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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글머리에

남북정상회담 이후 해빙분위기를 타고 남북관계에 대한 갖가지 견해들이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 견해들은 북한의 개혁개방에 대한 예측에서부터 동북아정세 변화와 한반도의 장래에 대한 전망에 이르기까지 다기다양한 주제들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데 반비례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북한주민들의 인권현실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실종되어 가는 느낌이다.

북한 인권상황의 참혹성에 대해서는 이미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한사회에는 북한주민들의 처지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들의 인권현실 개선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보다는 김정일 정권을 지원하고 그와 손을 잡자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특히 진보주의적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발언을 남북화해 분위기를 거스르는 극우반공적 시각의 대북 비판으로 간주하고 이에 경계의 목소리를 높이는 양상이 두드러져 보인다.

과거 좌파 이념에 대한 맹목적 적대감이 북한에 대한 증오와 결합하여 우리 사회의 지성과 민주주의를 어떻게 황폐화시켜 왔는가를 아는 사람이라면 이들의 경계심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 진보적 지식인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기득권 세력에 대한 비판을 막으려는 의도에서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과 반북여론을 확대재생산 했던 매카시즘적 반공주의와, 북한인민의 정당한 인간적 권리를 옹호하기 위해 북한 체제의 비인간성을 고발하는 보편적 인권옹호 시각에서의 북한 권력에 대한 비판을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남한 사회의 민주주의 발전과 진보를 지향하며 사회적 발언권을 행사하고 있는 이들이 2천만명의 우리와 동일한 '인간'이 살고 있는 북한에 대해서는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보편적 기준을 접어두고 그 체제의 비인간성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고 있다. 심지어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참혹한 인권유린을 당하고 있는 북한인민과의 연대를 위한 노력들을 극우적 반공주의와 등치 시켜 놓고 이를 가로막으려는 경우도 적지 않게 눈에 뜨인다.

진보적 지식인들의 일차적 역할이 인간의 존엄을 짓밟는 일체의 현실적 조건들에 대해 비판하고 인간해방을 위해 투쟁하는 데 있다면 이들의 이런 태도는 이율배반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이 소수의 사람들 사이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많은 지식인들 사이에 공통되게 나타나는 경향이라면 이를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도덕성의 문제로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 중에는 엄혹한 조건에서도 인간의 존엄과 민주주의를 옹호하기 위해 형극의 길을 마다하지 않았던 존경할 만한 지식인들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북한에 대한 태도의 배경에는 개개인의 사고정향을 넘어서 작용하는 우리 사회의 지적 분위기 또는 풍토가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은 이러한 남한 진보지식인들의 대북 인식 경향의 사회적 맥락을 비판적으로 짚어보고 북한인민의 인권현실에 대한 관심을 촉구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필자는 전문적인 연구자가 아니므로 우리 사회 진보주의의 사상사적 맥락을 자세히 다룰 의도나 능력을 갖고 있지 않다. 이 글에서는 다만 필자 나름으로 절박하게 느끼고 있는 북한 인권문제에 한정해서 이들 사고경향의 문제점을 지적해 보려 한다.

Ⅱ-1. 극우반공주의의 부정적 영향

지난 냉전시기 우리 사회의 북한인식을 지배해 왔던 것은 극우적 반공주의이다. 이러한 의식의 특징은 자본주의를 비판 또는 반대하는 모든 사상이념과 사회운동의 흐름을 '파괴적'이고 '반국가적'이며 '해악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말살의 대상으로 보는 데 있다. 극우적 반공주의의 관점은 -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자체가 내포한 오류와는 별개로 - 공산주의 역시 애초에는 자유주의 등의 이념과 마찬가지로 사회진보를 통해 인간의 존엄을 구현하려 했던 이상주의적 열정의 산물이었으며, 역사적으로 볼 때 공산주의자들 중에도 타인의 고통을 자기의 고통으로 생각하고 개인의 이익과 생명을 돌보지 않으면서 사회진보를 위해 활동했던 이상주의자들이 다수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관점은 공산주의자나 이에 동조하는 사람들은 물론 심지어는 공산주의자로 '의심되는' 사람들까지를 대화와 공존이 불가능한 타도와 탄압의 대상으로만 간주했었다. 물론 이러한 반공주의는 인간의 존엄과 사상의 자유에 관한 보편적 원칙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으며, '내편(극우반공세력)의 인권은 인정해도 적(좌파)의 인권은 인정할 수 없다'는 반민주적인 생각으로 연결되었다.

이러한 '반공주의'는 80년대까지 이데올로기문제를 보는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시각을 이루었다. 그 역사적 배경으로는 첫째 우리 사회에서 근대적인 민주주의 사상이 인식된지 오래되지 않아 사상과 양심의 자유에 대한 이해가 낮았다는 점, 둘째 대한민국 건국을 전후한 좌우대결의 과정에서 좌익의 힘이 매우 강해 우익이 생존의 위기감에서 좌파 이념과 사회운동에 대해 매우 큰 두려움과 적대감을 갖게 되었다는 점, 셋째 이와 연결되는 한국전쟁의 경험, 넷째 과거 권위주의 시대에 집권세력이 통치의 편의를 위해 반공주의를 국민통합과 반대파 탄압의 수단으로 이용했다는 점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김대중 정권 이전의 역대정권들은 통치의 편의를 위해 '공산주의=절대 악, 공산주의자=늑대≠인간'과 같은 단순한 도식으로 국민들을 교육해 왔으며, 이것은 우리 사회 일반대중들의 북한 인식을 매우 단순하고 비이성적인 상태에 머물게 했고 공산주의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마저 어렵게 했다.

그러나 이러한 반공주의는 지난 30여 년간의 민주화운동 흐름 속에서 보편적 인권에 대한 대중의 자각이 높아지고 또 맑스주의가 우리 사회의 이념 생산을 담당하는 지식인들 사이에 널리 확산되면서 점점 약화되는 추세를 보여왔다. 그리고 이에 따라 지금에 이르러서는 적어도 지식사회 내에서 극우와 보수우파의 지적 헤게모니는 무너졌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들 새로운 세대의 진보파 지식인들은 70∼80년대 민주화운동 과정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는데, 이들은 극우반공주의에 대항하며 자신들의 비판적 의식을 형성해 왔다. 이로 인해 그 중 많은 사람들이 극우반공주의의 폐해에 대한 인식과 피해의식으로 인해 공산주의를 비판하거나 반대하는 모든 입장을 극우반공주의와 동일시하는 경향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에게 있어서는 북한체제에 대한 강도 높은 비판은 그 근본동기와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과거의 매카시즘적 반공주의의 악몽을 상기시키는 것 같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들 진보적 성향의 지식인들 중 다수는 북한 인권현실에 대한 비판에 소극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누가 봐도 명백한 김정일 체제의 인권유린을 비판하고 북한사회의 민주화를 주장하는 것을 모두 극우로 규정하는 것은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라는 격이다. 만일 이런 식의 입장이 옳다면 냉전시대에 소련의 인권유린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던 서구의 모든 자유주의자, 반스탈린주의적 맑시스트, 사민주의자 등도 다 '극우'의 범주에 넣어야 할 것이다. 어떻게 이런 태도를 합리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인물과 사상} 2000년 12월호에 실린 홍세화씨의 글 <어떤 프렌치 커넥션 2>는 이런 입장을 전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글을 읽다보면 정말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북한현실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은 북한현실에 대해 비판하지 않으며 북한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른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인 듯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는 프랑스의 어떤 인도주의 구호기관 사람이 북한 인권현실을 비판하는 사람들에 대해 부정적 의견을 피력했다는 것을 그 한 예로 들고 있다. 그러나 홍씨는 세계적인 인도주의 구호단체인 영국의 'OXFAM'이나 1999년 노벨평화상 수상단체 '국경없는 의사회', 프랑스의 구호단체 '기아추방 행동(ACF)' 등이 인도주의 활동에 대한 북한 당국의 극심한 방해에 분노하여 북한당국을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북한에서 철수한 사실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또 국제인권협회가 북한정권의 인권탄압에 대해 전세계의 관심을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각국 정상들의 동참을 호소한 사실도 무시하고 있다. 작년 5월 17일에 프랑스의 공산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북한의 억압체제를 비판하는 성명을 프랑스 공산당 기관지인 [뤼마니떼]에 발표한 사실도 물론 무시되고 있다.

일부 지식인들의 이러한 사고정향은 우리 사회의 역사적 경험에서 기인한 것이므로 사회심리학적 차원에서는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그러나 지식인의 지식인다움을 규정하는 근본조건 중 하나가 개인의 직접적 경험에 의해 왜곡된 주관적 잣대가 아니라 보편적 가치척도를 사물에 대한 판단기준으로 삼는 이성적 사유능력에 있다면, 우리 사회나 개인의 특정한 역사적 경험에 함몰되어 2천만의 인간이 현실적으로 겪고 있는 고통에 대해 침묵하거나 침묵할 것을 강요하는 태도를 지식인의 올바른 태도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지금 북한정권이 저지르고 있는 '반인도(反人道) 범죄'에 대해 침묵하느냐 발언하느냐는 인간의 보편적 양심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