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새내기와 대한민국 새내기의 만남

필자는 이제 서울 생활이 8개월 째인 ‘서울 새내기’이다. 김성민씨(40세)와 인터뷰를 빙자한 술자리, 혹은 술자리를 빙자한 인터뷰를 하기로 한 날은 5월 24일이었다. 성민씨의 바쁜 일정 때문에 약속시간이 약간 늦춰져 저녁 8시, 신정 ‘무슨’ 역 1번 출구 앞에서 보기로 했다. 몇 가지 일을 마치고 부랴부랴 도착하니 7시 50분.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그러나 10여분을 기다려도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여기가 1번 출구 맞나?’하면서 표지판을 다시 한번 살펴보고 입구 쪽으로 걸어 올라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물끄러미 훑어보기를 다시 10여분. 답답함을 참다못해 그에게 전화를 했다.

“김성민씨, 지금 오고 계세요?”라고 물으려는 순간, 그가 먼저 내게 물었다. “이제야 오셨습니까?” 앗,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여기서 기다린 게 몇 분 짼데 이제야 오셨냐니…. 무언가 엇갈렸다는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지금 1번 출구 앞에서 손 흔들고 있는데 안보이세요?” 손을 흔들긴…, 내가 1번 출구 앞을 이리도 꿋꿋이 지키고 서있는데 말이다. “‘신정역’ 1번 출구 맞아요?” “신정역이라뇨! 저는 지금 신정네거리역에 있는데.”

서로가 몰랐다. 필자는 신정네거리역이 있는지 몰랐고, 성민씨는 신정역이 있는지 몰랐고. 하긴 신정 ‘무슨’ 역 앞에서 보자고 이야기한 것 같긴 한데, 아직도 이북 사투리가 많이 섞여 있으니 그와 통화하면 70% 정도만 알아들을 수 있다.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할 때는 다시 되묻고 하면서 어느 정도 대화가 되는데 전화통화를 할 때는 사람들이 말소리를 잘못 알아들어 통역자(?)에게 대신 전화해 줄 것을 부탁한다고 한다. 그는 아직 “대한민국 새내기”인 것이다.

어쩌겠는가. 다시 지하철 노선도를 살펴보고 신정네거리 역으로 달려갔다. 그래서 8시에 보기로 한 약속이 8시 50분에야 이루어졌다. 서울 새내기와 대한민국 새내기가 빚어낸 조그만 해프닝이었다.

누구나 ‘처음’은 이렇게 어색한 실수의 연발로 채워지리라. 때로는 웃음거리가 되기도 하고 간혹 큰 잘못을 하여 손가락질을 받을 때도 있겠지만, 실수를 두려워 않고 ‘그래, 나는 처음이다’라는 당당함으로 맞설 때 튼튼히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겠지. 그리고 주위에서 이러한 어색함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주고 관심과 애정의 촉촉한 단비가 되어 줄 때 더욱 빨리 이겨낼 수 있으리라. 이 모든 것이, 언젠가는, 성장을 위한 통과의례로 기억될 것이다. 남한땅에 살아가는 탈북인들의 삶이 바로 이렇지 않을까?

함께 어울리다 보면 자연히 북한을 알 수 있을 것

지난 4월 22일 동국대학교 운동장에서는 <백두한라회>라는 단체의 창립선언이 있었다. 지금까지 가입한 회원 숫자는 100여명. 이중 40여명의 고향은 북한 땅에 있고 60여명의 고향은 남한 땅에 있다. 회원들의 나이는 20대 초반에서 30대 후반까지. 탈북 청년들과 남한 청년들의 역사상 첫 대중조직이라 할만하다. 성민씨는 이 단체의 초대 회장을 맡고 있다.

<백두한라회>가 어떠한 단체인지는 창립선언문에 그 의지가 잘 나타나 있지만 가장 잘 아는 방법은 역시 ‘모임’에 한 번 나가보는 것이다. 남북의 청년들이 한 자리에 모여 격식 없이 나누는 대화 속에 남한 청년은 북한의 현실을 알고, 북한 청년들은 남한생활의 생경함과 외로움을 잊는다. 창립대회 날에는 축구, 줄다리기, 통일열차달리기 등의 놀이를 하며 즐거운 한때를 보냈다. 이러한 백두한라회의 모습을 두고 많은 언론들은 ‘정치색을 배제한 단체’임을 유난히 강조했다. 그러나 성민씨는 조용한 웃음을 지으며 이에 대답한다.

“김정일에 대한 원한을 뼛속 깊이 갖고 있는 우리들이 함께 하는 단체에 어떻게 정치색이 없을 수 있습니까. 다만 너무 드러내놓고 가입단계에서부터 거부감을 갖게 하는 단체보다는 남북 청년들이 자연스럽게 함께 하는 과정에서 북한의 실상을 이야기할 수 있겠다, 하는 생각에서 ‘순수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이렇게 ‘마당 넓고 문턱 낮은’ 단체를 표방한 백두한라회에는 정말 다양한 청년들이 포진해 있다. 탈북인들로부터 많은 배움의 기회를 가져야 할 북한학과 학생들은 물론이고, 리포트 제출을 위해 우연히 들른 학생, 각종 운동단체에서 일하는 간부, 물론 그냥 호기심에서 찾아온 사람도 있다. 탈북인들도 작가, 회사원, 시민단체 간사, 연구원, 대학생 등 다양하다.

<백두한라회>가 정기적으로 하려는 일 중 하나는 ‘봉사활동’. 고아원이나 양로원 등에서 남북청년들이 함께 땀흘리며 배우는 소중한 계기들을 만들어갈 예정이다. 지난 5월 5일에는 남북어린이 어깨동무 행사에서 자원봉사 활동을 하였고 5월 19일에는 탈북난민돕기 시민걷기대회에 참여하였다. 6월에도 봉사활동을 준비중이다.

평양출신 인민군 대위의 우연한(?) 탈북기

성민씨의 고향은 평양이다. 하지만 태어난 곳은 자강도 희천시. 김일성 종합대학 교수이던 아버지가 1959년 혁명화대상으로 숙청되어 ‘유배지’로 간 곳이 희천이었다. 그곳에서 성민씨가 태어났고 2살 때 다시 평양으로 돌아왔다. 성민씨의 아버지는 조선작가동맹 초대 시분과위원장을 지낸 북한내 핵심 인텔리 중 한 분이었다.

그래서일까? 시인의 아들답게 성민씨도 글을 잘 쓴다. 1995년 10월 첫 탈북 이후 중국에 머물면서 성민씨는 재중탈북난민의 삶과 북한의 처참한 실정을 적어 남한 언론에 보내는 일을 해왔다. 여러 가지 경로를 거쳐 모 월간지에 성민씨의 글이 도착하였고 그의 생생한 증언은 많은 이들의 관심을 모았다. 1999년에 성민씨가 한국에 도착하자 “야, 그 가명(假名)의 사나이가 바로 당신이었어?”하며 반가워했단다. 지금도 성민씨는 중앙대 대학원에서 문예창작을 전공하고 있으며 사회교육방송 등에 북한관련 방송원고를 쓰고 있다. 또 케이블 방송 K-TV의 “서울말, 평양말”이라는 프로그램의 아나운서로 200회가 넘게 고정출연하고 있다. 성민씨의 잘생긴 얼굴을 보고 싶으신 분은 이 방송을 시청하시면 된다.

대동문인민학교, 련광고등중학교 등 평양에서 초중등학교를 마친 성민씨는 1978년부터 10년 동안 군대생활을 했다. 그리고 1988년 북한의 사범대학 중 최고로 꼽히는 김형직사범대학에 입학, 1991년에 졸업하자마자 다시 군대로 불려갔다. 인민군 문예창작실에 뽑혀 들어간 것. 여기서 4년 동안 그는 선전대 작가 생활을 했다. 남한식으로 하면 ‘심리전 부대’에서 근무한 것이다.

“탈북자라고 하면 모두가 북한에서 무슨 죄를 짓고 어쩔 수 없으니까 탈출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굳이 부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죄를 지었다면 지었다고 볼 수도 있지요.” 성민씨의 말이다. 그럼 성민씨가 지은 죄(?)는 뭘까? 어찌 보면 인생이란 우연히 계기하나로 확연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성민씨의 탈북과정에서도 엿볼 수 있다.

1995년 10월에 첫 탈북을 할 때만 해도 성민씨는 정말 충실한 ‘당(黨)의 전사’였다고 한다. 북한의 일반적 당원들이 그렇듯이 외부세계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원래 모든 세상은 이렇다는 것이 탈북 이전 그가 알고 있던 ‘북한 사회’였다.

선전대 작가를 하던 어느 날 부대에 배치받은지 얼마 되지 않은 ‘신참’이 그에게 입맛 당기는 제안을 했다. 당시 다른 선전부대에는 재일교포들이 지원한 일제 음악장비가 대부분 지급되어 있었는데 성민씨가 있는 부대는 비밀부대라 여전히 국산 음악장비를 쓰고 있었다. 성민씨의 표현으로는, 일제는 “빵빵빵”이라면 북한제는 “삑삑삑” 수준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녀석이 “나는 함흥소년궁전 출신인데 그곳에 일제 악기들이 가득하다. 거기서 악기 몇 개를 훔쳐 올 수 있다”고 넌지시 유혹했다. 문예와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에겐 당연히 좋은 악기가 탐이 나는 법. “그래? 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하라우. 그런데 일단 가져올 바에야 몽땅 가져오는 게 낫지 않간?”

급기야 부대장에게까지 보고를 해서 은밀히 트럭을 보내 일제 악기를 한 차 가득 실어 오기로 했다(북한에서 군인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흔한 일이라 한다). 하지만 아뿔싸. 싣고 오는 과정에 ‘도적질’이 들통이 났고 결국 거사(?)를 계획했던 모든 사람들은 파면, 철직 당할 위기에 처했다. 징계에 회부되자 모두 도망갈 계획을 세웠다. 미국으로 가자, 일본으로 가자, 중국으로 가자, 온갖 나라의 이름이 다 나왔다. 이 사건에 엮어졌던 다른 사람들의 소식은 알 길이 없지만 하여튼 성민씨는 먼 친적이라도 있는 중국이 좋을 것 같아 밤중에 강을 건넜다.

비바(viva), 백두한라회!

1996년 2월 성민씨는 중국에서 잡혀 대련감옥에서 40일을 보냈다. 그리고 도문수용소로 압송, 거기서 다시 1주일을 보내고 온성감옥으로 옮겨져 8일간 갇혀 있은 후 최종적으로 평양에 있는 보위사령부로 끌려가고 있었다. 평양에 가면 그에게 기다려지는 것은 ‘죽음’뿐이었다. 그래서 끌려가던 중 기차에서 뛰어내려 1주일간 숨어 다니며 다시 중국쪽으로 북상했다고 한다.

성민씨는 이 기간, 자신도 그 사회에 속해있었지만 그닥 관심이 없었던 북한사회의 내면모습을 새롭게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열차 지붕 위까지 사람들이 가득 차 떨어져 죽으면서도 기차는 달리는데, 야 그것 참 심난하더만….” ‘원래 이 사회가 이런 사회였나’하는 생각을 하게 만들던, 정말 북한을 새로 알게 된 일주일이었다고 한다.

그 뒤로 중국 땅을 떠돌며 지냈다. 빌어먹고 훔쳐먹고…. 다행히 한 목사님을 만나 성민씨는 비밀리에 머물 곳을 찾았고, 넓은 세상의 소식을 더 많이 알게 되었다. ‘조선이 세계의 전부’라고 그동안 얼마나 속아 지내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 인민을 굶겨 죽이는 권력자는 사라져야 한다는 생각도 굳게 갖게 되었다. 그리고 1999년 3월 한국땅을 밟았다.

처음에는 조그만 해프닝도 있었다. ‘인민군 대위’라는 자신의 계급을 정보기관 등에서 믿지 않았던 것. 성민씨의 나이에 인민군 대위라면 상당히 놓은 계급이다. 거기에 선전대 작가인데다 평양출신이면서 뭐가 아쉬워 탈북을 했느냐는 것. “괜찮으니 솔직히 말하라”고 자꾸 되묻는데 ‘참 미칠 지경’이었다고 한다. 북한의 군사계급에는 ‘편제 군사칭호’라는 것이 있다. 군경력에 상관없이 일정한 부서에 있으면 거기에 맞는 계급을 부여한다는 것. 예를 들어 군의관이면 대위이고 정보 관련 직책이면 소좌가 되는 식이다. 며칠 간 이것을 해명하는 데만 애를 먹었다. “내 뒤로 며칠 후에 나보다 더 어린 소좌 한 명이 또 탈북을 했는데, 그 사람은 나 때문에 곤욕을 덜 치렀지." 지금은 지나간 에피소드쯤으로 성민씨가 웃으며 들려주는 이야기이다.

성민씨는 중국에서 숨어살던 시절 자신을 보살펴주는 조선족 여성과 결혼하여 예쁜 딸 하나를 낳았다. 딸 이름은 예림이. 입국절차가 까다로워 시간을 끌다 지난 해 11월에야 처와 예림이를 한국으로 불러 올 수 있었다. 지금 성민씨네 세 식구는 서울의 한 아파트에서 다정하게 살고 있다. 한국에 와 삼촌을 찾을 수 있었던 것도 성민씨의 큰 기쁜 중 하나이다.

이 인터뷰 기사를 마무리하는 즈음 성민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여전히 그의 목소리는 밝고 활기차다. 회원 모임 날짜와 장소를 그는 일일이 전화로 알려주었다. 그를 만나본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처럼 성민씨는 잘생긴 얼굴만큼이나 따뜻한 마음을 가졌다. 혹자는 남한에서 그 정도 생활하고 있으면 그냥 가만히 있지 또 뭘 한다고 그러느냐고 만류한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냥 제 한 목숨 살자고 사선을 넘어 남한에 온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 성민씨의 대답이다. 목숨 값을 다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남한에 와 제 역할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탈북청년들을 보면 성민씨는 무척이나 안타깝다고 한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여유 있는 사람들이 끌어 주고 함께 하면서, 또 서로 부딪히는 과정을 통해 이해하고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면서, 낯선 땅에서 이방인이 아닌 ‘주인’으로 커나가는 조직, 이런 생각으로 만들어진 것이 백두한라회다. 여전히 가슴 뜨겁게 ‘북한을 사랑하는’ 조직 - 백두한라회! “화이팅”하며 나아갈수록 분단의 모래시계도 뒤집어지리라. 백두한라회 가입을 원하시거나, 활동을 엿보실 분은 홈페이지(www.baikhan.com)를 찾기 바란다. 모두가 환영이다.

백두한라회 출범 선언문

조국의 푸른 하늘을 닮은 남과 북의 젊은이들, 계절보다 먼저 피운 마음 속, 사랑과 우정의 꽃을 안고 4월의 출범을 기다린 우리는 통일을 위한 만남과 화합의 장인 “백두한라회”의 탄생을 자랑스럽게 선포한다.
서로 다른 정견과 신앙을 가진 우리들은 이름도 고향도 성별도 다르지만 이제 분단 반세기의 벽을 허무는 통일 1세대가 되었음을 소리 높이 자랑한다.
우리의 공간에 더 이상 남과 북은 없으며 통일을 향해 손을 맞잡은 커다란 “우리”가 있을 뿐이다. 우리는 뜨겁게 맞잡은 젊음의 손을 통일의 그 날까지 놓지 않을 것이며 진정한 남북화합의 초석이 될 것을 맹세한다.
자유와 민주의 소중함을 목숨으로 깨달은 우리들은 북녘의 부모형제 자매들의 불행을 언제나 잊지 않을 것이며 진실된 북한 현실의 전달자, 자유민주주의의 전파자가 될 것이다.
또한 우리는 사랑과 봉사를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는 이 땅의 젊은이답게 우리를 필요로 하는 곳에 언제나 달려갈 것이며 사랑과 열정과 정성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남북 젊음의 힘찬 대오 “백두한라회”의 깃발은 올랐다.
지금은 비록 작은 보폭일지라도 통일의 장도를 향한 “백두한라회”는 깃발을 올렸고 자유통일의 그 날까지 힘차게 나아갈 것을 맹세하며 뜻있는 모든 이들의 동참을 호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