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남한 진보주의 지식들의 민족주의적 성향

서구에서 민족주의가 진보주의와 대척점에 서있다면 우리 사회에는 민족주의적 입장을 취하지 않으면 진보파에 끼이기 어려운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다. 물론 모든 진보파 지식인들이 민족주의자라는 것은 아니지만 한국의 진보파 지식인들 사이에 민족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사실이라 하겠다. 한반도의 좌파는 일제시대부터 오랜 세월에 걸쳐 ‘민족적 이익’의 실현을 자기 운동의 중심과제로 삼아왔기 때문에 그 연장선상에서 많은 남한의 좌파 지식인들이 본래 좌파이념과는 대립되는 이러한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고 여기에 이끌려 왔다. 그 결과 남북관계의 문제도 인권과 같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추구해 간다는 차원에서 보지 못하고 ‘민족통일’이나 ‘민족자주’라는 차원에서 바라보는 경향이 강하다. 이러한 민족주의 의식은 북한과 힘을 합하기 위해서는 독재자와도 손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을 당연시하게 만들었다.

이들은 북한사회에 문제가 많든 적든 ‘외세’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남북한의 ‘민족적 대단결’을 위해 북한의 문제점을 덮어주고 무조건 함께 힘을 합해 나가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물론 일반적으로 우익 민족주의자들은 ‘민족의 힘’이나 또는 ‘민족의 영광’과 같은 차별적이고 전근대적인 목표를 추구하기 때문에 사회구성원 한사람 한사람의 인권에는 큰 관심이 없으며, 따라서 북한 주민들의 처지에도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인간의 보편적 가치를 중시하는 진보주의자들이 북한과 관련해서 인권이나 민주주의 같은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민족통일', ‘민족자주' 같은 것의 하위개념으로 간주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민족국가 건설’이란 목표가 어떻게 정치범수용소와 가두처형에 침묵을 지키는 명분이 될 수 있을까? 일본 군국주의와 독일 나치즘의 범죄가 ‘민족’을 인류의 보편적 가치보다 상위에 놓는 논리에 의해 정당화됐다면, 김정일의 ‘민족대단결론' 역시 자기의 범죄적 학정을 호도하기 위한 것에 불과하다. 김정일의 수령숭배 논리가 과거 일본의 천황숭배 논리와 커다란 유사성을 가지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남한의 진보파 지식인들은 이를 간과하고 있다.

글을 마치며

작년 10월 10일에 있었던 북한 노동당 창건 55주년 기념행사에 42명의 남한 민간대표단이 참석했다. 미리 밝혀두지만 필자는 남북간의 인적 교류를 반대하는 입장이 아니다. 필자가 문제의식을 느낀 것은 다른 행사가 아닌 노동당 행사에 남측의 진보파 인사들이 대거 참석했다는 데 있다. 노동당은 북한의 인권유린과 정치적 억압에 책임을 져야 할 북한 사회의 집권당이다. 이 당의 행사에 참여하는 것은 그 당의 정치적 범죄행위에 면죄부를 주거나 적어도 이를 묵인하는 행위로 간주되지 않을 수 없다. 과거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이 행해질 때 세계 각국의 진보주의자들은 남아공의 당시 백인집권당이었던 국민당과 교류하는 정부나 인사들에 대해서 비난의 목소리를 높였었다.

노동당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은 정상회담 이후 남북간의 화해와 단합을 위해서는 북한 집권당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남한의 민간인사들이 노동당 행사에 참석하지 않는다고 해서 남한이 북한을 대화상대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볼 사람은 없다. 북한 노동당조차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현재 남북대화의 주체는 남측 ‘당국’과 북측 ‘당국’이다. 당국차원에서는 어차피 정치적 실체를 가지고 있는 북한과 대화를 진행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정당과의 관계는 다른 문제이다. 어떤 정당과의 교류는 그 정당의 - 인권유린까지를 포함해서 - 정치적 행위를 지지하지는 않더라도 적어도 용인하는 것을 의미한다.

필자는 물론 이 행사에 참석한 사람들이 북한 노동당의 입장을 지지하는 사람들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도 그들은 정말 순수한 의도에서 민족화해에 이바지하려는 생각으로 이 행사에 참석했을 것으로 믿는다. 필자가 지적하려는 것은 다만 그들의 인권문제에 대한 무감각이다. 비록 나치 동조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나치당의 창건을 축하하기 위해 나치행사에 참석한 사람은 나치의 범죄와 관련하여 도덕적 비난을 면할 수 없다. 북한 집권세력의 정치적 범죄는 이미 이에 대한 정치적 판단을 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만큼 알려져 있다. 그런데도 노동당 창건을 축하한다는 것은 의도와는 관계없이 결과적으로 그 당의 범죄행위를 묵인하는 결과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남북대화는 당국간의 대화에만 머물러서는 안되며 민간차원에서의 대화와 화해가 병행되어야 진정한 의미에서의 남북화해가 가능하지 않겠느냐고 항변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래서 남한사회에 북한민주화운동이 필요한 것이다. 남한 민중의 화해상대는 김정일이나 북한 노동당이 아니라 북한 민중이기 때문이다. 북한 노동당은 북한의 ‘민중’을 대표하는 정당이 아니라 잔혹한 독재자의 독재수단일 뿐이다. 노동당 행사 참석은 결코 ‘북한 민중’과의 교류가 될 수 없다.

필자는 진보주의에 냉소적인 입장을 취할 생각은 전혀 없다. 한 사회의 발전을 위해 진보와 보수가 공존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일뿐만 아니라 필수불가결한 일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필자가 우려하는 것은 북한 인권문제를 대하는 우리 사회 진보주의 지식인들의 이중잣대와 무관심이다. 진보파 지식인들이 인권에 대한 이러한 이중기준을 버릴 때라야 우리 사회에서 진정한 진보주의의 개화는 가능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