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닌게 아니라 6·15 남북정상회담 1주년이 다가오는 지금, 한때 고조되었던 남북관계 진전의 기대는 무겁게 가라앉고 있다.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됐던 김정일 위원장의 답방은 시기는 물론 그 성사 여부 자체에 대해서까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또 2월 하순의 2차 경협추진위, 3월 중순의 5차 장관급회담, 4월 초의 적십자회담 등은 모두 북측의 무응답으로 무산되고 말았으며, 정부가 인도주의적 사업으로 역점을 두었던 이산가족 상봉은 3월 15일 남북 300명씩 서신 교환한 것을 끝으로 단절되었다.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도 감감 무소식이다. 작년 6월 하순에 열린 제1차 남북적십자회담에서 남북한은 면회소의 설치·운영에 합의하고 구체적 사항은 “비전향 장기수를 송환하는 즉시" 적십자회담을 열어 협의, 확정키로 했었다. 그러나 비전향 장기수가 송환된 후에도 면회소 설치 문제는 아무런 진전이 없다.

북한의 개혁개방 가능성과 관련하여 주목을 받아왔던 경의선 복원공사도 남측이 9월 연결을 목표로 공사를 본격화한 데 반해, 북한은 지난 해 9월 이후 유지했던 숙영지와 군 병력, 공사 장비를 대부분 철수시켜 경의선 연결공사의 연내완공은 물론 성사 여부조차 불투명하게 되었다. 북측은 공사에 착수하지 않은 것은 물론, 비무장지대(DMZ) 내 지뢰제거 등을 위해 올 2월 남북간에 합의된 'DMZ 공동규칙' 서명마저 미루고 있다.

이러한 교착상황은 남북정상회담 이후 각종 교류·협력의 꾸준한 확대를 통해 안정적인 협력체제를 구축하고 항구적 평화를 실현하겠다는 남측 당국의 구상에 타격을 가하고 있다. 김 대통령의 공개적 촉구는 이러한 교착상태를 타개하려는 의지의 표현으로 생각된다. 5월에 이루어진 대북 비료지원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전개된 상황으로 볼 때 김정일이 선뜻 남측이 내민 손을 잡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남북관계 정돈의 배경

김정일은 5월 초 평양을 방문한 스웨덴의 페르손 총리에게 남북대화가 중단된 것은 미국의 대북한 입장 때문이라는 태도를 취하였다. 북한은 부시 행정부가 들어선 이후 각종 선전매체를 통해 미국이 남북간의 화해와 평화적 통일을 막기 위해 한반도의 긴장을 격화시키고 있다며 비난의 강도를 높여왔다. 이에 따라 남한 내부에서도 현재 남북관계 교착의 주요인을 상호주의와 검증을 강조하는 미국 신행정부의 대북정책 때문으로 간주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그러나 대화에 소극적인 북한의 태도는 미국 신정부의 정책 때문이라기보다는 북한 내적인 요인에 의한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북한은 예전부터 자신들이 필요할 때에는 대화에 응했다가도 더 이상의 진전이 부담스러울 때는 가차없이 이를 중단해온 과거가 있다. 그리고 그 책임을 언제나 상대방에게 전가해 왔다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다.

현재 남북관계의 양상을 이해하려면 작년 5월과 올 1월 두 차례에 걸친 김정일의 중국방문이 갖는 의미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남한의 많은 북한 전문가들은 김정일이 상하이 방문중에 했다는 “상하이는 (개혁개방으로) 천지개벽이 됐다”는 말 한마디에 근거해, 그의 중국 방문이 중국식 개혁개방을 추진하는데 목적이 있다고 추측했지만, 북중정상회담이 갖는 정치적 의미는 그러한 추측과는 거리가 있다.

이 두 차례의 북중정상회담은 중국의 개혁개방 이후 소원해졌던 양국 관계를 과거와 같은 긴밀한 군사·정치적 맹방관계로 복원하는 의미를 갖고 있다. 중국으로서는 자신을 견제하는 미국에 대항하여 중·러·북 3국 사이의 반미연대를 형성할 필요성이 있었고, 북한으로서는 김정일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중국의 도움이 절실했던 터라 중국측의 반미 연합전선에 참여함으로써 그 보호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북한이 중국측의 반미연대에 참여한다는 것은 미국·일본과의 관계개선보다 중국과의 동맹관계를 더 중시한다는 것을 뜻한다. 이는 현재 중국과 긴장관계에 있는 미국·일본과의 관계개선에는 큰 비중을 두지 않겠다는 의사표현에 다름 아니다.

사실상 북중관계 복원의 출발점이었던 작년 5월의 양국 정상회담 시점이 미국에서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기 훨씬 전이었으며, 남북정상회담 직전이었다는 사실은 주목을 요한다. 이는 북한의 대외전략이 부시 행정부의 정책과는 관계없이 수립된 것이며, 남북정상회담도 이러한 커다란 전략의 틀 안에서 추진되었다는 점을 말해주기 때문이다.

김정일의 생존전략과 대남관계의 부담

남한의 많은 전문가들은 김정일의 대중·대남 정상외교를 중국의 지원하에 남한과 관계를 개선하고 남한의 도움을 받아 미·일과 관계개선을 함으로써 개혁개방의 길로 나서기 위한 것으로 단정했다. 그러나 미·일 양국과 중국과의 긴장관계를 감안한다면 북한의 중국 밀착이 미·일과의 관계개선과 병행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올해 새로 들어선 미국과 일본의 신정부가 대북 협상에 냉담한 이유는 근본적으로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이렇게 본다면 김정일이 남북정상회담에 응한 것을 남북관계 개선을 기본 축으로 하여 주변국들과 전방위로 관계를 개선함으로써 개혁개방으로 나아가려는 구상에서 나온 행동으로 보기는 어렵다.

익히 알려진 대로 북한의 정치행위의 가장 상위수준에 있는 목표는 정권과 체제유지이다. 따라서 어떠한 대내외 정책도 이 목적을 위한 것이며, 이에 위배되는 정책은 장기적으로 지속될 수 없다. 경제의 붕괴와 이에 따른 체제이완으로 위기에 처한 김정일로서는 내키지 않더라도 외부의 도움을 필요로 하고 있다. 김정일이 가장 절실히 원하는 것은 물론 경제적 지원이다. 그러나 개혁을 통한 경제재건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형편에 어느 나라가 북한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는가? 이런 조건에서 북한을 지원할 수 있는 나라는 중요한 정치·군사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중국과, 마찬가지의 이해관계와 동족으로서의 일체감을 갖고 있는 남한뿐이다. 그런데 김정일로서는 체제 불안을 초래할 수도 있는 남한이나 미·일에 의존한 개혁개방노선을 택하기보다는, 중국의 보호·지원 아래 제한된 개방을 추진하는 것이 더욱 안전하다는 판단 하에서 중국과의 관계를 우선시하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남한에 대해서는 대북 지원에 적극적인 현 정부 임기 중에 대화에 응함으로써 최대한 많은 지원을 끌어내자는 계산을 했음직하다. 나아가서는 남북관계의 긴장완화 분위기를 조성해 남한과 미국 사이의 관계를 벌여놓으려는 계산도 했을 것이다.

김정일의 대중·대남 정상외교는 이러한 치밀한 계산에서 나온 것이며, 그 결과 중국의 군사적 보호를 확보하는 한편 남한으로부터는 경제적 지원뿐만 아니라 정치외교적 지원까지 얻어내는데 성공했다. 특히 미국에서 부시 행정부가 들어선 후 대북협상 전략이 재검토되면서 북한의 국제적 고립화 조짐이 보이자 남한은 유럽연합과의 수교를 주선하는 등 백방으로 북한의 외교 입지를 강화해주기 위해 노력했다. 만일 유럽에서 인기가 높은 김대중 정부의 이 같은 노력이 없었다면 북한은 지금쯤 외교적 고립상태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주1).

김정일의 서울답방 문제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기타의 당국간 대화에 응하지 않고 있는 북한의 태도는, 이제 이쯤에서 남북관계의 거리를 다시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본 데서 나온 것이다. 김정일로서는 사실 지금까지 남측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것은 거의 다 얻었으며 더 이상 기대할 게 별로 없는 상황이다. 더 이상의 대규모 경제지원은 남한 경제의 어려움 때문에 기대하기 힘들며, 역점을 두었던 전력지원도 남한 여론의 악화와 대북 협상력의 약화를 우려한 미국의 반대로 실현되기 어려운 조건이다. 정치·군사적인 문제에서 남측의 양보도 미중관계를 중심으로 동아시아의 긴장이 높아 가는 조건에서 기대하기 어렵다. 유럽연합과의 수교도 남한의 도움으로 거의 마무리되었다. 이런 조건에서 만일 대화를 지속한다면 이번에는 북한이 남한에게 내놓아야 될 상황이라는 것을 김정일이 모를 리 없다. 남한의 무조건적인 대북 지원은 이제 어렵게 되었으며, 그간 각종 대화에서 북측이 약속했던 조치들을 실천에 옮기지 않는 한 더 이상의 지원은 곤란하다는 여론이 갈수록 힘을 얻고 있다. 이에 따라 북측으로서는 대화의 장에 나올 경우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 경의선 복원, 군사적 신뢰구축을 위한 협의, 납북자와 미귀환 국군포로 송환, 남북 경제협력 관계의 안정적 발전을 위한 제도개혁 등의 문제에 부딪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문제들은 하나 하나가 다 북한 집권층으로서는 체제의 안정과 직결되는 문제들이다. 별로 더 얻을 것도 없는 조건에서 북한이 이러한 문제들의 해결책을 내놓을 이유가 없다. 따라서 김정일로서는 지금 시점에서 남북대화에 나설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김정일로서는 시간을 끌면서 남북대화 중단과 관련하여 남한내에 반미감정이 격화되고 여론이 분열되는 것을 즐길 수 있으며주2) 김대중 정부가 상황타개를 위해 과감한 양보를 결심할 때를 기다릴 수도 있다. 어쨌거나 대화 중단사태가 장기화될수록 우리 정부의 정치적 부담은 커질 것이다.

향후 남북관계의 전망

그렇다고 하여 북한이 정상회담 이후 조성된 남북관계의 해빙분위기를 원점으로 돌려 과거 냉전시절과 같은 적대관계로 몰고 가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 경우 잃을 것이 많기 때문이다. 우선 남한의 대북정책을 원점으로 되돌려 전면적인 지원중단을 초래할 수밖에 없으며, 또 정상회담 이후 개선된 김정일의 대외적 이미지를 악화시켜 대량파괴무기를 둘러싼 미국의 압박을 피하는데 중요한 지렛대가 될 유럽연합과의 관계악화를 피할 수 없게 된다. 남북간의 긴장고조는 북한뿐만 아니라 남한과의 관계에도 신경을 써야할 중국을 곤란하게 만들 것이다. 이런 조건에서 미국의 압박이 강화되면 김정일로서는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렇게 본다면 남북관계는 우리 정부가 획기적인 - 그래서 남측 내에 격렬한 정치공방을 야기할 - 양보안을 내놓기 전에는 개선도 아니고 악화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로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김정일의 서울답방은 그것이 남한 내 정치상황(예컨대 대선 등)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판단할 때 김정일의 결단으로 이루어질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런 식의 답방은 남한 내부의 혼란만 야기할 뿐 장기적인 남북관계의 진전에 큰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더욱 우려되는 점은 이러한 교착상태가 단기적인 것이 아니라 장기적인 것으로 예측된다는 사실이다. 지금까지 북한의 태도로 볼 때 김정일은 미중간의 긴장상태를 이용해 중국의 지원을 이끌어 내고 남한과의 거리를 적당히 조정하면서 한반도의 현상유지를 꾀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 과정에서 북한 내부에 긴장이 높아지든지 남한내 정세가 불안정해지면 모험주의적 행동을 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러한 구도는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한 내부에 고조되었던 남북간의 화해와 협력이라는 기대가 일방적인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더구나 최근 언론에 보도된 북한 숙천군 앞바다의 유전발견이 사실이라면 장기적으로 남북관계의 진전은 더욱 기대하기 힘들어질 것이다. 지금까지 북한이 대남 대화에 나선 근본이유는 경제적 난관 때문이었는데, 석유의 대량생산이 가능하다면 김정일로서는 체제불안의 요인이 될 남한과의 협력에 매달릴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물론 석유의 본격적인 개발을 위해 초기에 남한의 도움이 필요하면 일시적으로 대남화해의 노력을 기울일 수 있지만 그러한 태도는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김정일은 오히려 군사력을 더욱 강화하고 체제 내부 개혁에는 더욱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렇듯 여러 가지 상황을 살펴볼 때 향후 남북관계의 발전이나 북한 내부의 개혁을 낙관할 근거는 별로 없으며, 김정일은 현재의 억압체제를 유지하면서 외교적 줄타기로 생존을 꾀할 가능성이 많다. 북한 주민들의 인권상황 개선을 목표로 삼고 있는 우리가 김정일의 태도변화에 기대를 걸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주1) 이런 점에서 남북대화 중단의 구실을 김대중 정부의 친미정책에 돌리는 북한과 남한내 일부 인사들의 주장은 견강부회(牽强附會)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북한의 이 같은 억지가 김대중 정부의 일관된 대북 협조정책의 기반을 약화시키고 있는 게 현실이다.

주2) 북한이 5월 28일 평양에서 열린 정당·단체 합동회의를 통해 남북정상회담 1주년을 기념하여 남북한과 해외의 각계각층 인사들이 참가하는 민간차원의 ‘민족통일 대토론회’를 금강산에서 개최하기로 했다고 밝힌 것은 이러한 의도를 말해주고 있다. 이는 북한이 남한내의 ‘반미투쟁’을 선동하기 위해 전통적으로 구사해온 통일전선 전술을 여전히 버리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