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의 편지: 부끄러운 '1위'를 벗어나는 '힘'
1.

지금 세상 한편에는 강냉이 죽 한 그릇을 먹지 못해 굶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바로 그 밑에 있는 나라에서는 하루에도 수만 톤씩 발생하는 음식물 쓰레기 처리문제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또 어느 나라에서는 ‘동물 학대’를 하지 말자는 시위가 벌어지고 있는 반면, 어느 나라에서는 권력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인간 학살’에도 저항할 수 없습니다. 어느 나라에선 포르노 배우가 섹스의 자유를 주장하며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반면, 어느 나라에서는 선거에 입후보(立候補)하고 자신이 원하는 사람에게 투표를 할 자유마저 보장되어 있지 못합니다. 아니, ‘자유선거하자’는 말을 하기만 해도 목숨을 부지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어느 나라에서는 폭탄테러로 수백 명의 무고한 목숨을 죽게 만든 범법자에 대해 그에게도 생명권이 있다며 인권운동가들이 사형반대 시위를 벌이고 있는데, 바로 그 시각 어느 나라에서는 중세에나 있을 법한 화형(火刑)이 수백 명의 인민들이 바라보는 앞에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세상은 이렇게 ‘슬픈' 요지경입니다. 분명히 똑같은 한 시대를 살아가는데 지구 이 편과 저 편, 도시 이 쪽과 저 쪽의 살아가는 모습이 천지차이로 다르니 말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비(非)동시적 사실의 동시적 공존’이라고 합니다. 살아가는 연도는 모두가 2001년인데, 2020년의 꿈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18세기의 사고를 강요당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러한 비극을 극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나라가 바로 ‘북한’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긴 북한은 그들만의 ‘주체연호’를 쓰고 있으니 살아가는 시대도 다른 셈이군요.

2.

유럽의 대표적인 퀄리티 페이퍼로 세계 148개국에서 구독되고 있는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자이퉁’(FAZ)지는 지난 6월 27일자 기사에서 “북한으로의 여행은 ‘과거로의 여행’”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베이징에서 평양까지는 비행기로 1시간 남짓 걸리지만 평양에 도착할 즈음에는 족히 20년 세월은 되돌려 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참 그럴듯한 표현이라고 고개를 끄덕였지만, 문득 너무도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시사주간지 뉴스위크는 7월 9일자 특집기사를 통해 억압과 빈곤이라는 기준에 따라 ‘세계 최악의 국가(The Worst Countries in the World)’ 10개국을 선정했습니다. 그 중 북한은 1위에 꼽혔습니다. 뉴스위크는 이 기사에서 “북한은 주민들의 목숨을 파리보다 못하게 여기는 ‘위대한 지도자’를 숭배하도록 강요하는 거대한 강제수용소(Gulag)이며, 북한 인민에게는 먹을 것도, 문화도, 미래도, 과거도 없이 참을 수 없는 현재만 있을 뿐”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변명할 여지없이 정확한 지적이지만 그렇다고 그냥 고개를 끄덕이기엔 이 역시 너무도 슬픈 표현입니다.

‘비동시적 사실의 동시적 공존’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는 ‘역사의 압축’이라는 표현을 쓰곤 합니다. 절대적 동일 시대를 살면서도 상대적 후진국으로 뒤쳐져 있던 나라들이 앞서간 나라들을 따라 잡으려면 다른 나라가 100년 동안 이룬 일을 10년 내에 이루어 내야 하는 것을 두고 ‘역사의 압축’이라고 합니다. 성적이 열등한 학생이 뒤늦게 공부를 시작하려면 남들보다 두세배는 더 많은 노력을 투자해야 하듯이 말입니다.

한국의 70∼80년대는 이런 역사의 압축을 경험한 시대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역사의 압축은 상당한 희생과 고통을 필요로 하며, 마치 쌩하며 날아가는 타임머신처럼 사람들의 가치관을 혼란스럽게 합니다. 한국인의 빨리빨리 의식, 박정희 논쟁, 기형적인 좌우 대립의 모습, 민주화운동의 성과와 문제점 등도 역사의 압축이 가져온 값비싼 대가의 현상들입니다.

그리고 북한을 생각합니다. ‘과거로의 여행’이라 불리는 북한, ‘세계 최악의 국가’라 불리는 북한을 ‘민주화’한다는 것은 얼마나 엄청난 역사의 압축을 필요로 할까요!

3.

얼마전에 한 TV 드라마에서 탈북인이 싱크대에 머리를 감는 장면이 우스갯거리로 방영되자 “우리를 무슨 미개인으로 아느냐”는 탈북인들의 거센 항의가 이어졌습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어차피 허구적인 드라마의 한 에피소드일 뿐인데 뭐 그리 예민해 할까’ 생각되었지만 이 사건은 중요한 시사점 하나를 던져줍니다. 그들은 자존심이 대단합니다. 북한에 대한 애정 역시 대단합니다. 탈북인들은 김정일 정권이 미워 북한을 떠난 것이지 북한사람들이 싫어 북한을 떠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탈북인 뿐만 아니라 모든 북한사람의 심정일 것입니다.

북한민주화운동을 몰(沒)이해 하는 사람 중엔 우리의 운동을 ‘미개한 사람들을 일깨우는 운동’ 쯤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김정일 정권이 둘러 친 높은 장벽에 가로막혀 국제사회의 흐름을 전혀 알지 못하고 객관적 물질환경의 혜택을 덜 받았을 뿐이지 북한 사람들은 미개인이 아닙니다. 북한에 미개인이 있다면 자신의 몰락을 예감하지 못하고 여전히 ‘내가 바로 조국이다’라고 외치는 김정일뿐입니다. 그래서 북한민주화운동은 남한이나 국제사회가 주체가 되고 북한 인민들이 객체가 되어 ‘북한 인민을 끄집어내는’ 운동이 아니라, 당연히 북한 인민이 주체가 되어 ‘주인으로 일어서는’ 운동입니다. 지금은 북한의 상황이 대단히 열악하기 때문에 남한의 북한민주화운동세력이 중심적인 역할을 차지하고 있지만 이는 차차 변해갈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북한의 붕괴를 바란다고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북한이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역사의 압축’이 빚어낼 충격과 혼란은 사회의 변화를 자체적으로 추동해 나갈 내부세력이 튼튼히 갖춰져 있을 때 최소화될 수 있습니다. 식량과 물자를 지원하고 자꾸 외부세계와의 접촉기회를 열어주다 보면 북한 내에 자생적인 민주화운동세력이 자라나겠지만, 지속적으로 북한민주화 문제를 제시해주는 ‘방향타’가 있을 때 더 크고 더 올바르게 자라날 수 있습니다. 역량은 투쟁 속에 자라는 법입니다.

4.

이번 호『Keys』는 다른 때보다 조금 두껍습니다. 일단 우리 친구이고 동생인 길수와 그가족들이 우리 곁으로 다가온 역사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 북한 정부는 외무성 대변인라는 유령 인물의 발표 형태를 통해 “세계 도처에서 확대되고 있는 수백만 명에 달하는 진짜 피난민들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돌리지 않고 일심단결된 우리나라와 관련한 범상한 문제에 대해서만은 그 무슨 큰 사건처럼 떠들어 대고 있다”고 비난했습니다. 정말 ‘미개한’ 발언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럼 세계 도처에 흩어져 사는 민족이 많고 많은데 무엇하러 통일을 하자는 것입니까. 그리고 어찌 탈북인의 문제가 ‘범상한’ 문제입니까. 세상에 먹을 것을 찾아 국경을 넘었다고 철사줄로 코를 꿰어 끌고 가는 그런 범상한 나라가 어디 있단 말입니까. 지하 감옥에서 패 죽이는 나라는 또 어디에 있습니까. 썩은 사상이 담긴 머리를 먼저 없애야 한다고 이마에 총질을 하는 나라는 도대체 어디에 있습니까.

김정일의 전처 성혜림의 언니인 성혜랑이 쓴 『등나무집』에 대한 서평도 이번호 『Keys』에서 읽을만한 내용입니다. 조선조 양반가문의 외아들로 태어난 한 남자와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동경유학까지 마친 한 신식여성이 만민평등의 사회주의에 대한 이상을 품고 북으로 넘어가 겪은, 그리고 그 일가족이 겪은 너무도 소설 같은 이야기는 파란 많은 한국현대사의 한 페이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순진한 이 부부는 죽을 때까지도 “그래도 이것이 수령님의 책임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합니다. 이러한 사람이 어디 한두 명이었겠습니까. 지금도 북한에는 이러한 생각을 가진 수백만의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이들의 책임이 아니라, 이들을 가둔 ‘수령의 책임’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깨달은 북한 사람들의 대열이 점점 늘어나고 있습니다.

FAZ지는 기사에서 “북한은 외부 세계의 진실을 영원히 감추고 있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번호 『Keys』에는 탈북인 유지성씨가 김정일에게 보내는 편지가 있습니다. 유지성씨는 김정일에게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하며 부패한 권력은 필연적으로 타도되고야 만다.” 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백번 지당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