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mark: 언제까지 우리는 홀로코스트에 침묵할 것인가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나찌에 의해 600만 명의 유태인이 학살된 ‘홀로코스트Holocaust'. 홀로코스트는 인간의 배타성, 폭력성, 잔인성, 광기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남김없이 보여준 20세기 인류 최대의 치욕이다. 그때로부터 인류의 두 세대가 교체되었고, 세기가 바뀌었고, 새로운 밀레니엄이 열렸지만 홀로코스트는 인류의 양심과 지성에 지울 수 없는 화인(火印)이 되었다. 홀로코스트에 대해 가해자라 할 수 있는 독일에서 2000년 들어서 거대한 기념물 공사가 시작되었다. 독일 연방의회는 대학살에 대한 반성으로 ‘홀로코스트-만말(Holocaust-Manmahl)’이라는 경고 기념물을 세우기로 작년 6월에 결정했다. 이 결정은 11년 동안의 논쟁 끝에 비로소 내려진 것이다. 독일 연방의회 부의장인 안티에 폴머는 나찌 독일을 ‘범죄자와 협조자, 그리고 방조자’의 나라라고 표현했다. 홀로코스트를 나찌의 책임, 히틀러의 책임으로만 돌리지 않고 나찌 체제에 순응한 사람들을 협력자로, 나찌 하의 독일 국민들을 방조자로 규정한 것이다. 과거의 일이라 할지라도 이렇게까지 자신의 국가와 국민을 비판하고 독일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에 대해 마음이 편치 않아 하는 독일 국민들도 많았던 것 같다. 여기에 대해 보수성향인 기민련 소속 로베르트 람머트는 이렇게 말했다. “만말은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것을 어디에다 쓰겠는가?" 만말이 처음 설계될 때에는 2800여 개의 돌기둥을 가진 거대한 조형물이었는데 유태인 학살에 관한 모든 정보를 제공하는 ‘종합정보관’이 추가되었다. ‘만말’이 그저 상징적인 조형물만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부족하다는 지적을 의회가 받아들임으로써 추가하게 된 것이다.

지난 해 이스라엘에서도 대학살로 죽어간 600만 명을 추모하는 홀로코스트 기념일을 앞두고 상징적인 사건이 있었다. 알바니아계 난민 2000명이 수용되어 있는 마케도니아 스코피에서 코소보 난민 106명을 태우고 이스라엘 정부가 파견한 전세기가 돌아왔던 것이다. 당초에 이스라엘의 여론은 코소보 난민을 도와야 한다는 측과 코소보 난민이 이슬람계라는 것을 들어 반대하는 측으로 나뉘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스라엘 정부는 난민을 앞장서서 수송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을 흘렸다. 결국 난민 지원을 지지하는 편에서는 수천명이 시위를 벌였고 한 대중가수는 난민을 위한 콘서트를 열기도 하였다. 상황이 이렇게 반전되자 정부는 전세기를 보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미국의 홀로코스트 유족회에서도 추모 촛불 행사 중에 난민 수송 결정을 지지했다. 이스라엘 국민은 인종청소라는 반인륜적인 범죄 앞에서 종교적 반목과 갈등은 뒤로 미루고 인도적인 지원을 결정했던 것이다.

인종, 민족, 국가주권을 초월하는 인권 러시

가해자 격인 독일도 아니고 피해자 격인 이스라엘도 아닌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새로운 세기의 첫 달 26∼28일까지 ‘홀로코스트 국제포럼’이 열렸다. 이 행사는 스웨덴 정부가 주최한 것이다. 이 국제포럼에는 주최국의 페르손 총리, 독일의 슈뢰더 총리, 이스라엘의 바라크 총리, 프랑스의 조스팽 총리 등 46개 국의 고위 관리와 역사학자, 지식인, 언론인 등 650여 명이 참석하여 3일 동안 진행되었다. 스웨덴 정부가 이 행사를 기획하게 된 것은 12∼18살에 이르는 청소년 중에서 3분의 1가량이 홀로코스트의 의미를 모른다는 것에 충격을 받고서였다.

유태인들은 홀로코스트에 대해서 함축적으로 말한다. “용서하자. 그러나 잊지는 말자(Forgive, but not forget)" 그런데 스웨덴 청소년들이 잊어버렸다는 것이다. 이 망각에 대해 스웨덴 정부는 참을 수가 없었다. 스웨덴의 페르손 총리는 홀로코스트를 역사적 우연이 아니라 다수의 침묵 속에 자행된 고의적 사건이라고 지적했다. 다수의 침묵이 홀로코스트를 가능하게 한다고 인식하는 것이다. 독일의 연방의회 부의장이 홀로코스트를 나찌의 책임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침묵하는 다수’를 방조자로 보는 것과 같은 인식이다. 독일과 이스라엘, 스웨덴 사람들의 행동은 국제 공동체가 도달한 인권 의식을 보여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반인류적인 범죄를 어떻게 막아야 하는가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 국제포럼을 하루 앞두고 프랑스 하원 회의실에서 프랑스 지식인들은 ‘북한에 대한 침묵을 깨자’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성명은 피에르 리굴로 사회사평론 편집장, 앙드레 글뤽스만, 알랭 브장송 등 지식인 14명과 국제인권협회의 회원들, 파리 시민 등 100여명이 참가해서 토론회를 갖고 발표한 것이다.

북한을 두고 아우슈비츠 희생자 추모할 수 없다

이 성명은 “북한에는 죽음이 지배하는 강제수용소가 10여 군데 있다”고 말하고 “전체주의 국가의 광기는 수용자들만 덮치는데 그치지 않고 불과 몇 년만에 100만에서 300만명을 굶어죽게 했다”고 하면서 “강제수용소를 통한 북한 정권의 인권탄압과 주민들을 아사시키는 기아 사태는 또 하나의 홀로코스트”라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홀로코스트와 북한의 기아는 범죄가 행해지고 있는 순간에도 각 국가들이 침묵하고 있는 것이 한가지 공통점”이라고 지적하면서 “북한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한 침묵을 깨지 않고서는 오늘날 아우슈비츠 희생자들을 추모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성명은 추모대회에 참여하는 각국의 지도자들에게 보내졌다.

프랑스 지식인들은 북한 상황을 홀로코스트라 한다. 대학살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반인륜적인 범죄가 진행되고 있는 동안 침묵하는 것은 나찌가 유태인을 학살하는 것을 방치하고 있는 것이나 매한가지라고 한다. 지금 당장 북한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학살에 대해서 침묵을 깨지 않고서는 과거 벌어졌던 대학살에 대해서 기념하고 추모할 자격이 없다고 프랑스 지식인들은 주장하는 것이다.

지구 반대편의 프랑스 지식인들이 북한 상황을 홀로코스트로 규정하고 있는 동안 한국 사회의 지식인들은 무엇을 하고 있는가? 80년대 내내 광주는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십자가였다. 신군부가 광주에서 무고한 시민을 학살하고 정권을 찬탈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고서 누가 감히 지식인이라 할 수 있었던가. 한국의 지식인 사회는 북한의 상황에 대해 침묵하고 있다. 문제의 심각성은 무관심과 침묵의 성격이다. 몰라서 혹은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북한 정권에 대해 의도적으로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이다. 지금과 같은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북한 주민의 10%가 굶어 죽는 동안 모를 수가 없다. 10∼30만 명으로 추산되는 탈북자가 중국과의 국경지대를 헤매고 있고, 탈북자 처리문제로 러시아와 한국, 중국과 한국 정부가 마찰음을 내고 있는데 듣고 싶지 않아도 못 들을 수가 없다.

광주에서 몇 명이 죽었는지가 본질적인 것인 것이었던가

한국의 지식인들이 무관심하기는커녕 냉철한 분별력을 보여주기까지 한다. 북한의 아사자 숫자를 두고 북한 동포를 지원하는 민간단체와 이른바 진보언론 매체 사이에 몇 차례의 논쟁이 있었다. 80년대에 신군부의 광주진압 과정에서 일어난 희생자 숫자를 두고도 진위논쟁이 있었지만 그것이 광주문제의 본질을 논하는 데 중요한 것이었던가. 심지어 어떤 언론기관에서는 북한에 대해 애족심이 발휘된다. 북한의 기아가 혹심해지면서 인육을 먹는 사태가 발생하자 어차피 북한도 한 민족인데 그것을 세계인들이 알게되면 우리 민족이 수치스럽게 된다는 이유로 스스로 보도를 통제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독일인들은 우리보다 신경줄이 무디어서 홀로코스트 기념관을 짓자는 것인가. 20세기를 어떻게 평가하건 간에 인류가 20세기를 통해서 성취한 것이 있다면 민주주의가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인권이 인류의 보편적 권리로 인식된 것이다. 독일인들이 민족 감정을 넘어서 자신의 치부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이나, 이스라엘 사람들이 종교를 넘어서서 이슬람교도와 화해할 수 있는 것도 인류의 보편적 권리인 인권이 무엇보다 앞선다는 인식이 자리잡았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와 인연이 거의 없는 스웨덴 사람들이 홀로코스트 국제포럼을 여는 것도 나찌, 파시스트와 같은 반인륜적인 집단에 대해서는 후대까지 경계해야 마땅하다는 인식 때문이다. 이러한 보도 태도는 자기 기만이며 그것이 초래할 결과는 민족에게 위선이 자라도록 방치하는 것이다.

프랑스 지식인들의 성명이 나고 국내의 한 일간지는 그것에 대해 사설을 실었다. 그 사설은 인권 문제가 국가 주권을 넘는 국제 정치의 현실적 추세를 인식하면서 북한 인권 문제가 프랑스 지식인들이 지적하는 것처럼 국제 사회의 화두로 나설 경우 인권과 국가 주권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것에 긴장감을 느낀다고 쓰고 있다. 따라서 국제 사회가 개입하기 이전에 북한 인권문제 해결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을 수 없는 어려운 과제가 제기되고 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북한인권에 대한 침묵을 깨자

방향이 잡힌 사설이기는 하지만 안타까운 심정이 드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프랑스 지식인들이 나서기 이전에 우리 스스로가 마땅히 나섰어야 했으며 국제 정치의 현실이 냉정하다고 느끼면 느낄수록 한국이 주도권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해야만 했다고 써야 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근본적으로는 문제를 인식하는 방식이 인권이 국가 주권과 충돌하기 때문이 아니라 한국의 인권 의식 수준이, 북한의 인권 문제에 대한 한국 사회의 무관심과 침묵이 그러한 상황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진단해야 올바른 것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이 사설 정도만이라도 한국의 지식인들이 인식한다면 다행스런 일일 것이다. 지식인 중에 최악의 케이스는 다른 사람들이다. 내버려둬야 한다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나찌가 유태인들이 학살을 당하건 말건 나뒀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당시에도 유태인의 고난에 대해 가슴 아파하기는커녕 오히려 그것을 당연시하거나 은근히 즐기는 대중적 심리상태가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방조자, 협조자라고 후대들에게 규탄 당하는 것이다.

이런 감정이 우리 사회에도 없는 것은 아니다. 과거에 북한 정권으로부터 피해를 받은 사람들 중 일부가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지식인 중에서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런 피해의식 때문이 아니고 북한 정권문제는 북한 인민들이 알아서 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찌에 의한 유태인의 학살은 유태인들이 알아서 해결했어만 했다는 것일까? 한국의 지식인들이 의도적으로 침묵하고, 사보타지를 하고, 머뭇거리는 동안 북한의 인권문제는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침묵이 더 이상 미덕일 수가 없다. 머지 않은 장래에 한국의 지식인들은 북한의 주민들에게, 그리고 통일된 세대의 후배들에 의해서, 그리고 북한의 홀로코스트를 기념하는 건축물 앞에서 무관심과 침묵 그리고 직무유기로 고발당할 것이다. 범죄에 대한 방조자로서, 협조자로서.

프랑스 지식인들의 말을 다시 옮긴다.

“북한에 대한 침묵을 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