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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은 수령절대주의체제를 구축하면서 정치적 지도의 방식으로 각 부서들이 정책안을 제의서 형식으로 올려 비준 받는 것을 제도화하였다. 그는 새로운 문제와 원칙적인 문제는 예외없이 제의서를 제출하여 비준받도록 엄격한 제도를 세웠다. 이와는 달리 김일성은 현지지도를 중심으로 하는 사람과의 사업을 우선하였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의 조선노동당 당중앙위원회 안에는 조직지도부와 선전선동부를 위시하여 여러 개의 부서와 각 부서에는 또 여러 개의 과가 있다. 일반적으로 각 과에서 정책과 관련된 제의서 또는 정세 자료보고를 작성하여 부부장과 부장을 거쳐 비서에게 올라와 통과되면 매주 한번씩 부서별로 문건을 김정일에게 올리게 된다. 김정일에게 올리는 제의서와 보고서는 그것이 아무리 좋지 않은 내용이라도 사실에 기초해 있다고 볼 수 있다. 김정일로서는 제의서에 기초하여 모든 것을 파악하고 지시를 내리기 때문에 사실이 아닌 것이 들통날 때에는 정치범수용소 행을 각오해야하기 때문이다. 또 거짓으로 보고를 해봤자 다양한 부문의 정보를 독점하고 있는 김정일에게 곧 들통나기 십상이다.

북한에는 중앙당 외에도 정무원과 외교부, 군대, 사회안전부, 국가안전보위부 등 직접 제의서를 올리는 단위들이 있기 때문에 김정일에게 올리는 제의서들과 보고서들의 양은 엄청나다. 그렇지만 김정일은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제의서는 다 자기가 직접 보고 결론을 내린다. 이 모든 것은 방대한 작업량이지만 김정일은 이 사업을 절대로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직접 처리한다.

김정일이 이렇게 수표(서명)한 문건은 그 어떤 법보다 우선하며 불가능한 것이 없게기 때문에 아무리 높은 중앙당 비서건 보위부 간부이건 간에 조금이라도 편의를 봐줄 수가 없다. 또 제의서는 비준해 주는 형식에 따라 그 등급이 매겨지는 데 김정일이 자기 이름과 날짜를 친필해 준 것은 무조건 집행해야 할 법적 문건으로 되고, 날짜만 써준 것은 제의서를 올린 부서가 책임지고 집행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줄만 두 개 써준 것은 집행해도 좋고 안 해도 좋으니 부서 결심에 따라 하라는 뜻이다. 그리고 김정일이 중용하는 부서들에서는 1주에 한 번 정기 제의서를 올리는 것 이외에 매일 수시로 팩스를 통하여 김정일에게 보고를 올려서 결론을 받는다.

김정일이 보통 밤늦게 일하고 낮에 자는 것이 가능한 이유도 이러한 제의서 정치방식 때문이다. 또 모습을 나타낼 필요가 없는 사업방식으로 인해 경호와 보안, 신비스러운 이미지 관리에도 적합하다. 때문에 일반 북한 주민들은 물론이고 간부들조차 김정일을 직접 보는 것은 쉽지않다. 김정일을 직접 모시는 호위총국에서 근무하다 탈북한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그들조차 김정일의 얼굴을 본다는 것 자체가 일생에 한번 올 수 있는 크나큰 영광이라고 한다. 때문에 지난 남북정상회담 당시 김정일이 "구라파 사람들은 김대중 대통령이 오셔서 (자신이) 은둔생활에서 해방되었다고 한다"고 비유한 것은 기실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제의서 정치의 문제는 김정일이 모든 정보를 독점하고 결정하다보니 부처간의 협의나 토론 같은 것이 들어 설 자리가 없다는 점이다. 모든 결론은 김정일에게 직접 내리기 때문에 구태여 골치 아프게 협의를 할 필요가 없다. 이러다 보니 북한이 겉으로 표방하는 사회주의 계획경제라는 것조차 제대로 실행될 수가 없다.

한 가지 예를 들어서 1996년에 전력생산이 190만∼200만KW가 생산되었는데, 이것은 북한이 필요로 하는 소요량(1000만KW)의 20% 정도이다. 그런데 생산된 200만KW 가운데서 단 1분도 정전시켜서는 안 되는 특수대상들에 필요한 전력이 80만KW이고, 중간에 유실되는 전력이 20만KW 정도이니 결국 남는 것은 100만KW밖에 되지 않는 셈이다. 이렇게 전력이 부족하다보니 특수 권력기관들에서는 내각총리나 국가계획위원회와는 협의하지 않고 직접 김정일에게 자기 기관에 전력을 우선 공급해 달라는 제의서를 올려 비준을 받았다.

김정일이 비준한 문건은 그 누구도 어길 수 없는 법적 문건이기 때문에 특수 권력기관들은 내각의 전력공업성을 찾아가 김정일의 비준문건을 보이며 전력을 우선적으로 공급하라고 강요하고 협박하였다. 그런데 특수기관들이 김정일로부터 우선적으로 받도록 비준받은 전력이 전체 생산량보다 많은 웃지 못할 일이 발생한 것이다. 전력공업성에서는 도저히 이런 요구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자기들로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는 사정을 다시 김정일에게 신소하였고, 김정일은 이것을 중앙당 비서들에게 떠넘겨 처리하도록 과업을 주게 된다.

많은 시간을 제의서와 보고서를 본다고 하여도 국가운영의 모든 부분을 다 파악하고 항상 올바른 결정을 내린다는 것은 제 아무리 유능한 지도자라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물며 김정일은 나라의 미래는 고사하고 국민들이 먹고 살아가는 민생경제와 같은 것은 관심조차 없을 뿐만 아니라 간부들이나 북한 주민들 스스로의 민생경제 해결을 위한 다양한 모색과 시도들조차 봉쇄하고 있다. 왜냐하면 북한 주민들을 먹여 살리는 것은 수령의 권한이기 때문이다. 만약 유능한 간부들의 주도로 주민들이 스스로 먹고살 길을 개척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수령절대주의체제, 수령우상화가 가능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정일은 자신의 민생문제 해결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권유지를 위한 사회통제를 위해 권한의 위임이나 주민들의 자주성을 높이는 방식으로 사업을 하지 않는다. 오직 수표하는 것에 따라 움직이는 인형을 원할 뿐이다.

즉, 김정일이 제의서를 통한 정치사업을 하는 것은 그것이 자신에게 편하고 또 자신이 모든 정보를 독점하고 각 단위와 부서들이 끊임없이 상호견제를 하면서 사람들을 자신에게 의존하도록 만드는 것이 수령절대주의체제를 확립하고 정권을 독점하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합리성이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이러한 사업방식은 즉흥적인 김정일의 성격과 무능력이 맞물리면서 북한을 오늘날과 같이 파탄으로 이끌고 말았다.

예를 들어 극심한 고난의 강행군 시기인 1996년 김정일의 중학교 동창생이던 당시 스위스 대사가 김정일에게 "스위스에서는 풀만 먹이는 방법으로 소와 양을 잘 기른다"며 스위스를 참고하여 식량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좋겠다는 보고서를 올리자 김정일은 중앙당 비서들에게 이 사업의 대책을 세우라고 지시를 하자, 이에 비서들은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김정일 장군님의 또 하나의 천재적 창안"이라며 비서들이 한 개 도씩 맡아 사료로 쓸 풀판을 조성하기 위한 사업을 하게 된다. 세상에 국민들이 당장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는 상황에서 풀판을 조성할 땅과 노동력이 있으면 옥수수라도 하나 더 심는 것이 정상이 아닌가? 이것은 김정일이 국민들의 먹고사는 문제 해결에 관심과 능력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지만 일단 김정일이 결정하였다면 그것이 터무니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대대적으로 시행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000년대 들어 북한 내의 반김정일 의식 확산 방지와 부분적인 개방의 필요성으로 인해 김정일의 현지시찰과 현지지도 모습이 TV 화면에 비추기도 했지만 그것이 제의서 정치방식에서 정보의 공유와 토론의 활성화를 통한 시스템과 정책의 구축과 인재양성, 대중을 대상으로 직접 설득하고 호소하면서 리더십을 형성하는 대중 정치지도방식으로 변화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오히려 변화의 와중에 더욱더 고삐를 죄는 것이 정권유지에 중요하다고 판단할 것이다. 지금도 김정일은 더욱 누구도 믿지 못하고 이른 새벽까지 당간부들의 동태보고서와 각 군부의 동향보고서를 읽고 있으며 잔머리를 굴리고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