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이나 영화라는 것이 한 사람을 위해 맞춤식으로는 제작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김정일 개인에게는 별 다섯 개 짜리 이상의 좋은 드라마가 만들어졌다는 생각으로 이 프로그램을 정중히 권해보고 싶다. 그것은 KBS에서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대하 역사극 ‘태조 왕건’이다. 『Keys』가 김정일씨에게 태조 왕건을 권하는 이유는 드라마 속에 등장하는 궁예와 김정일씨가 많은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미륵부처로 신격화하고, 권력유지를 위해 신하들의 귀와 입을 막고, 민중을 위한 미륵세상을 만든다는 명목으로 오히려 민중을 탄압하고 억압하는 정치를 일삼는 궁예의 통치 스타일은 지금의 김정일씨를 보는 것 같다. 부인과 두 딸까지 죽이면서 정신불안에 휩싸이고, 관심법(觀心法)으로 자신의 무오류성을 강조하는 대인불안 증세를 보이다가, 결국은 민심을 잃고 권좌에서 쫓겨나 자신을 따르던 백성에게 맞아죽는 궁예의 최후는 김정일씨의 미래를 보는 것 같기 때문이다.

허나 김정일씨에게 드라마 ‘태조 왕건’을 권하면서 한편으론 걱정이 앞선다. 이 드라마를 권하는 우리의 생각과는 다르게 김정일씨가 왕건의 모습 속에 자신을 투영하는 실수를 범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다. 워낙 자아도취가 심하신 분이다 보니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만약 김정일씨가 자신을 덕장(德將) 왕건으로 착각한다면 이것은 어리석은 독재자가 저지른 또 한편의 코미디가 될 것이다.

김정일 vs 궁예 ▷ 1라운드 : 출생배경

자, 그럼 이제 드라마 속으로 들어가 보자. 드라마에서 궁예의 인생 서사시는 세 부분으로 나뉘어질 수 있다. 초기는 세달사에 투탁(投託)하여 원주의 양길에게 몸을 맡기기 전까지, 중기는 양길 휘하에서 실력을 쌓고 마진국을 열 때까지, 말기는 마진국 이후 왕건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비운의 최후를 맞이할 때까지이다. 지금 드라마는 이 시기 중 세 번째인 막바지로 치닫고 있는 중이다.

최근의 줄거리를 잠깐 소개하자면, 궁예는 스스로를 미륵불로 칭하여 신권(神權)에 준하는 권위로 나라를 통치하고 관심법이라는 실제 미륵의 능력을 빌려오기에 이른다. 부인 강씨와 두 아들을 죽인 후부터는 의심이 많고 화를 잘 냈으며, 여러 보좌관과 장수, 관리는 물론이고 아래로 평민에 이르기까지 많은 자를 죄 없이 죽여, 부양 철원일대 사람들이 그 학정에 견디지 못하게 된다.

이렇게 한편을 감상하고 눈을 돌려 북한을 보면 혹여 드라마 재방송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이다. 초법적인 수령의 지위로 북한을 통치하고 기아와 폭압이 일상화된 현실에서도 자신의 행적 하나하나를 사회주의 조국 재건의 화신으로 칭송할 것을 강요하는 김정일씨. 수령에게는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무오류성을 통해 인민의 눈과 입을 틀어막는 것은 실로 궁예를 능가하는 김정일식 관심법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먼저 김정일씨와 궁예의 출생배경을 비교해보자. 궁예는 신라 제 47대 헌안왕 또는 제 48대 경문왕의 아들이라 전한다. 궁예가 태어날 당시 신라의 왕실은 왕권을 놓고 치열한 다툼을 벌였고, 전국에서 민란과 반란이 끊이질 않았다. 궁예는 왕위 다툼에서 밀려나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을 피해 유모의 손에서 자라다 세달사에 들어가 승려가 되었다. 지배혈통을 타고났다는 점은 같지만, 김정일씨의 성장과정은 궁예의 그것과 다르다. 궁예는 출생과 동시에 목숨의 위협을 느끼며 쫓기게 되고 절을 전전하는 불우한 성장기를 보냈던 반면, 모두가 알다시피 김정일씨는 유일 권력자인 김일성의 자식으로 권력투쟁의 풍파를 겪지 않으면서 유복하게 성장하였다. 이러한 성장과정의 차이를 사상의 차이로 연결해 보면,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다.

김정일 - 기존의 유일지배체제를 더욱 강화하기 위한 사회주의 붉은기 사상
궁 예 - 전반적인 사회개혁을 시도한 사민평등의 미륵사상

하지만 종국에는 혁명사상이 한 개인의 신권화에 기여하기 위한 것으로 변질될 때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는 시기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역사는 권력의 말로를 냉정하게 기록할 것이다.

김정일 vs 궁예 ▷ 2라운드 : 정치적 성장과정

다음은 김정일씨와 궁예의 정치적 성장과정을 살펴보자. 궁예는 야망을 펼치기 위해 절에서 나와 891년 기훤의 부하가 되었다가 이듬해 양길의 부하가 되었다. 궁예는 여러 싸움터에서 용맹을 떨쳐 늘 많은 무리가 따랐다. 이에 자신감을 얻은 궁예는 894년 명주(강릉)와 철원을 빼앗은 후 양길과 손을 끊고 독립하였다. 그리고 스스로를 장군이라 칭하고, 이듬해 강원도 일대에서 세력을 넓혀 나갔다. 궁예는 젊고 유능한 왕건을 발탁하여 송악(개성)의 태수로 임명하고, 왕건과 더불어 신라의 평안도 한산주에 있는 30여 개의 성을 쳐서 빼앗았다. 또 왕건을 보내어 양길의 군사를 쳐부수고, 이듬해 국원(충주), 청주(온양)을 손에 넣었다. 901년 궁예는 송악을 서울로 정하고, 나라를 세웠는데 고구려의 부흥을 내세워 나라 이름을 ‘후고구려’라 칭하였다. 또 왕건에게 금성(나주)을 치게 하여 후백제를 세운 견훤을 견제하였다. 세력이 커지자 궁예는 904년 나라 이름을 '마진', 연호를 ‘무태’라 고치고, 이듬해 서울을 철원으로 옮겼다. 911년 궁예는 다시 나라 이름을 ‘태봉’으로 고치고, 연호를 ‘수덕만세’라 하였다.

이제 김정일씨 차례. 김정일씨는 1973년 2월부터 착수된 '3대 혁명소조운동'의 책임을 맡은 데 이어, 같은 해 9월 당중앙위원회 비서로 선출되었으며, 1974년 2월 당 정치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면서 김일성의 유일한 후계자로 추대되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후 1997년 10월, 김일성 사망 후 3년이 지나 김정일씨는 노동당 총비서에 공식 추대됐다.

여기까지 보면 김정일은 궁예에게 엎드려 큰절을 해야한다. 한 개인을 초월적 존재로 극상시켜 신적인 권력으로 백성을 통치하는 두 인물이지만, 권력을 장악하기까지 온갖 시련과 난관을 극복한 궁예의 서사시가 더 혁명적인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아버지의 후광 속에서 엄청난 특혜와 특별교육을 통해 최고의 엘리트 과정을 밟으며 육성되었던 김정일이 혹시나 자격지심을 가지고 여기서 드라마 시청을 종료하지는 않을까? 궁예는 출생과 동시에 왕실에서 버림받았고 세달사에서도 노동이나 하는 신분이었기에, 어떠한 지지기반도 없이 난세의 영웅으로 된 것은 온전히 궁예 자신의 자질과 능력에 기인한 것이다. 이걸 참고한다면 김정일씨는 자신의 권력 접수과정을 좀 더 극적으로 표현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만약 아버지의 전통을 이어 자신도 나중에 회고록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었다면, 후반부의 어마어마한 교훈을 위해 드라마를 끝까지 지켜보는 인내를 발휘해주길 바란다.

김정일 vs 궁예 ▷ 3라운드 : 최후

후삼국 중 가장 강력한 국가의 왕이 되고도 궁예의 꿈은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궁예는 권력을 소유한 왕만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스스로를 미륵불이라 자칭하여 머리에 금책을 쓰고 몸에 방포를 입었으며 큰아들을 ‘청광보살’, 둘째 아들은 ‘신광보살’이라고 했다. 밖에 나갈 때면 흰말을 타는데 비단으로 갈기와 꼬리를 장식하고 소년 소녀들로 하여금 양산과 향, 꽃을 받들고 앞에서 인도하게 했다. 또 비구 2백여 명에게 명하여 범패를 부르면서 뒤따르게 했다. 드라마에서 궁예 역의 김영철이 쓴 황금 안대와 흰말은 궁예의 사치가 어디까지 이르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미륵세상을 건설한다는 미명하에 세금을 더 걷어들이고 궁궐을 건설하는데 국세를 탕진하는 등 가혹한 수탈을 일삼자 민심은 이미 궁예에게서 떠난 상태가 된다. 민심이 등을 돌리고 포악한 정치가 극에 이르자 궁예는 자신이 가장 아끼던 부하 왕건의 도전을 받고 그 권력투쟁에서 패해 쫓기게 된다. 결국 궁예는 보리이삭을 훔쳐먹다 백성들에게 잡혀서 허리에 괭이를 맞고 심장에 낫이 찍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그의 시신 위에 남은 것은 백성들이 뱉은 침뿐이었다.

민심을 역행하고 폭압과 수탈을 일삼은 지배자의 최후를 우리는 천 년 전의 역사를 재현한 드라마에서 보았다. 자, 이제 또 김정일씨의 차례. 궁예의 최후는 역사가 증언하고 있지만, 김정일씨의 최후는 물론 '아무도' 모른다. 김정일씨의 최후를 그릴 역사가(歷史家)는 김정일 자신일 수 있고 북한 민중일 수 있다.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궁예의 최후가 보여주는 역사의 경고를 기억하라는 정중한 제안을 김정일씨가 받아들여줬으면 좋겠는데... 너무 무리한 부탁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