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9년 12월 14일 일본 니가타항. 수천 명의 사람들이 여객선을 향해 손수건을 흔들며 '지상낙원'을 향해 떠나는 가족과 친지, 동료들을 배웅하고 있었다. 이른바 북송(北送) 재일동포. 이중에는 내 고향 땅에 가서 남은 여생을 살겠다는 노부부, 일제때 징용으로 끌려왔다가 돌아가지 못한 막노동판 일꾼, 사회주의 조국에 가서 갖고 있는 이상을 맘껏 펼쳐보겠다던 공산주의자, 아버지의 조국에 공부하러 떠나는 대학생,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이국 땅에서 설움 받으며 살면 뭐하냐며 돈가방을 챙긴 사업가 등 다양한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어린 아이를 업고 조선인 남편을 따라나선 기모노 차림의 일본 색시도 있었다.

그러나 만경봉호에 올라탄 이들의 꿈과 이상은 여객선이 뿜어대는 검은 연기와 함께 현해탄 하늘 위로 날아갔다. 재산과 지위를 보장해 준다는 장밋빛 약속들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는 걸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성분조사 사업이라는 명분으로 한 명 두 명 불려가더니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고, 공안기관 사람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가족을 모두 어디론가 끌고 가기도 했다.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그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들려오는 소문만으로 알 수 있을 따름이었다. '혁명화 구역으로 갔다더라', '간첩죄로 죽었다더라', '어디에 갇혀 있다더라'는 흉흉한 소문이 끊이질 않았다. 자고 일어나면 한 두 가족씩 사라지는 공포스런 날들이 계속되었다. 끌려간 사람들은 가재도구도 모두 몰수당했다. 일본으로 보내는 편지가 모두 감시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이즈음이었다.

일본에 남아있는 가족들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간간이 안부를 전하는 편지라도 날아오더니 나중에는 아예 연락이 끊긴 사람들이 많았고, 지상낙원이라는 그곳에서 전해온 소식은 식료품, 의류, 의약품, 그 밖의 생필품을 보내 달라는 아리송한 내용들이었다. '설마'하던 것이 차차 불안으로 바뀌었다. 조총련을 찾아가 가족을 만나게 해달라고 요구했지만 들어주지 않았다. 다시 돌려 보내달라는 요구 역시 거절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곳은 한번 갈 수는 있어도 다시 돌아올 수는 없는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야 자신의 가족들이 지금 북한에 '인질'로 잡혀 있다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80년대에 들어서면서 북의 가족들은 생필품뿐만 아니라 엔화나 달러를 보내달라고 편지를 보냈다. 가족뿐 아니라 친지들, 조금만 안면이 있는 사람에게도 다 편지를 보내 '돈'을 요청했다. 편지를 받은 사람들은 내 가족을 살리자는 생각에 어떻게든 기를 써 그 돈을 보내 줘야만 했고, 북한과 조총련의 비위에 거슬리는 행동은 할 수 없었다. 이 숨막히는 비극의 악순환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 김정일의 든든한 돈지갑

재일교포 북송사업은 1955년 북한 외상 남일의 재일교포 귀환 추진 발언과 1958년 9월 8일 '재일교포의 귀국을 환영한다'는 김일성의 성명을 계기로 제기되었다. 이러한 북한의 요구에 대해 1959년 2월 일본 의회에서 '재일조선인 중 북조선 귀환희망자의 취급에 관한 건'을 의결하였고, 그 해 8월 13일 북한적십자사(북적)와 일본적십자사(일적)간의 캘커타 북송협정에 의해 재일교포 북송이 처음 시작되었다. 그러나 1965년 남한정부를 한반도의 유일정부로 인정하는 한일국교정상화가 이루어지고 북송교포의 비참한 생활상이 일본에 전해지면서 1967년 북적과 일적의 협정시한 연장회담이 결렬됨으로써 공식적인 북송사업은 막을 내렸다. 1959년부터 1967년까지의 기간 동안 북송선을 탄 숫자는 8만 8천여 명, 그 이후 자비부담으로 북한행을 택한 사람까지 포함하면 총 9만 3천여 명이 거대한 인질의 수렁에 빨려 들었다.

역사상 유례없는 인질극을 현지에서 진두지휘한 조직은 바로 조총련. 재일교포 북송사업은 조총련이 지난 40여 년 동안 했던 사업 중 가장 대표적인 사업이며, 북한에 가장 든든한 돈줄을 만들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조총련(재일 조선인총연합회)은 북한의 대표적인 친북해외단체로 우리가 흔히 '민단'이라고 부르는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과 함께 재일동포 사회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 민단이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친남(親南)적인 성격을 분명히 하고 있는 반면, 조총련은 북한과 일본이 수교를 하지 않은 상황에서 '북한의 일본대표부' 역할까지 하고 있다.

조총련은 단순한 대중단체가 아니다. 조직을 뜯어보면 거대한 기업체를 연상케 한다. 기본조직은 48개 지방본부, 280개 지부, 1300여 개의 분회로 이루어져 있고, 재일조선청년동맹, 재일조선유학생동맹, 재일조선민주여성동맹, 재일조선인교직원동맹, 재일조선인과학자협회 등 계층별 조직, 재일조선인상공연합회, 재일조선인신용조합협회 등의 직능별 조직을 갖추고 있으며, 조선신보사, 조선통신사 등의 언론기관, 조선대학교를 비롯해 140여 개의 초·중·고등 교육기관, 조은(朝銀) 같은 금융기관은 물론이고 수많은 도박장과 기업체를 이끌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조총련을 흔히 '김정일의 돈지갑'이라고 부른다. 조총련은 1994년까지 매년 6∼8억 달러로 북한에 송금하였으며(95년 산케이신문 보도), 이는 북한의 주요 외화 소득원이 되고 있다. 한편 99년 일본 잡지 [정론]은 "조총련이 빠찡코 수입금 200∼300억 엔을 매년 북한에 송금하고 있다"고 보도한 바 있는데 정확한 액수는 알 수 없지만 하여튼 북한에게 있어서는 상당한 규모의 자금을 지원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

조총련은 이러한 돈을 '애국사업'이라는 명목으로 끌어 모으는데, 김일성·김정일 생일이나 당 창건기념일 등에는 따로 충성헌금을 걷기도 한다. 조총련은 3년마다 개최되는 전체대회나 연초에 열리는 중앙 열성자 대회를 통해 당면 조직과업으로 애국사업을 설정하고 각 단위마다의 책임량을 설정한다. 이렇게 책정된 목표에 따라 각 지부와 회원들은 현금과 물자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끌어 모아야 한다. 그러다 보면 무리가 따르게 마련, 몇 해 전에는 조총련계 신용조합인 조은의 부이사장이 일본 검찰에 고발당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북한으로부터 김일성 훈장을 받았던 그는 훈장의 대가로 헌금을 요구받자, 고객의 예금 중 2억 엔을 무단으로 인출해 북한에 송금해 버린 것이다.

일본 내 북한민주화운동 단체인 RENK(구출하자 북조선 민중! 긴급행동네트워크)에 의하면 북한은 김정일의 총비서 취임 축하금 명목으로 조총련에 80억 엔을 지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조총련은 이 액수의 1%도 보내지 못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조총련에서 돈을 받으면 김정일은 이중 얼마를 교육사업 지원액으로 다시 조총련에 내놓는다는 것이다. 1999년에도 김정일은 1억엔 정도를 장학금으로 내놓았으며,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 등은 이를 '장군님의 크나큰 은덕'이라고 대서특필하였다.

■ 조총련의 퇴락과 한덕수의 죽음

조총련은 설립당시 조직원이 47만 명에 달해 초기에는 민단보다 큰 세력을 형성했으나 갈수록 탈퇴가 급증, 현재 조직원은 22만 명 정도 된다고 한다. 그러나 조총련의 핵심조직인 학습조가 현재 2000∼5000명인 점을 감안할 때 실제 조직인원은 이보다 훨씬 적을 것으로 보인다. 조총련계 조선학교는 한때 4만 6000여명에 달하던 것이 이제는 1만 6000여명으로 줄었으며, 조총련의 가장 굵직한 자금줄인 조은의 각 지역 조합들도 파산하거나 강제합병 되고 있다.

조총련의 퇴락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사회주의권의 붕괴, 김일성 사망, 황장엽 비서 망명 등의 사건을 보면서 사상적으로 전향하여 민단으로 옮겨가는 사례가 많고, 재일교포 사회전반이 그렇듯이 1·2세대의 사망이후 일본에 귀화하는 3·4세대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경제분야의 몰락은 무리한 대북송금, 북한에 대한 충성심에 따라 대출하는 등 정치적 운영을 거듭한 탓이 크다.

그러나 역시 무엇보다 큰 이유는 젊은 세대들이 더 이상 북한과 조총련의 거짓 선전에 속지 않는다는 것이다. 눈이 있고 귀가 있으면 북한의 처참한 실상과 김정일 세습의 기만성을 알고 있을 텐데 어느 누가 지금의 북한을 사회주의 조국이라고 생각하겠는가. 지금 조총련은 핵심분자만 남아 있고 사실상 붕괴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쨌든 남아있는 조직원의 상당수는 북송되어 인질로 잡혀있는 가족들 때문인 경우가 많다. '재일교포 북송사업'은 북한에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던져주었고, 조총련 조직을 그나마 유지하는 근간, 그리고 북에 있는 가족의 안전 때문에 일본의 가족들이 인권문제를 함구하게 만드는 1석 3조의 역할을 하여 왔다. 만약 이런 재일교포 북송사업마저 없었다면 북한은 이미 80년대에 무너져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김일성과 김정일에게 있어 조총련은 얼마나 귀한 자식이겠으며, 이 조총련을 만든 사람은 또 얼마나 예뻐 보이겠는가.

조총련의 얼굴은 역시 '한덕수(韓德洙)'이다. 그는 '조총련의 역사 그 자체'라 불리운다. 조총련이 결성된 1955년부터 의장을 맡아온 한덕수는 1995년 제17차 조총련 전체회의에서 퇴임이 점쳐지기도 했으나 지금까지 46년 간 쉼없이 의장직을 유지해 오다가 지난 2월 21일 9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종신의장(終身議長)으로 군림한 것이다. 한덕수의 이러한 장기집권은 김일성과 김정일이 뒤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한평생 김일성과 김정일을 위해 살아온 한덕수는 이른바 '2중 노력영웅'이라 불린다. 북한에서 일생에 한번 받기도 힘든 '공화국 노력영웅' 칭호를 그는 생전에 두 번 받았으며 김일성 훈장도 세 차례나 받았다. 1967년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4기 대의원에 선출된 이후 1998년 7월 제10기 대의원까지 여섯 차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연임하였고, 김일성상,　김정일 표창장, 조국통일상,　국기훈장　제1급 (10번),　자유독립훈장　제1급,　공화국창건기념훈장,　총련결성기념훈장 등 그가 김일성, 김정일로부터 받은 이력서는 화려하다 못해 눈부실 정도다.

김일성은 한덕수를 "의장동지는 총련의 중심인물이고 좋은 지도자입니다. 총련 의장은 일본 반동들과 미국반동들, 남조선반동들이 욱실거리는 이국 땅에서 총련 대오를 튼튼히 꾸려 가지고 우리 당을 받들고 자기 조국을 받들어 투쟁을 잘하였습니다."라고 칭찬하였고, 김정일도 "우리 당과 혁명의 귀중한 원로이며 해외교포운동의 명망 높은 활동가, 참다운 애국충신"이라고 평가하였다.

■ 붉은기는 필요한 때 내걸면 된다

최근 일본의 한반도 문제 전문월간지 [현대코리아]는 2001년 1∼2월호에 '김정일 비밀 발언록' 전문을 공개해 화제를 모았다. 그것이 진짜로 김정일 발언록이라는 정확한 증거는 없지만, 내용을 볼 때 김정일이 한 말들일 가능성이 높은 것 같다. 김정일이 조총련 제1부의장 서만술을 불러 향후 조총련의 사업방향을 지시한 것이 주 내용인데(1999년 4월 20일에 이루어진 면담이라고 한다), 내면을 찬찬히 뜯어보면 김정일이 작금의 북한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리고 조총련을 비롯한 친북단체들이 어떠한 길을 걸을 것인지 대강의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여기서 김정일이 조총련에 요구하는 주된 주문은 '개량주의의 외피를 쓰라'는 것이다. 김정일은 "조총련이 사업방법을 바꿔 우경화되고 있다는 얘기가 적들 사이에서 나와도 좋습니다. 김정일 장군이 왜 조총련은 그렇게 강하게만 나오는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야단을 쳤다는 얘기가 바깥에 나와도 괜찮고, 적의 중심에서 김정일 장군이 아마 개량주의자가 된 것 같다는 얘기가 나와도 좋습니다. 지금의 정세 하에서 붉은기는 마음속에 숨기고 앞에다 내걸어서는 안됩니다. 필요할 때 내걸면 되는 것입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면서 김정일은 서만술에게 '핵심진지를 단단히 구축할 것, 계층별 사업방식을 특성있게 바꿀 것, 예를 들어 조선신보 일본어판을 발행하는 식으로 일본사회에 맞게 사업할 것, 일본의 정·관계 및 언론계에 친북세력을 광범위하게 구축할 것' 등을 비교적 구체적으로 지시하고 있다. 요(要)는, 완전히 탈을 바꿔 쓰고 튼튼한 진지를 구축하면서 장기전에 대비하라는 것이다. 간단히 언급되어 있지만 이 발언록에서는 김정일이 지금 북한 인민들의 고생에 대해 '나라 잃은 과거를 잊어버리고 너무 고통스럽다고만 하고 있다'라고 큰소리치는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다.

조총련은 다가오는 5월 25일과 26일 제19차 전체대회를 열어 한덕수가 빈자리를 새로운 사람으로 대체하고 당면 사업계획 등을 논의한다. 후임으로는 탄탄한 조직기반을 갖고 있는 서만술이나 김정일의 심복인 허종만이 유력시되고 있다. 어찌되었든 조총련 노선의 일정한 변화가 이루어질 것이다.

조총련은 지난 50년 간 북한과 그 운명을 같이 하였고, 든든한 경제적 후원자의 역할을 해왔다. 그리고 그 과정에 북송교포 수만 명의 생명을 앗아가고, 수십만의 가족들에게 뼈 속 깊은 한(恨)과 저주를 새겨주었다. 이러한 오욕의 역사를 뒤로 한 채, 그동안 북한의 돈줄, 사람줄, 대변인의 역할을 담당하였던 조총련과 친북단체들은 북한정권이 장기적 위기관리체제로 전환함에 따라 '붉은기는 마음속에 담고' 새로운 방향전환을 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총련을 비롯한 친북단체들은 김정일의 지시대로 붉은기를 숨긴 채 꼭두각시놀음을 계속 할 것이 아니라, 지금이라도 북한 인민들을 진정으로 걱정하고 사랑하는 붉은기를 전면에 내걸어야 한다. 그것이 지난날 역사에 지은 죄를 씻는 길이다. '붉음'은 정의이고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