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mark: 어느 통일운동가의 납북자, 국군포로 문제를 보는 시각
정상회담 이후의 해빙분위기를 타고 8월 15일 이산가족상봉이 있었고 9월 2일에는 비전향 장기수 63명의 송환이 있었다.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이들 63명의 신원은 남파간첩이 49명, 빨치산 출신이 14명이다. 대한민국을 부정하고 파괴하려 했던 이들의 과거 이력으로 인해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들의 북송을 반대하거나 또는 적어도 상호주의 원칙을 적용해 북에 억류되어 있는 국군포로나 납북자들과 교환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들이 과거 대한민국을 파괴하기 위해 실정법을 위반한 것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 때문에 이들을 계속 남쪽에 붙잡아두어야 한다는 논리는 합리적이라고 볼 수 없다. 그들은 장기간의 형기를 치름으로써 이미 가혹하리만큼 처벌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이데올로기 전쟁의 광기 속에서 남과 북이 생존을 건 투쟁을 하는 와중에 수많은 청년들이 우익 또는 좌익의 길을 택해 자신들의 인생을 바쳤다. 이들의 선택에는 수많은 개인적 우연이 작용했을 것이며 또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 분위기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이들의 선택에 대해 개인에게만 책임을 묻는 것은 개개인에게 너무 큰 역사적 짐을 지우는 것이다.

비전향 장기수를 조건 없이 북송하게 된 데는 이제 우리 사회도 이데올로기 문제에 대해 관용을 보일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물론 북한체제의 성격으로 볼 때 북송이 그들 개개인에게 다행한 결과를 가져다줄지 의문의 여지가 없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본인들의 의사에 따라 거주지를 선택할 수 있게 한 것은 옳은 일이라고 생각된다(물론 북송된 사람중 일본인 납치사건에 관련된 테러범죄자의 경우 일본측에 수사기회를 주지 않고 송환한 것은 잘못된 일이지만).

문제는 비전향 장기수를 송환한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북한당국이 납북자와 국군포로들을 돌려보내지 않고 있는 데 있다. 비전향 장기수들이 대한민국을 파괴하려 한 북측의 공작원이거나 빨치산이었음에 반해 납북자와 국군포로들은 북한 측에 별다른 위해를 저지른 적이 없는 평범한 시민이거나 마땅히 송환되어야 할 전쟁포로들이다. 그런데도 비전향 장기수는 송환했는데 당연히 돌려 받아야 할 사람들은 돌려 받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북송에 떨떠름한 표정을 짓게 만드는 것이다.

북한당국의 태도야 충분히 예상했던 일이라고 치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남한 내 일부 지식인들의 태도이다. 통일운동가로 널리 알려진 어느 대학교수가 "납북자와 국군포로가 있다면 납남자와 북파공작원도 있고 따라서 납북자·국군포로는 비전향 장기수가 아니라 각각 납남자·북파공작원과 교환하는 것이 상호주의 원칙에 맞다"고 주장했다 한다. 이 말이 이른바 '납남자'와 '북파공작원'의 인권을 존중해서 그들의 송환을 주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납북자와 국군포로 송환운동을 반대하기 위한 것이라면 문제는 심각하다.

비전향 장기수 송환문제가 인도주의 문제라면 납북자와 국군포로 송환문제도 인도주의 문제이다. 혹시라도 우리가 모르고 있는 '납남자'와 '북파공작원'이 있다면 이 역시 인도주의 문제라 할 것이다. 인도주의 문제에 무슨 상호주의가 필요하단 말인가? 비전향 장기수 북송이 그들의 의사에 따라 이루어진 것이라면 납북자와 국군포로들도 - 그리고 만일 존재한다면 납남자와 북파공작원들도 - 그들의 의사에 따라 원하는 곳으로 보내주도록 요구하는 것이 인도주의를 이해하는 사람의 당연한 태도일 것이다. 그런데도 '납남자'와 '북파공작원'을 구실로 납북자와 국군포로의 송환요구를 비판하는 것은 결코 인도주의적 태도가 될 수 없다.

진정한 인도주의자라면 좌익이든 우익이든 또는 사상 같은 것을 모르는 평범한 시민이든 간에 모든 인간은 동등한 인권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이런 사람이 비전향 장기수의 북송에만 관심을 가지고 납북자와 국군포로의 인권에 무관심하다는 일은 있을 수 없다.

과거 권위주의 시절 남한의 많은 우익인사들이 인권은 우익에게만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좌익이나 그 동조자들에 대한 인권유린을 당연시했었다. 그런데 지금 남한의 일부 좌파지식인들이 그 반대의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 같다. 앞서 말한 그 인사의 발언으로 미루어볼 때 인권은 좌익투사들에게나 있지 평범한 일반국민에게는 없다고 믿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이러한 태도는 인권의 보편성이라는 인도주의의 대원칙과 맞지 않으며, 비전향 장기수와 납북자·국군포로 문제를 인권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정치의 차원에서 보고 있다는 증좌이다. 그것은 과거 우익이 인권보다 정치적 이해관계를 앞세워 좌익의 인권을 부정했던 것과 같은 태도이다. 단지 좌익과 우익이 뒤바뀌었을 뿐....

과거에 비해 우리 사회의 민주화는 매우 높이 진척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제도적 차원뿐인 것 같다. 앞의 대학교수의 말을 통해서 우리 사회 일부 지식인들의 의식은 여전히 인권후진국의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이 같은 사고의 바탕에 "통일과 같은 민족적 대의를 위해서는 납북자나 국군포로쯤은 희생시킬 수 있다"는 생각이 깔려있다면 이는 매우 불행한 일이다. 집단적 명분을 위해 개개인의 인권을 희생시킬 수 있다는 전체주의적 사고의 전형이기 때문이다. 우리 지식인들 사이에 이런 후진적 사고가 남아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