에서 태어나 바르샤바 대학교 수학과를 졸업했다. 1970년대에는 저명한 수학자이자 등산가로 알려졌으며, 1980년대에는 반공산주의 ‘Solidarity’ 운동의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오니슈키에비치는 탁월한 영어 실력 등으로 외국 기자들 사이에 많이 알려졌으며 1981년 12월 13일 폴란드에 계엄령이 선포된 이후 체포, 감금되기도 했다.
1989년 공산주의의 몰락 이후 그는 폴란드의 국회의원이 되어 1989년 5월부터 2001년까지 활동했고, 1990년 봄에는 공산당 정부의 국방부에서 첫 민간인 차관에 임명됐다. 1992년과 1997년 두 번에 걸쳐 국방부 장관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후 오니슈키에비치는 2004년 유럽의회 의원에 당선됐고, 동년 7월 유럽의회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현재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위치한 국제민주화센터(International Centre for Democratic Transitions) 이사회 의장으로 있으면서 세계 각지의 독재국가에 동유럽 민주화 경험을 전수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오니슈키에비치 전 유럽의회 부의장은 방한 기간 북한인권단체들과 한국 내 청년단체들을 대상으로 동유럽 민주화 과정에 대한 강의를 가졌다.

-폴란드 민주화 운동에 참여한 본인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해 달라.
나는 폴란드 바르샤바 대학교에서 수학을 전공했다. 이러한 엔지니어적 경력은 나로 하여금 어느 정도 비정치적인 면을 갖게 하면서 정권으로부터의 감시나 탄압에 있어서 다른 활동가들에 비해 자유롭게 하는 요인이었다. 나는 대학 졸업 이후 민주화 운동에 참여하면서 대학가에서 주로 데모를 주동했다. 1980년, 그단스크 조선소에서 대규모 노동자 시위가 발생했다. 이때부터 나는 솔리다리티 독립노조 운동에 참여해, 레흐 바웬사 당시 솔리다리티 지도자와 함께 일했다. 솔리다리티는 폴란드 유일의 비정부 단체로서 1,000만 명의 회원이 가입한 단체로 성장했다. 이후 나는 솔리다리티의 전국 대변인이 됐다. 1981년, 계엄령이 내려져 솔리다리티가 탄압을 받자 투옥되기도 했다. 그 후 투옥과 석방을 반복하면서 솔리다리티의 대변인으로 폴란드와 국제사회에 폴란드 민주화의 필요성을 역설해왔다.
그러다가 1989년 동유럽에 민주화 바람이 불면서 정치적 돌파구가 생기자, 폴란드 공산정권은 솔리다리티와 원탁회의를 갖기로 했다. 나는 솔리다리티 대표단에 참여해 자유선거를 포함한 민주주의 도입에 기여했다. 솔리다리티는 그 해 열린 자유선거에서 압승해 동유럽에서 최초로 비공산정권을 세우게 됐으며, 이것이 마치 눈사태처럼 동유럽 전역을 휩쓸어 소련의 붕괴로까지 이어지게 됐다. 이후 폴란드 민주정부에서 국방 차관과 장관을 역임했고, 유럽의회 의원에 선출돼 유럽의회 부의장을 지냈다. 지금은 국제민주화센터 이사회 의장으로서 벨로루시, 몰도바 등 동유럽 국가의 민주주의 전환을 돕고 있다.

-폴란드의 민주화가 안정적으로 이뤄진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는가?
폴란드는 전통적으로 투쟁하는 민족이었다. 그러나 민주화 과정에서 폴란드는 타협과 안정을 선택하면서 성공적인 민주화를 이루어냈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폴란드 국민들에게 공산화 이후의 대안이 존재하며 더 나은 삶을 제공할 수 있다고 확신시켰다는 점이다. 또 다른 요인은 폴란드에 시민사회의 정수가 있었다는 것이다. 정부나 국가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시민사회의 존재이다. 이 시민사회는 폴란드의 가톨릭 교회에 형성되어 있었다. 개신교나 동방정교회와 달리 가톨릭 교회는 로마에 본부를 두고 있다. 따라서 가톨릭 교회는 정부로부터 일정 정도 독립성을 가질 수 있었다. 그리고 가톨릭 교회는 민주화 활동가들에게 어느 정도의 보호망을 제공했다.

-폴란드와 달리 북한에는 시민사회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북한에서 시민사회의 기반을 닦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선은 북한 주민들에게 자기 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좋은 나라가 아니며, 더 나은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실히 알려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약간이라도 독립적인 조직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인도주의 단체 등이다. 폴란드에 한 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에서는 음용수가 부족했는데, 폴란드는 지형적으로 물 부족이 심한 나라이다. 따라서 시골에 물을 제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미국에서 이 마을에 물을 제공하는 시설을 건설하기 위해 비영리단체를 세우겠다고 제안해왔다. 이러한 것이 북한이 필요로 하는 시민사회의 초석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북한 내에 사무실을 둔 이런 단체들이 북한 정권으로부터 약간이라도 자유로운 단체나 조직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북한에서의 시민사회 건설은 아주 어려운 과정이 될 것이다.

-솔리다리티에는 1천만 명 이상의 회원이 있었다고 들었다. 그러나 북한에서 그렇게 사람들을 조직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이러한 과정은 매우 서서히 이뤄져야 한다. 어떤 돌파구를 이야기하지만 그런 돌파구는 시위가 계속되면서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돌파구는 폭력적 결과를 수반하고, 아주 예측하기 힘들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최소한 어떤 형태의 조직을 만들어 자주적인 진로를 개척해나가도록 하는 것이다.

-솔리다리티 노조운동 당시 이념적 지향은 무엇이었나? 노동조합은 대부분의 경우 사회주의 경향을 띤다. 그러나 솔리다리티는 공산정권에 반대하는 노조였다.
우리의 이데올로기는 평화적 반정부 운동이었다. 폴란드는 국제노동기구(ILO)에 가입한 바 있었다. 모든 공산주의 국가들이 국제노동기구에 가입했다. 이는 공산주의 이념에도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ILO에 가입하면서 폴란드는 다음과 같은 법률을 제정할 수밖에 없었다. 폴란드에서는 모든 단체가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ILO 규정에 따르면 노동조합은 정부의 승인을 받지 않아도 된다. 따라서 노동조합은 정부에 신고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 덕분에 우리는 독립적인 노조를 만들 수 있었다. 그단스크에서 바웬사에 의해 지도되던 노동조직 역시 마찬가지였다. 또한 공산정권은 노동조합을 탄압하는 것이 애매했다. 공산정권은 노동자를 대표한다고 하지 않는가? 세계 각국의 우파 노동조합뿐만 아니라 공산주의계열 노동조합으로부터도 우리는 지지를 받게 됐다. 이러한 사실은 공산정권에 부담이 됐다.

-공산당에 가입해 체제 내 개혁을 추진하려는 사람들은 없었나?
사실 폴란드 공산당에서 그렇게 제안해온 사람들도 있었다. 폴란드 공산당에 가입해 당을 바꿔보자는 것이었다. 1956년 정치적 변화가 있었다. 20차 소련공산당 대회에서 니키타 흐루시초프 공산당 서기장이 스탈린을 비판하면서 파급효과가 전 세계 공산국가로 퍼져나갔다. 이 비판연설은 원래 비밀 연설이었으나 폴란드 공산당 대표단이 원고를 서방세계로 유출시키면서 알려졌다. 이후 폴란드 공산정권은 소련 공산당을 설득해 폴란드에서 어느 정도의 개혁을 추진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면서 토지의 사적소유도 허용하게 됐다.
내 요점은 폴란드에서의 스탈린주의의 종말이 당내에서 이뤄졌다는 것이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공산당에 가입해 당내에서 개혁을 추진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갖게 됐다. 그러나 1968년, 프라하의 봄 이후 반동 정책으로 인해 당내개혁의 희망이 사라졌다. 68년 이후에는 체제 내 개혁을 꿈꾼 사람들이 모두 당 밖에서 압박을 가해 개혁하고자 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바꾸게 된다.

-북한의 인권탄압은 폴란드의 경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심하다. 북한정권의 붕괴 이후 어떠한 화해과정을 거쳐야 한다고 보나? 인권탄압 책임자에 대한 처벌은 어떻게 해야 하나?
인권 탄압의 가해자는 반드시 처벌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공산당원 전체를 처벌해야 하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우리의 철학은 누구든지 법을 어기면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폴란드 공산정부의 법은 사실 매우 민주적이었다. 인권이 보장되고 자유가 보장됐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하나 있다. 소련의 레오니드 브레주네프 서기장이 소련 헌법을 개정하려 하자 소련의 반정부 지식인들은 이에 반대하면서 오히려 스탈린 헌법을 유지할 것을 주장한 것이다. 왜냐하면 스탈린 헌법이 겉으로는 인권과 자유를 더 보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의 철학은 폴란드 공산정부하의 법을 어긴 경우는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폴란드 공산정권에 참여했다 하더라도 법을 어긴 사람이 아니면 처벌할 수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런 사람들은 민주화에 끝까지 저항할 것이었다. 이렇게 되면 피를 흘리지 않고는 체제를 바꿀 수 없다.
솔리다리티 운동 당시에 투옥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를 관리하던 비밀경찰 간부가 나에게 이렇게 물어왔다.
“언젠가는 당신네들이 폴란드 정권을 잡을 텐데 그때가 되면 나를 잘 봐줄 수 있겠소?”
폴란드 공산당 간부들에게 결국 중요했던 것은 자신의 안위와 이익이었던 것이다. 나는 북한도 비슷할 것이라고 본다. 북한 정권에서 인권탄압에 직접 참여한 사람을 제외하고, 당 간부나 공무원들에게 민주화 이후의 안전을 보장하지 않는다면 이들이 끝까지 저항할 가능성이 있고, 민주화 시점 역시 늦어질 수 있다.

-폴란드 민주화 운동과정에서 외국 라디오의 역할은 어떠했나?
동유럽 민주화 과정에서 외부 라디오의 역할은 매우 컸다고 생각한다. 외부 사회의 삶에 대해 전해주고, 자유와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알려줬다. 그리고 폴란드에서 일어나는 상황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라디오들은 소식이 매우 빨랐다. 외부 라디오의 특파원이나 전화를 통해 우리는 자유유럽방송, 미국의 소리방송, BBC 등 외부 방송에 폴란드 내 소식을 전할 수 있었고, 그리고 그들은 다시 폴란드로 폴란드의 진실을 알려왔다. 이러한 활동은 물론 위험했다. 폴란드 법에 따르면 사회 불안을 초래하는 헛소문을 유포하는 자는 처벌될 수 있었다.
폴란드에 있으면서 들었던 외부 라디오 프로그램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정치, 인권에 관한 프로그램이었다. 폴란드에서는 이미 서방사회에서처럼 어느 정도의 자유가 있었다. 언론의 자유도 다른 동구권에 비해서 높았다. 심지어 폴란드 신문은 소련 지식인들에게서 인기를 끌기도 했다. 또 서방사회의 영화나 대중문화도 약간 개방돼 있었다. 따라서 폴란드 주민들이 원했던 정보는 외부세계의 자유와 인권에 대한 정보들이었다.

-폴란드의 솔리다리티 운동은 내부에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났다. 그러나 북한에서는 자연발생적인 운동이 불가능하다. 북한의 시민사회와 민주화 운동에 국제사회가 어떤 지원을 할 수 있을까?
폴란드에서는 서방세계로부터 정권과 솔리다리티 사이에 대화를 하도록 하는 압박이 있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폴란드는 안정된 국가로 보일 수 있었고, 국제사회의 투자나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정부와 솔리다리티 사이의 대화는 경제적인 이득을 어느 정도 가져온 것이었다. 그리고 솔리다리티는 폴란드를 방문하는 서방 정치인들을 계속해서 만나왔다. 서방 정치인들이 폴란드를 방문할 때 솔리다리티 대표자들을 만나는 것이 마치 관례가 된 것이었다. 심지어 솔리다리티가 불법 단체일 때도 그랬다. 나는 서방세계가 솔리다리티와 정권 사이의 메신저나 중간다리 역할을 했다고 본다. 그리고 솔리다리티는 서방세계에 과격한 단체가 아니며 합리적이고 중도적인 조직으로 비춰질 수 있었다. 이러한 점은 폴란드 공산정권에 있어서도, 솔리다리티와 대화할 경우 합리적인 대화가 가능하며 우리가 정권을 전복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모습을 보였다.
북한의 시민사회가 약간이라도 형성이 된다면, 그때부터는 국제사회가 북한 내 시민사회와 북한 정권 사이에서 중간다리 역할을 함으로써 북한의 연착륙을 이끌어낼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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