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노동당 국제담당비서였고 북한의 최고 학부인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을 지냈으며, 최고인민회의 의장을 11년 간이나 역임하였던 황장엽씨가 대한민국으로 망명한지 벌써 4년이 지났다. 김일성의 사상담당 비서로서 수십 년간 각종 문헌과 연설문 등을 대필해 왔고 주체사상의 철학적 기반을 제공한 학자로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그의 망명은 ‘주체사상의 망명’으로 불리었고, 역대 최고위층의 망명이기에 일부에서는 “이제 북한의 붕괴는 시간문제”라고 떠들썩했다. 황장엽씨 역시 “김정일 정권은 2~3년 내에 붕괴될 것”이라고 장담하곤 했다.

그러나 4년이 지난 지금, 이러한 예측은 실현되지 않았다. 황장엽씨의 생각이 잘못됐던 것일까? 최근에 그를 만나고 온 사람에 따르면 황씨는 “망명당시 ‘북한의 실정만을 놓고 볼 때' 이른 시일 내에 붕괴될 것이라는 자신의 예측은 정확했다”고 말했다 한다. “하지만 남한의 실정을 오판했다. 우리는 남한을 너무도 모르고 왔다”는 게 이어지는 설명이다. ‘남한을 너무도 모르고 왔다’, 이것은 또 무슨 말일까?

아마도 그는 북한의 최고위층이었던 자신이 남한으로 망명하여 김정일 정권의 악랄함을 증언하고 북한민주화의 필요성을 이야기하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믿고 지지해 줄 것이라 생각하였나 보다. 나아가 북한의 인권상황과 정권의 학정에 대한 국제사회의 규탄도 뒤따를 것이고 결국 최악의 위기 국면에 몰려 있던 김정일 정권은 어떠한 방법으로 건 빠른 시일 내에 붕괴될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이 망명 당시 그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남한 사람들은 황장엽씨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일단 남한사람들은 ‘북한실정’에 그렇게 관심이 많지 않았고, “설마 그곳도 사람 사는 곳인데, 황장엽씨의 증언이 너무 과장되지 않나” 하는 의심이 많았다. 남한 내에 친(親)김정일세력이 강하게 형성되어 있다는 것도 황씨가 간과한 부분이다. 남한에 오면 북한민주화운동의 튼튼한 근거지를 곧바로 만들 수 있을 것이란 그의 생각은 너무도 순진한 생각이었으며, 정말 ‘오판’이었다.

북한이 과연 주체사상의 나라인가

지난 4월 22일 서울대학교에서는 <주체사상 토론회>라는 행사가 총학생회 주최로 열렸다. 일단 북한을 알고자 하는 학생들의 의지와 열정은 칭찬해 주고 싶다. 그러나 북한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체사상을 먼저 알아야 한다는 뜻으로 마련한 행사인 듯 한데, 주체사상을 북한 체제 이해의 키워드로 생각한 것은 학생들이 북한을 너무도 모르고 기획한 ‘정말 순진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이 행사에 참가한 패널들의 발제문을 보아도 주체사상을 민족주의, 수령관과 동일하게 간주하고 있는데, 이러한 것은 그냥 민족주의이고 수령절대주의 일뿐 주체사상과는 전혀 인연이 없는 이물질(異物質)들이다.

주체사상은 원래 사람이 세계의 주인이고 세계의 변화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인간중심의 세계관에 기반하여 탄생하였다. 그런데 이것이 김일성과 김정일의 필요에 따라 왜곡되면서 여기에 ‘반미주의', ‘수령론', ‘프롤레타리아 독재론', ‘자립적 민족경제론' 등 온갖 이물질이 섞이기 시작하였다. 결국 현재 북한의 주체사상이라는 것은 중심기둥은 사라진 채 전혀 논리적 상관관계가 없는 곁가지들이 오히려 중심을 차지하고 앉은 주객전도(主客顚倒)의 ‘사쿠라 주체사상’일 뿐이다. 이미 사람중심의 세계관은 찾아 볼 수도 없고 정권유지의 선전도구로만 전락한지 오래인데 이것을 두고 ‘주체사상' 토론회라니! 특히 그것을 북한이해의 키워드로 착각하다니! 황장엽의 망명이후 북한에서는 이제 주체사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도 않고 오로지 김정일의 ‘붉은기 사상’이라는 것만 남아 있을 뿐이다.

학생들이 정말 북한사회를 이해하고 싶었으면 주체사상의 핵심적 원리를 중심으로 북한에서 살다온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서 이북의 현실을 면밀히 분석해 보는 방법이 좋았을 것이다. 사람이 모든 것의 주인으로 되고 있는지, 모든 사회운영에 있어서 결정적 역할을 하고 있는지, 인민들은 그 주체사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예를 들어 70년대 한국사회를 이해하려 한다면 아마도 학생들은 정부문서보관소에서 새마을운동과 국토개발 5개년 계획 관련 문헌을 뒤적거리기보다는 당시 노동현장, 농촌현실을 겪었던 사람들의 증언을 더 중시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북한사회를 이해하려면 김정일의 통치이데올로기로 전락한 가짜 주체사상에 현혹될 것이 아니라 북한에서 수십 년간 살다온 사람을 앞에 앉혀 놓고 심금을 터놓고 그의 진실성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방법이 아니었을까? 최고학부 지성인쯤 되면 그가 거짓을 말하는지 진실을 말하는지 금방 알 수 있을 것 아닌가. 학생들은 자료집에서 “이북동포의 삶을 이해하는 것은 한시라도 급한 일이며, 통일의 문을 여는 열쇠”라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금번 주체사상 토론회는 이북동포의 삶과는 너무도 무관했다.

들리는 바에 의하면 서울대학교 학생들은 주체사상토론회에 참석할 것을 여러 사람들에게 요청했는데, 이중 사정상 거절한 사람들의 명단을 공개하면서 ‘용기없는 사람’, ‘주체사상도 잘 모르면서 북한체제를 비난해 온 사람’이라고 했다 한다. 노력하고 예상한 만큼 행사준비가 만족스럽지 못해 실망하였을 학생들의 마음은 깊이 이해가 되지만, 그렇다고 행사 초청에 응하지 않은 패널의 명단을 공개하며 그에게 반론권을 주어 줄 수 없는 상태에서 비난하는 것은 행사주최자로서 기본적인 예의조차 갖추지 못한 행동이다. 서울대 총학생회가 초청한다고 무조건 가야하는 법은 없지 않은가. 이렇게 자신들의 뜻에 따르지 않는다고 원색적인 용어를 섞어 가며 비난하는 태도는 한국사회의 미래를 이끌어갈 인재들답지 않은 독선이다.

한국에서는 어쨌든 이렇게 ‘주체사상 토론회’가 열렸다. 자, 그럼 북한 대학생들이 이러한 주체사상 토론회를 마련할 수 있을까? 어떤 사상이든 반론이나 의문이 제기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북한사람 모두가 100% 주체사상을 이해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며, 속마음으로라도 의문을 품고 있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북한에서 수령론에 대해서, 자립적 민족경제노선의 문제점에 대해서 의문을 갖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이것을 제기하고 토론할 수 있는 자유가 보장되어 있는가? 이러한 자유마저 없는데 어떻게 북한이 ‘주체사상의 나라’라는 말인가.

김정남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최근의 교육문제와 관련해 어느 단체가 마련한 토론회가 있었다. 토론 후반부에 질의 응답 시간이 있었는데 참석자중 한 명이 질문도중 “(북한이) 미국과 배짱 좋게 싸우는 과정에도 대학까지 무상의무교육을 실시하고 교육에 대해 전폭적인 지원을 하고 있는 나라 아니냐”며 북한의 공교육체제에 대해 자신이 알고 있던 바를 잠깐 곁들였다. 이분은 현직 교사이다.

또 서울대 총학생회의 주체사상 토론회에 참석한 한 발표자는 발제문에 자신이 잠깐 방문하고 온 북한의 모습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다. “병역법(강제 징집)이 없는 나라요, 체벌을 가하는 교사가 무능한 교사로 혹독하게 비판받고, 세금이 없는 나라, 광산노동자가 의사와 똑같이 월급을 받는 나라,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을 방문했을 때 대중적 토론을 통해서 김대통령의 방북의 의의를 토론하고 여기에 의거해서 자율적으로 환영나온 40만 평양시민들이 있는 나라를 함부로 쉽게 독재국가라 할 수 있겠는가? 부자가 연이어 권력을 장악한다 해서 그 현상만 가지고 세습체제라 할 수 있겠는가?"

원문(原文) 그대로 옮긴 것이다. 거기다 그는 수백만의 북한 인민들이 굶어죽은 95년 전후의 식량난 시기에 대해 “이왕 고생하는 거 웃으면서 고생하자고 해서 춤과 노래가 고난의 행군시기에 더 늘었다”고 덧붙이고 있다. 나아가 “평양시민을 포함해서 지도자와 대중 가릴 것 없이 2천만 동포들이 1년 가까이 밥을 한끼 밖에 먹지 않고 고통분담을 확실히 하면서 버티어 냈다”고 ‘들은 바’를 이야기한다. 최근 김정남이 나리타공항을 통해 밀입국하다 잡혔을 때, 그의 손목에 둘러진 최고급 롤렉스시계와 아내가 들고 있던 루이 비통 핸드백, 여행 가방에 가득한 달러 뭉치 소식을 들으며 그는 대체 어떠한 표정을 지었을까?

이 사람의 발제문 내용을 몇몇 탈북인들에게 들려주었더니 “한 3년만 살다오라고 해보라”고 이야기하며 씁쓸하게 웃었다. 북한에 대해 너무도 모르고 이야기하는 위 내용들에 대해 하나하나 자세히 설명해 주고 싶지만 지면관계상 생략하고, 흔히들 북한은 세금 없는 나라라고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북한 사람의 증언 하나만 소개해 보자.

“세금이랑 있는데 세금이라기 보다도.... ‘북조선에서는 세금이란 말이 없어진지 오래다' 이렇게 말하기 때문에 세금이라는 말은 안 쓰는데, 우리 수령님의 탄생일을 맞이하여 무슨 꽃송이를 만든다 하면 ‘꽃송이 얼마요’라고 제해 내버리고, 또 잔칫집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잔칫집에 얼마, 같은 직장인의 결혼식 부조에 얼마 냈다고 뚝 잘라 버린다. 이런 것은 작업반에서 알아서 공제한다. 어린이 보조금이라는 것도 있다. 로임공제는 의무적이다. 한 달마다 항상 공제하는 게 있다. 그런 보조금을 얼마 했다고 투투둑 짜르면 한 그저 80~90원을 쥔다. 어찌나 공제하는게 많은지 어떤 때는 크다만(커다란) 종이 1장이 보조금 내용으로 다 찰 때도 있었다.”

‘민족화해’를 한다는 명목아래 독재정권의 선전만을 무작정 믿으면서 덮어놓고 좋게만 보는 외눈박이가 되고, 북한을 잘 아는 듯 그런 이야기만 되풀이하는 앵무새가 될 것이 아니라, 북한에서 오랜 세월 살다온 사람들의 증언 역시 귀담아 들으면서 이북의 현실을 정확히 알려고 하는 ‘열린 자세’부터 먼저 필요한 것 같다. 봄날의 들풀처럼 많은 이 증언들을 꼼꼼히 살펴보는 그런 열의조차 없이 어찌 북한을 이해하고 있다고 말 할 수 있는가.

“도저히 내 말은 믿으려 하지 않기 때문에 이제 북한에 대한 이야기는 하고 싶지도 않고 그냥 연예인 이야기, 직장생활 이야기나 한다." 남한 청년들과 친해지고 싶어 근처에 있는 청년회에 가입하러 찾아갔던 어느 탈북인이 푸념처럼 털어놓는 이야기다.

김정일의 시간이 24시간이라면 그중 12시간은…

흔히들 컴퓨터를 잘 다루지 못하는 사람을 가리켜 ‘컴맹’이라고 부른다. 컴퓨터에 있어 맹인(盲人)이라는 뜻이다. 지금은 컴퓨터 사용이 편해져서 웬만한 사람들은 인터넷 등을 다룰 수 있고 예전과 같은 의미의 컴맹은 많이 사라졌지만, 386, 486 컴퓨터가 주류를 이루던 시절만 해도 컴맹이 많았다. 당시 컴맹은 크게 세부류로 나눠 볼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관리자형 컴맹이다. 컴퓨터는 워드프로세서로 문서작성하고 계산이나 하는 기계쯤으로 알고, 그런 것은 ‘아래 직원들이 하는 것’이라며 자신은 굳이 컴퓨터를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경우이다. 회사의 부장급, 과장급 직원 중에 이런 분들이 많았는데, 컴퓨터를 모르면 생활에 큰 어려움이 있을 정도로 세상이 변해가니 그때서야 이런 분들은 뒤늦게 컴퓨터 학원으로 향해야 했다.

둘째는 포기형 혹은 무관심형 컴맹이다. 자신은 원래 기계를 다루는데 익숙하지 못하니 배워봤자 안 될 것이라고 처음부터 컴퓨터에 관심을 갖지 않거나, 조금 배우다가 포기한 경우이다. 이런 컴맹이 늘어난 데에는 이른바 ‘컴퓨터를 좀 안다는 사람’들의 잘못도 있었다. 즐겁고 유용하게 배울 수 있는 것부터 가르쳐 주면 될텐데 CPU가 어떠니, 메모리가 어떠니 하면서 어려운 말만 해대니 지레 겁을 먹을 수밖에. 이런 부류의 컴맹들은 컴퓨터 사용법이 점차 쉬워지면서, 혹시 상당한 공부와 노력 끝에 컴맹의 늪을 탈출했다.

그리고 셋째는 그리 흔한 경우는 아니지만 적극적 컴맹이다. 아예 기계문명 자체를 거부하고 지금껏 이메일 주소조차 갖고 있지 않은 부류인데 어쩌면 유유자적(?)한 삶을 살고 있다고 좋게 볼 수도 있지만, 특별히 연락할 방법이 없을 때는 주위 사람들을 무척 답답하게 만든다.

북한문제에 관련해서도 북맹(北盲)들이 많다. 북한에 대한 정보가 통제되어 있던 시절에는 ‘알 수 없어' 북맹이 된 경우가 많았다. 당시에는 북한을 맹목적으로 따르던 북맹보다는 이북에는 뿔 달린 도깨비나 돼지들만 살고 있다고 진짜로 믿는 북맹이 많았다. 반공교육에 의해 생긴 ‘똘이장군형 북맹’들이다. 이러한 북맹이 늘어난 데는 북한에 대한 정보를 통제하고 반공을 권력유지의 수단으로 삼았던 과거 한국의 군사정권 탓도 있다.

역으로 지금은 북한정권의 선전과 평양의 겉모습은 잘 믿으면서 북한에서 살다온 사람들의 증언은 구시대의 유물쯤으로 생각하는 ‘예전과 완전히 반대 모습의’ 북맹들이 많다. 나아가 일부 정치인이나 사회단체 활동가들 중에는 정치적 흐름에 영합하면서 ‘의도적으로' 북맹이 되어버린 경우마저 있다. 이러한 형태의 북맹은 또 무슨 형(型)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어야 하나.

감았던 눈, 혹은 정반대로 돌려버린 눈을 뜨고 이제 제대로 보는 훈련을 해야 한다. 수십 년간 그곳에서 살다 온 사람들의 목소리를 먼저 듣지 않으면 대체 누구의 말을 믿는가? 차분하게 귀기울이며 분석할 의지가 없는 걸까, 시간이 없는 걸까, 아니면 그만한 능력이 없는 걸까. ‘김정일의 북한’에는 민주주의와 인권에 대한 기본적이고 천부적인 잣대를 대지 않아도 될 무슨 특별한 자격이나 권리라도 있단 말인가? 이러니 황장엽씨가 “남한을 오판했다”고 말하는 것이 당연하다.

어느 탈북인이 남한의 현실을 보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 “김정일 독재의 시간이 24시간이라면 그 중 12시간은 남한 운동권이 만들어준 것”이라고. 북한에 민주적인 정권이 들어서 북한 주민 모두에게 외부 세계가 열리는 날, 우리 모두는 이러한 원망을 또 듣게 되지나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