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 해충을 막는 모기장을 쳐놓고 칩거의 생활을 하던 김정일씨가 남북정상회담의 햇살을 맞은 다음 청운의 뜻을 품고 찾아간 곳은 샹하이. 예고도 없이 중국을 찾아가 푸둥지구의 첨단 사업기지와 금융상업시설을 방문하고 난 김정일 씨의 평가는 "상상을 초월하는 변모, 천지개벽을 보았다"라는 감탄사였다. 시골 간이역 앞의 허름한 여인숙에 불과했던 샹하이 여관이 단 20년 만에 휘황찬란한 시설에 서비스까지 소문난 특급 러브호텔로 변모하였으니, 촌로(村老) 김정일씨, 어찌 놀라지 않았을쏘냐.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리며 김정일씨는 예의 버릇대로 "야, 니네들은 이런거 연구 않고 그 동안 뭘했어"라며 따라온 당간부들을 질책했다. 잘한 것은 전부 자기의 신비스런 영도력 때문이고, 못한 것은 모두가 간부들이 게으르고 '일본새가 혁신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란다. 여기서도 김정일씨는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자신의 이중성을 확인시켜준 것이다. 김정일씨, 땡큐!

우리는 먼저 김정일씨의 신조(新造) 유행어 '천지개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동안 남한 TV도 보고, 러시아 TV도 보고, CNN도 보신다는 양반이 중국 TV를 보지 않았을 리가 없는데, 그렇다면 샹하이의 모습도 분명 TV로 보았을 테고 중국을 방문하기 전에 비서들이 샹하이 사진 정도는 미리 보여주었을 텐데 왜 그는 '천지개벽'이란 최고의 찬사를 보냈을까. 그리고 만약 북한에서 김정일씨가 아닌 다른 사람이 중국의 변화된 상황을 두고 '천지개벽'이란 표현을 썼다면 과연 그 발언자의 목이 살아남아 있었을까.

평양방송을 통해 자신의 중국방송 소식을 주민들에게 생생하게 전했으니, 아마도 김정일씨는 중국식 개혁개방으로 북조선의 방향타를 돌리려고 맘먹은 것이 확실한 것 같다. 그래도 그렇지 일국의 지도자라는 분이 외국 도시에 가서 '천지개벽'의 찬사를 보낸 것은 썩 이해가 되지 않는다. 경제는 살리면서 공산당 독재를 유지하고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을 너무도 흠모한 나머지 약간 오버한 표현인 것 같지만, 아무튼 개혁개방의 길로 들어서겠다는 강한 뜻을 내비쳤으니 너무나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김정일씨, 이것만은 생각해보시라. 몇 백만이 굶어 죽어도 자력갱생이란 허울좋은 구호로 '니 알아서 살아라'는 식으로 방치하더니 이제 와서 무슨 낯짝이 있어 '천지개벽'을 읊어대며 그 동안 굶주렸던 북한 인민들의 마음을 씁쓸하게 하시는가. 밖에서 천지개벽이 일어나는 줄도 모르고 묵묵히 고난의 행군을 강요당하며 굶어 죽어도 하릴없이 참아야만 했던 우리 인민들이 얼마나 혼란스러워 하겠는가. 중국식으로 개벽개방하자는 용기 있는 당원들을 수정주의자, 변절자, 사대주의자로 몰아 무수히 처형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그런 '사대매국노'나 할 말씀을 하시는가. 김정일씨에게는 천지개벽일지 몰라도 인민들에게는 천지난리날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정일씨, 당신이 한 말에 책임을 지시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의 현실이 결국 김정일씨의 한마디로 이랬다저랬다 하는 노리개의 운명밖에 되지 못한다는 것은 이번 기회에 다시 한번 확실해졌다. 그럼 이제 김정일씨의 가슴이 뜨끔해지게, 그 동안 김정일씨가 했던 말들을 되새겨 보자.

"제국주의자들의 이러한 압력과 회유 앞에서 일부 사람들은 양보를 거듭하던 나머지 사회주의적 원칙을 포기하고 자본주의적 방법을 받아들이라는 요구까지 받아 물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부르짖는 《새로운 사고방식》이란 제국주의자들을 미화분식하고 그들 앞에서 사상적으로 무장해제하며 제국주의자들의 비위에 맞게 사회주의를 뜯어 고쳐 자본주의를 복구하기 위한 반동적 궤변입니다. …《공개성》과 《개방》을 통하여 끌어들인 부르죠아 자유화 바람은 사회에 각종 범죄가 횡행하게 만들고 썩어 빠진 부르죠아 생활양식과 패륜 패덕이 판을 치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대사회민주주의자들의 《개편》과 《개혁》 정책에 의하여 빚어 진 현실입니다. " - 사회주의의 사상적 기초에 관한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 中,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책임일군들 앞에서 한 연설 中 (1990년 5월 30일)

"일부 나라 당들은 주체성이 없이 대국주의적 압력에 굴복하고 남의 지휘봉에 따라 움직이다보니 큰 나라가 수정주의를 할 때 같이 수정주의를 하고 또 남이 《개혁》과 《개편》을 한다고 할 때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 사회주의 건설의 력사적 교훈과 우리 당의 총 로선 中,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책임일군들과 한 담화 (1992년 1월 3일)

"사회주의의 본질적 우월성은 인민대중이 모든 것의 주인이라는데 있다. 인민대중이 모든 것의 주인으로 되자면 정치에서부터 주인이 되여야 한다. … 사회주의는 그 본성으로부터 온갖 특권을 배제한다." - 사회주의에 대한 훼방은 허용될 수 없다 中,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기관지 《근로자》에 발표한 담화 (1993년 3월 1일)

"사회주의는 현대수정주의자들에 의하여 자기 궤도에서 탈선되고 내부로부터 와해되기 시작하였으며 사회주의의 력사적 업적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말살한 사회주의배신자들의 《개혁》,《개편》정책에 의하여 붕괴되였습니다." - 혁명선배를 존대하는 것은 혁명가들의 숭고한 도덕의리이다 中,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기관지 《로동신문》에 발표한 담화 (1995년 12월 25일)

이런 말씀을 하시던 양반이 왜 어느 날 갑자기 개혁개방의 화신(化身)으로 변모하셨을까? 여전히 김정일씨는 연구대상이다.
Key's tip

김정일씨는 '천지개벽'이란 단어를 무척 좋아하는 것 같다. 김정일씨는 2000년 1월 24일 평안북도 토지정리사업을 현지 지도할 때 평안북도 태천군의 토지정리를 칭찬하면서 "천지개벽되고 구조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라고 표현했다. 또한 그동안 김정일씨가 소련과 동유럽의 구(舊)사회주의 나라들의 붕괴를 비난하면서 썼던 표현을 보면 '개혁 개방'이라고 하지 않고 '개혁 개편'이라는 용어를 쓰고 있다. 김정일씨가 외부 자본을 끌어들이는 방식의 개방정책을 적극 검토해왔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나 정치적 자유와 민주주의를 보장하는 '개혁'은 철저히 거부하고 있다. 개혁 없는 개방 정책이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아무튼 김정일씨의 불륜 행각이 로맨스로 성공하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