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환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
남한 내 주사파 대부 김영환이 본 황장엽

한반도에는 주체사상에 관한 한 ‘대부’(代父)의 지위를 인정받은 두 사람이 있다. 북쪽의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와 남쪽의 김영환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이다.

파란만장한 삶으로 분단 시대 비극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은 북쪽의 대부는 공교롭게도 자신이 기틀을 닦은 주체사상을 바탕으로 세워진 북한 노동당 창건일(10일)에 ‘불귀의 객’이 됐다. 남쪽의 젊은 대부는 북쪽에서 내려와 외로운 길을 떠난 고령의 대부를 “아쉽고, 허전하고, 답답한 심정으로” 보냈다.

황장엽 전 비서가 운명을 달리한 이틀 후인 지난 12일 국가인권위원회 배움터에서 김영환 연구위원을 만났다. “황 선생님의 빈소에 계속 있다 왔다”는 그의 모습에서 ‘사상적 부모’를 잃은 사람의 쓸쓸함이 느껴졌다. 카리스마적 ‘대부’를 상실한 주체사상의 현재적·미래적 의미는 무엇일까. 그에게 황 전 비서의 사상과 철학, 주체사상의 비전과 전망 등에 대해 들어봤다.

인터뷰= 하만주 정치부장

-황 전 비서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어떤 기분이었나요.

△충격이 심했죠. 하고 싶은 일들이 여전히 많으셨는데 갑자기 이렇게 되셔서… 크게는 연구활동과 실천활동에 대해 같이 고민하고 토론했습니다. 북한 민주화 운동과 관련해서도 여러 측면에서 도움과 조언을 많이 주셨고요. 북한민주화 운동을 펼치면서 황 선생님 이름을 앞에 내걸기도 했습니다.

-주체사상에 대한 얘기를 해보죠. 북한이 말하는 ‘주체’란 무엇입니까.

△북한에서 얘기하는 주체사상이란 스탈린식 공산주의에 김일성의 민족공산주의가 결합한 것입니다. 여기에 황 선생님의 주체철학까지 적당히 섞어서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황 전 비서의 주체철학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황 선생님의 철학은 한마디로 ‘인간중심 철학’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주체철학과 마찬가지죠. 망명 이후에도 기본 골격은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계급주의적 요소, 프로레타리아 독재, 역사발전론 등 일부에 수정을 가했죠. 저 개인적으로는 ‘인간중심 철학’이라는 용어에 반대했습니다. 새로운 용어를 만든 이후 사람들이 개념을 인지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잖아요.

남한 사회에서 ‘주체’라는 용어 자체가 가지는 부정적 요소가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 용어를 쓰면서 돌파해 나가는 게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주체’에 대한 지적 소유권 자체가 황 선생님에게 있기도 했고요. 다만 당장 남한 내 다양한 우파 인사와 손잡고 일하는데 주체 용어가 방해가 될 수도 있고 해서 용어 사용을 뒤로 미뤘던 겁니다.
-주체와 인간의 관계는 무엇입니까.

△주체의 핵심이 인간입니다. 이렇게 보면 인간중심 철학이라는 말이 맞는 것이죠.

-“역사를 이끌어가는 것은 ‘정신’(Geist)”이라고 했던 헤겔적 개념처럼 정신을 실체로 보는 형태로 해석해도 되는 건가요. 북한은 주체를 ‘무오류의 사상’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마치 ‘헤겔 우파’들이 헤겔 사상을 신학적으로 해석한 것처럼요. 헤겔적 관점에서 보면 황 전 비서의 ‘주체’가 일상적 주체가 아닌 실체적 주체로 보여지는군요.

△그것은 아닙니다. 황 선생님은 헤겔의 관념론적 입장에 대해 비판적이었습니다. 사실 수백 년에서 길게는 몇 천년 된 논쟁이지만, ‘유물-관념론’ 논쟁처럼 객관적인 것과 주관적인 것 중 어느 것을 더 중요시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에서 황 선생님의 주체철학은 맑스주의처럼 객관적 조건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대신 사람의 의지나 열정, 적극성, 리더십, 단결력 같은 주관적 요소를 역사발전에서 중요한 요소로 봤습니다. 예를 들면 박정희 시대 한국사회가 빠른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도 대미관계나 국제정세 등과 같은 객관적 조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주관적 요소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이죠. 이런 시각에서 주체의 주관적 요소를 강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가 선진화될수록 ‘개천에서 용 나기’가 어려워지고 있는데요. 계층 이동이 어려운 고착화된 사회 구조 속에서 개인의 정신적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으로 봐도 되는 겁니까.

△황 선생님의 주체철학은 개인뿐 아니라 개인과 집단을 동시에 강조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개인의 의지와 노력, 열정뿐 아니라 북한의 남침의지, 군사력 강화 등에 대한 국가차원의 단결을 강조했던 것이죠. 황 선생님은 주로 국가단위의 집단을 중시했습니다. 공산주의는 집단주의만 강조하는 것이 문제죠.

반면 우리는 지나치게 개인만 강조하는 측면이 있잖아요? 집단과 개인 모두를 중요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까 박정희 시대를 예로 들었습니다만 당시 비민주적 요소가 있었던 점은 차치하더라도 그 정도 수준으로 개인주의와 집단주의가 적절히 균형을 잡아야 한다는 취지인 셈입니다.

또 현재의 사회체제에서 계층구조가 고착화됐다고 하지만 집단 차원에서 강력한 리더십과 단결력이 숨쉴 수 있는 공간, 그리고 개인의 측면에서 스스로의 노력을 발휘할 수 있는 요소 정도는 포함돼 있다고 봅니다.

-황 전 비서가 꿈꾸는 국가는 실제로 권위주의적일 수도 있겠네요.

△권위라고 할 때는, 뭐랄까, 일반 국민들은 사상적 의식이 없는데 국가가 강력한 권위를 가지고 이끌어간다는 의미라고 할 수 있죠. 황 선생님은 국민들의 높은 지식 수준과 정치 참여 의지를 전제로 높은 차원의 단결을 구상했습니다.

-‘남쪽 주체사상의 대부’로서, 황 전 비서를 처음 만났을 때 느낌은 어땠나요.

△1999년에 황 선생님을 처음 만났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 북한식 공산주의에 대한 비판적 의식을 가지고 주체철학을 개선해야겠다는 마음으로 구체적 내용에 대한 정리를 시작했었죠.

놀랍게도 황 선생님이 망명 이후 북쪽에서 몰래 작성했던 비판적 글들이 제가 연구한 내용과 대부분 일치했습니다. 당시 국정원 조사실에서 만났던 터라 많은 얘기는 하지 못했습니다.

-비판의 핵심은 뭡니까.

△맑스주의의 계급투쟁, 계급노선,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유제 중심 발전 등을 비판한 것이죠. 그 부분이 제 생각과 일치했습니다. 황 선생님은 그러면서 동시에 주체철학의 중심적 테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부분에 대한 반감은 없었고요.

-두 분이 철학적 고민을 가장 크게 했던 부분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죠.

△개인주의와 집단주의의 관계 설정이 하나였습니다. 두 개가 이상적 균형을 잡는 사회라는 게 현실적으로 가능할 것인가에 대한 부분이었죠. 또 하나는 인간의 주체라고 할 때, 주체를 어디까지 한정 짓고 그것을 어떻게 최대한 적극적으로 개발하고 고양하는가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황 선생님은 헤겔 철학 연구를 많이 하셨는데 90년대에는 헤겔 철학의 구체적 내용에 대한 비판적 얘기도 많이 하셨죠.

-북한이 시도한 ‘주체사상의 수령사상으로의 전환’은 어떻게 된 겁니까.

△논리적 억지에 불과합니다. 인민이 주체로서 역할을 정확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고도로 조직된 집단이 있어야 하고 그 집단은 지혜롭고 강력한 리더십을 가진 지도자에 의해서만 운영될 수 있다는 것이죠.

결국 인간이 주체로서의 역할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는 집단과 뛰어난 리더(수령)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건데, 역사적 과정을 볼 때 ‘뛰어난 지도자’란 결과적 이야기일 수는 있지만 정치적 과정에서 결정되기는 어렵다는 점에서 억지 논리에 불과한 겁니다. 또 실제 인민들이 훌륭한 역할을 수행하기보다 독재자에 의해 자율성이 침해된 사례가 훨씬 많았고요. 주체철학과 수령론을 어떻게 해서든지 결합시키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근데 그 ‘억지사상’을 대학에 전파하셨었죠.

△그랬죠. 북한식 주체 뿐 아니라 맑스레닌주의에 깊이 물들어 있었으니까요. 북한식 공산주의 세력과 손을 잡아야겠다는 생각도 있었고요. 철학 이전에 북한 지도 세력이 한국 사회에서 정통성이 있다는 믿음도 가졌었습니다.


-김일성 주석은 한 번 만난 겁니까.

△1991년에 이틀간에 걸쳐서 만났습니다. 주체사상 얘기도 했었죠. 주체사상이 주체철학을 핵심으로 하는 것인 만큼 관련 논의가 이뤄질 것으로 기대했는데 실제로 김 주석은 관심이 없더군요. 뿐만 아니라 논의 과정에서 주체철학에 관한 기본적 지식이 없는 것으로 느껴졌습니다.

제가 주체철학에 관한 얘기를 꺼내도 계속 민족 공산주의 얘기만 하더라고요. 나중에 황 선생님 만나서 얘기해봐도 “김일성은 철학서적 읽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당시 경험이 후에 생각을 바꾸는데 전환점이 됐나요.

△그게 상당히 중요한 기초가 됐다고 생각합니다.

-김정은 체제로 넘어오면서 북한에서 주체보다 ‘선군’(先軍)사상이 두드러지는 것 같습니다.

△70년대 후계체제 구축시 김정일이 주체사상에 대해 가장 열렬한 지지자인 것처럼 적극적으로 활용을 했지만 이후 80년대 후반 내지 90년대 들어오면서 이용가치가 떨어져 관심 밖으로 밀려났죠.

특히 1997년 황 선생님이 넘어오고 난 후에 제자들이 숙청되고 뿔뿔이 흩어지고 그러면서 실제로 북한에서 주체사상을 연구할 만한 사람은 거의 없어진 것으로 보입니다. 더군다나 주체에 대한 김정은의 관심이 있어 보이지 않습니다. 거의 형식적으로만 인용되고 북한 내 지위는 상실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앞으로 북한민주화 운동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민주화 자체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을 수 있지만, ‘3대세습’과 관련해서는 다양한 사람들이 반대하거나 비판적인 의견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북한 내에서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거부감이나 비판적 생각을 갖고 있지 않을까 추측합니다.

최근 3대세습을 반대한 김정남 발언도 우발적인지는 알 수 없지만, 향후 몇 년간 북한민주화 운동이나 관련 운동의 핵심적 주제이자 슬로건은 ‘3대세습반대’가 될 것 같습니다.

◇김영환, 그리고 주체사상

김영환 북한민주화네트워크 연구위원은 ‘자생적 공산주의의 원조’, ‘남한 내 10만 주사파(주체사상파)의 대부’로 불린다. 1980년대 중반부터 세력을 떨친 우리나라 운동권 학생들의 일파인 주사파는 광주사태 후 대학가에서 자생적 공산주의자들이 형성되고 이후 북한과 사회주의혁명이론에 대한 교류가 이뤄지면서 태동했다.

김 연구위원은 서울대 재학 당시 ‘강철서신’으로 알려진 문건과 서적을 통해 주체사상과 민족해방(NL) 노선을 학생운동의 주류로 성장시켰다. 1991년에는 잠수정을 타고 밀입북해 김일성을 만났다. 아이러니하게도 김일성과의 만남은 그로 하여금 북한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는 계기로 작용했다. 그의 ‘혁명의지’를 꺾은 것은 공안당국의 고문이 아니라 ‘북한의 현실’ 자체였다. 나중에 그는 “세상에서 주체사상을 연구할 자유가 없는 곳은 바로 북한이란 사실을 분명히 알았다”고 했다.

전향한 후에도 여전히 혁명을 꿈꾸지만 그 대상은 ‘남한 공산화’에서 ‘북한 민주화’로 바뀌었다. 그가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는 계간 ‘시대정신’ 팀은 황장엽 전 북한 노동당 비서가 가장 아끼던 모임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김 위원을 포함한 한기홍 북한민주화네트워크 대표, 홍진표 시대정신 이사 등은 황 전 비서의 제자를 넘어 동지적 관계를 유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