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입니다. 한국 현대사에서 5월은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노래할 수 없는’* 달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민족민주열사·희생자추모(기념)단체연대회의>가 해마다 발행하는 열사력(烈士曆)이라는 달력에는 한국 민주화 과정에서 숨져간 사람들의 이름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일년 삼백예순날 중 거의 절반 가까운 날마다에 ‘열사’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고문당해 죽은 사람, 시위 도중 사망한 사람, 자신의 몸을 스스로 불살랐거나 건물 옥상에서 청춘을 내던진 사람, 의문의 죽음을 당한 사람,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병을 얻어 죽거나 수감 후유증으로 고생하다 죽은 사람…. 5월 달력에는 이런 사람들의 이름이 다른 달에 비해 유독 많습니다. 1980년 5월 광주(光州)에서 죽은 사람들까지 합치면 족히 수천은 될 것입니다. 그래서 특히 1980년대를 거쳐왔던 세대들에게 5월은, 너무도 큰 마음의 빚을 던져주었던,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다가오는 계절입니다.

2.

10년 전 5월, 그러니까 1991년 5월 즈음에는 많은 청년들의 분신과 투신, 시위 도중 사망이 잇따랐습니다. 4월에 명지대 학생 강경대 군의 죽음이 있었고, 전남대 학생 박승희 양의 분신이 있었습니다. 그 뒤로 김영균, 천세용, 윤용하, 김철수, 정상순의 분신이 이어졌고, 김귀정, 박창수의 죽음도 있었습니다. 돌이켜보건대 하룻밤을 자고 다음날 신문을 펼쳐 보기가 두려울 정도였습니다. 어느 시인이 “죽음의 굿판을 집어치워라”고 가슴 아픈 한마디를 던질 만큼 당시 아침 신문에는, 어제는 서울에서 오늘은 대구, 광주에서 ‘어느 청년이 죽었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한달 내내 최루탄 연기 속에 콜록거리면서도 제발 내일 신문엔 ‘죽음의 소식’이 보이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하던 날들이었습니다.

1991년 5월에 숨져간 이름들 중엔 필자가 마지막 길을 바래주었던 친구의 이름도 함께 있습니다. 당시 전남 보성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었던 김철수. 지금 생각해보면 나이 어린 고등학생이 무엇을 알아 새파란 몸뚱아리에 휘발유를 붓고 제 손으로 불을 당겼는지 무척 안타깝기도 하지만, ‘김철수’ 이름 석자만 떠올려도 울컥 눈물이 나오려 하는 건 여전한 마음입니다. 아마도 그 이름은 평생 마음의 빚으로 남아있을 것 같습니다.

3.

해마다 5월이면 광주를 찾습니다. 먼저 간 친구의 무덤 앞에, 그 날 함께 했던 벗들이 모여 조그만 추모의 자리를 마련합니다. 향을 피우고 고개 숙여 눈을 감으면, 지나간 10년이 퍽도 빠르게 흘러갔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 한 켠이 왠지 허전해 집니다. 참으로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지난날의 폭도는 이제 민주화 유공자가 되었고, 대통령이라는 어마어마한 자리에 앉았던 사람들이 흰 수의에 수갑을 찬 채 법정에 서는 모습도 보았습니다. 그냥 시체를 내던져 놓았던 망월(望月)의 언덕은 경건한 국립묘지로 바뀌었습니다.

한때는 그곳에 가는 것이 그리 달갑지 않았습니다. 너무도 거창하게 변해있는 묘지를 보면 작은 힘이나마 우리가 보탰던 젊음이 고작(?) 이런 것을 만드는 거였나 하는, 여전히 남아있는 일종의 반항감에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전국 경찰서마다 걸려 있는 <민주화 운동 관련 의문의 죽음에 대한 양심선언·제보자를 찾습니다>라는 현수막을 보며 격세지감이란 말을 느낍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 철옹성으로 느껴졌던 거대 언론사에 반대하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는 것도 필자에게는 우리 사회가 그만큼 민주화되었다는 하나의 증거로 보입니다.

올해도 친구의 추모식이 있습니다. 함께 했던 벗들이 모일 것입니다. 광주에 내려갈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다시 봄을 맞아 파릇하게 자라났을 무덤의 풀잎을 쓰다듬으며 ‘살아남은 자의 의무’를 돌아볼 것입니다. 살아가는 모습은 다양하고, 바뀐 묘지만큼이나 우리들의 옷차림과 처지도 바뀌었지만, 지난날에 품었던 열정과 이상만은 모두의 가슴속에 여전히 남아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 열정과 이상을, 저는 ‘세상 가장 낮은 곳에 임하겠다는’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내 몸뚱아리 한구석 멀쩡한 곳이라도 남아있다면 그것마저도 기꺼이 나보다 못한 사람들을 위해 내놓겠다**는 사랑과 헌신이, 백만 권의 이론서보다 더 큰 힘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4.

살아있는 열정과 이상을 쏟아 부을 곳 역시 다양하지만 ‘북한민주화’운동도 분명 그 중 하나라는 것을 필자는 확신합니다. 아니, 북한의 민주주의와 변혁을 위해 살고 싸우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절박한 일이 지금 무엇이 있겠는가 반문해 볼 것입니다. 그 중엔 의견이 다른 벗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우회하는 것은, 동지의 허물을 곧 나의 허물이라 생각하며 꾸준히 고쳐주려 애썼던 지난날의 동지애적 자세가 아닙니다.

수백만 인민을 하릴없이 굶어죽게 만들고, 수십만 인민을 수용소에 가둬 짐승보다 못한 삶을 견디게 하고, 수만의 인민이 북풍한설 만주벌판에 유랑걸식 하도록 만든 독재자를 향해 분노와 정의의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면, 우리가 고문과 협박 속에서도 버리지 않았던 지조와 양심이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각기 생활의 현장에서 바쁘다면, 북한의 현실에 애정을 갖고 알아보는 자세라도 갖자고! 조금 다른 실천노선을 갖고 있더라도 김정일 정권의 실체만은 명확히 직시하자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지구 반대편 어느 한구석에 있는 조그만 섬나라라고 하더라도 지금과 같은 인류 최악의 학정(虐政)이 펼쳐지고 있다면 어떻게든 관심을 갖고 참여하는 것이 운동가의 자세 아니냐고! 그것이 오늘 우리가 해야할 ‘살아남은 자의 의무’라고! 하늘이 무너져도 진실의 힘을 믿었던, 이글거리는 5월에 먼저 간 벗들, 살아남은 벗들에게 드리는 편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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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남주의 詩 ‘바람에 지는 풀잎으로 오월을 노래하지 말아라’중에서
** 도종환의 詩 ‘접시꽃 당신’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