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의 죽음의 냄새와 中의 절망, 모든 것을 잊고 싶다”
탈북자 대학생 김철원씨, 'NK Vision'의 탈북고아 수기 통해 이같이 밝혀

2008년 10월 23일 (목) 16:40:49 장혜원 기자 jangjang@upkorea.net


“나는 이 낯선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호기심으로 문 앞과 창턱에서 끊임없이 주변을 감시한다. 혹시 이곳이 미래의 감옥은 아닐지, 혹은 이 세상에는 나와 다른 생김새를 가진 종족이 살고 있지는 않는지, 나는 끊임없는 이 말도 안 되는 생각의 끝머리를 집착에 가깝게 잡고는 놓으려하지 않는다. 나는 이렇게 나의 모든 기억을 부정하며 거의 모든 기억을 내면 깊숙이 봉인하려고 노력한다”

탈북자 대학생 김철원씨(가명)는 (사)북한민주화네트워크에서 발간한 'NK Vision 9호'의 국내입국 탈북고아 수기 ‘북한의 죽음의 냄새와 중국의 절망, 모든 것을 잊고 싶다’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

김씨는 이 책자에서 함경남도 함흥시 어느 조용한 마을에서 태어난 자신을 간략히 소개한 뒤 “질병과 기아는 거침없이 많은 사람들을 죽음의 길로 인도하고 또 산지사방으로 흩어 놓았다. 그것이 1996년의 봄, 나와 우리 가족 그리고 북한의 대다수 주민과 그들 가정의 불행의 시작이었다”면서 죽음보다 견디기 힘든 배고픔에 중국행을 결심한 자신의 경험을 담담하게 털어놓았다.

북한 탈출 과정에서는 “2001년 2월 23일 두만강을 건넜다. 어둡고 캄캄한 새벽 2시 폐를 얼릴 것 같은 공기와 감각을 마비시키는 차가운 두만강 물을 건너서 중국 땅에 도착했다”면서 “수없이 뒤돌아본 북한은 캄캄한 어둠 속에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 침묵했고, 앞쪽에 웅크린 거대한 중국산들은 내가 자신들의 영역을 침범한 것이 못마땅한 듯, 혹은 비웃는 듯 거만하게 내려다보았다”고 묘사했다.

그리고 중국땅을 밟기까지의 고통에 대해선 “14억 인구 중에 나 하나 설 곳이 없겠냐는 생각에 나는 얼어붙은 몸을 입김으로 녹이며 무엇에 쫓기는 듯 더 멀리 더 높은 곳으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연신 부르짖으며 달음박질 했다”며 “한밤중 캄캄한 산중에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무엇이 있는지도 모른 상황에서 나는 저 멀리 반짝이는 작은 불빛을 보고 힘겹게 걸었다”고 표현했다.

김씨는 또 탈북자의 초췌한 몰골을 받아준 후한 인심의 중국 주민과의 짧은 인연을 소개하며 3일만에 도착한 연길에서의 고단한 삶을 생생하게 그려나갔다. "나에게 있어서 하루는 너무나도 길고 긴 고역이었고 고난이었다. 오늘은 어디서 자야 하는지, 또 어디서 먹을 것을 구해야 하는지, 중국 공안에 잡히지는 않을지, 말도 모르고 문화에도 익숙하지 않는 나에게 중국생활은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하루는 비럭질을 해서 연명했고, 하루는 남들이 버린 쓰레기 더미에서 하나의 희망을 찾아 연맹했고, 또 하루는 도둑질을 해서 연맹했다. 많은 날들을 굶주림으로 하늘의 별을 빵 삼아, 차가운 공기를 국 삼아 부질없는 내일의 소박한 꿈을 반찬 삼아 하루를 보냈다"

거리에서 노숙을 하던 중 우연히 만난 중년 남자와의 인연이 악연으로 이어진 고달픈 인생사에서 김씨는 “‘왕’씨는 매해 봄이면 북한사람들을 일꾼으로 쓰고 겨울이 되어 할 일이 없어지면 그런 수법으로 공안에 신고해 붙잡히게 했다"며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머리가 차갑게 식혀지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뒤따르니 ‘왕’씨가 화장실에 간다고 간 것과 거리 한가운데서 공안이 나만 검문을 한 것 등 이상한 점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또 "점점 내가 잡힌 것이 ‘왕’씨가 공안에 신고한 것 때문이라는 생각이 굳어지면서 나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배반감, 그리고 수치심에 치를 떨어야 했다"면서 "일이 많은 봄철부터 가을철까지 기껏 열심히 부려먹고는 돈 몇 푼이 아까워 겨울철이 되면 사람을 팔아넘기다니, 그런 분노감에 삶을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은 이성의 저편 너머로 사라지고 어떻게 하든 탈출해야 한다는 생각이 마음속을 지배했다”고 덧붙였다.

북송 후의 힘겨운 나날을 그린 회고 장면에서는 “나는 차가운 족쇄를 차고 북한 온성보위부로 북송되었다. 차가운 눈초리와 입에 담기 힘든 험한 말들을 듣고, 견디기 힘든 매를 맞아가며 나는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지옥 같은 보위부 감옥에서 7일을 보냈다. 다행히 나이가 어려 집결소 보다 조금 낳은 구호소로 보내졌다. 나는 여전히 복수를 포기하지 않았고 탈출할 기회를 엿보며 하늘의 신들에게 기회를 달라고 기도했다”면서 “북한에서는 밥을 하건 물을 끓이건 모든 것을 나무나 연탄으로 해결한다. 하지만 연탄은 조금 비싸서 산이 가까운 곳에서는 나무로 해결한다. 이런 현실로 인하여 구호소에서도 나무를 하러 산에 올랐던 것이다. 나는 배 아픈 척 하면서 화장실에 간다며 바로 달아났다. 그렇게 나는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멀리, 될 수 있으면 멀리 달아나려고 모든 힘을 쏟아 부었다. 그렇게 탈출에 성공했고 나는 그날 저녁 두만강을 다시 건넜다. 이것이 나의 두 번째 중국행이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연길 감옥에서 만난 사람으로 인해 취직된 연길시멘트 공장 생활과 신분증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그곳을 떠나야 했던 일, 또다시 찾아온 노숙생활, 폐렴 때문에 죽음의 문턱에 이르렀다 마을 주민의 도움으로 건강을 회복한 일, 생명을 살려준 주민을 통해 한국행을 결심하게 됐으나 기차 안에서의 신분증 검열 때문에 수포로 돌아간 일, 세 번째 북송과 탈북 그리고 중국행에 이은 한국 입국 등의 사연을 차례대로 풀어놓았다.

김씨는 끝으로 “나는 다른 탈북자들보다 유난히 짧고 별로 굴곡도 없는 중국 생활을 경험 했지만, 그 짧은 경험도 이 백지 위에 옮기기가 슬프기 그지없다”며 “나는 잊고 싶다. 아니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싶다. 북한의 죽음의 냄새와 비릿한 배고픔, 그리고 중국의 고난과 두려움 그리고 절망을. 나는 원래부터 고아였고, 이제까지의 기억은 나의 길고 긴 꿈이었을 뿐이고 현실이 아니었다고 말이다”는 말로 수기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