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체제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을 깡그리 극우파로 모는 것도 사실에 어긋나지만 백보 양보해 그러한 주장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정말 극우세력에 대한 경계심이 그렇게 강하다면 그럴수록 진보주의자들이 먼저 나서서 북한의 인권상황 개선과 민주화를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북한인민들은 자신들의 진정한 벗이 남한의 진보파가 아니고 극우파라고 믿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북한민중이 제대로 발언하게 될 때 한국 진보주의는 이로 인해 심각한 위기를 겪게 될 것이다.

일부의 진보파 지식인들은 아직도 남한사회에서 보수우익 이데올로기가 강고한 헤게모니를 잡고 있다고 믿고 있으며, 북한사회에 대한 비판은 극우세력을 강화시켜주기 때문에 바람직하지 않다는 논리를 북한 인권문제 거론을 반대하는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 '극우세력에 이용당하므로 북한체제를 비판해서는 안 된다'는 논리는 필자가 전에도 다른 글에서 썼듯 '북한 공산당에 이용당하므로 남한의 민주화운동은 안 된다'던 논리의 복제판이며, 남한내의 이해관계를 앞세워 북한민중의 처지를 무시하는 논리이다. 이와 같은 사고에서는 북한의 민중은 남한내 진보파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서 희생시킬 수 있는 존재로 간주되고 있다.

기독교의 성서에 강도를 만나 길에 쓰러진 유태인을 보고 동족인 제사장과 레위인이 그냥 지나쳐간 반면 유태인과 적대적 관계에 있던 사마리아인이 그 사람을 구해주었다는 예화가 나온다. 이것은 '어떤 사람이 참된 이웃이냐'는 질문에 대한 예수의 대답이다. 필자는 남한의 극우세력을 선한 사마리아인이라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래도 길에 쓰러진 사람에게는 본래 착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간에 자신을 구해주는 사람이 그냥 지나쳐간 '착한 사람들'보다는 더욱 선한 사람으로 보일 것이다. 자신은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는 어떤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물에 빠진 사람에게 도움을 주려는 사람을 향해 '당신은 본래 악한 사람이니 사람을 구할 자격이 없다'고 외쳐대고만 있는 사람을 누가 믿겠는가?

Ⅲ. 사회주의에 호의적인 진보지식인들의 지적 경향

지난 수십 년 간의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남한사회에는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강력한 진보주의세력이 형성되었으며 이들은 90년대 들어 우리 사회 지식계층 사이에 광범위한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는 현실에 대한 대안모색 과정에서 맑스주의 또는 그 밖의 사회주의적 사조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매우 많으며 그 결과 자본주의에 비판적이고 사회주의에 호의적인 의식을 가지게 된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러한 지적 정향이 상대적으로 남한사회에 대해 엄격하고 사회주의를 표방해 온 북한사회에 대해서는 너그러운 태도를 갖게 한 한 요인이 된 것은 틀림없다.

이들 가운데 일부는 북한사회를 사회주의사회라고 믿고, 비록 그 사회가 현재 여러 가지 문제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남한의 경우도 문제가 있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북한사회의 문제점을 덮어주고 남한이 북한의 현 독재권력을 도와 어려움을 극복하게 해줘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나아가서는 북한사회에는 남한사회에는 없는 장점들도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4). 그리고 이러한 사고는 남북 양 체제가 서로 존중하고 공존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연결되는데 이러한 생각은 그 본뜻과는 관계없이 극단적으로 비인간적인5) 현 북한체제의 존속을 지지하는 것으로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남한보다 훨씬 철저하게 위계화 되어 있고 신분간의 유동성도 극히 작은 북한사회를 사회주의 사회로 보는 것은 합리적인 판단이라고 인정하기 어렵다. 북한이 맑스가 말한 사회주의 사회와 비슷한 점은 평등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이 아니라 개인의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집산주의 체제라는 점이다. 그리고 이것은 수령숭배와 결합하여 주민에 대한 무시무시한 억압적 독재를 뒷받침하는 지주로 되고 있다. 오죽하면 프랑스의 공산주의자들이 성명에서 '북한사회를 공산주의 사회라고 말하는 것은 공산주의에 대한 희롱'이라고 했겠는가?

이런 조건에서 스스로를 좌파 지식인이라고 생각한다면 김정일 체제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갖는 것이 논리적으로 옳은 것이다. 애초에 자본주의를 비판한 동기가 인간의 존엄을 구현하려는데 있었다면 북한사회도 이러한 원칙에 따라 보는 것이 옳다. 그러나 한국의 좌파 지식인들 가운데 북한의 인권현실에 대해 보편적 잣대를 가지고 진지하게 비판하는 사람을 찾아보기는 극히 어렵다.

필자에게는 남한 좌파 지식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과거 극우 반공주의의 정반대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비전향장기수 송환문제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높이고 시급한 해결을 요구하던 사람들이 납북자 귀환문제나 북한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서두르지 말자'고 주장하거나 언급을 회피하는 경우가 그렇다. 북한 인권실상을 고발하는 탈북자들을 모욕하는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이 겪은 인간적 고통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어떻게 그런 모욕적인 태도를 취할 수 있단 말인가?

과거 냉전시대에 남한의 극우파들은 같은 우파의 인권만 인정하고 좌파의 인권은 인정하지 않았다. 오늘날에 와서 남한의 좌파가 좌파 아닌 사람들의 인권에 대해 무관심하다면 극우파에 비해 나은 점이 무엇인가? 참다운 진보주의자의 인권문제에 대한 잣대는 '우리편'인지 아닌지가 아니라 인간존엄의 보편성에 대한 신념이어야 한다. 인간의 존엄성은 좌우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것이다. 그러나 북한 인권문제에 대해 냉소적인 사람들에게서는 안타깝게도 이런 인식을 찾아보기 힘들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