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도 기구한 한 가족의 운명

성혜랑의 수기 『등나무집』을 덮으며 ‘어찌 이리 파란 많은 집안이 있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내내 답답한 마음을 떨칠 수 없었다. 이 책의 표지에는 이러한 소개 글이 쓰여 있다. “조선조 명문 가문의 3대 독자인 아버지와 동경유학생 어머니가 공산당원이 되면서 여동생은 북한 최고 권력자의 전처로 그의 아들을 낳았고, 자신의 딸은 서방으로 탈출하여 타국을 떠돌아야 하고, 그녀의 아들은 남한에서 피살되는 분단이 빚어낸 3대에 걸친 슬픈 가족사” 이것으로도 충분한 표현이 되리라.

얼마 전 위조여권을 소지한 채 나리타공항을 통해 일본에 입국하려다 체포되어 세계 언론의 화제를 모았던 김정일의 아들 ‘김정남’을 중심으로 이 가족을 소개해 보자. 옆 사진에 앉아 있는 소년이 바로 어린 시절의 김정남이다. 오늘 소개할 책 『등나무집』을 쓴 성혜랑은 김정남의 이모로, 김정일 뒤편에 서있는 사람이다. 그는 지금 ‘서방의 어느 나라’라고만 알려진 곳에 망명하여 살고 있다. 그 옆에 서있는 소녀는 성혜랑의 딸인 이남옥. 그녀 역시 어머니와 함께 망명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김정남에게는 이종사촌누나가 되겠다. 그리고 가장 오른편에 서있는 사람은 김정남의 이종사촌형이 되는 성혜랑의 아들 이일남 - 남한에는 ‘이한영’으로 알려진 인물이다. 이한영은 김정일과 가족, 측근들의 생활을 적나라하게 폭로한 책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잠행 14년』(동아일보사)을 쓴 인물로, 97년 2월 15일 집을 나서다 북한공작원으로 추정되는 괴한들의 총에 살해되었다. 사진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김정남의 어머니는 성혜림으로, 성혜림은 성혜랑의 동생이다.

김정남의 외할머니 즉 김정일의 장모는 ‘김원주’로, 이 책 『등나무집』의 제1편은 성혜랑의 수기가 아닌 김원주의 수기로 시작한다. 김원주는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악착같이 공부를 해 일제시대 최고의 엘리트 과정이라 할 수 있는 동경 유학까지 마쳤다. 해방 후에는 좌익진영에 가담, 1948년 남북연석회의에 조선부녀총동맹의 남쪽대표단으로 참가하기도 한 김원주는 50년대에 노동신문의 유일한 여성편집원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딸 혜림이 김정일과 함께 살고 아들 김정남을 낳으면서 그녀의 운명도 달라졌다. 김정남이 태어난 이후 김원주는 김정일 관저에 머물면서 죽을 때까지 그곳에서 김정남을 돌본다.

김정남의 외할아버지 즉 김정일의 장인은 ‘성유경’으로, 그는 경상남도에서 부자, 양반집안으로 이름난 창녕 성씨집안의 4대 독자이다. 부족함 없이 자랐던 그는 도쿄에서 우연히 일본의 사회주의자 다카스 세이토의 연설을 듣고 반해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해방 후 갖고 있던 땅을 소작인들에게 모두 나누어주고 전쟁 중 월북하였으나 ‘남조선 출신’에다 직설적인 성격 탓에 궂은 일만 하다가 82년에 사망하였다. 성유경은 죽는 순간까지 자신의 딸이 김정일과 결혼하였는지, 자신에게 외손주가 있는지도 모르고 죽었다.

이렇게 대강 가족들을 소개하였으나, 살펴볼수록 참으로 기구하다는 생각이 든다. 자기 자식이 누구와 살고 있는지도 모르고 죽은 아버지, 김정일의 관저에 갇혀있다시피 하면서 인생말년을 외손주를 키우는데 고스란히 바친 할머니, 덩달아 갇혀 있게 된 딸과 손자, 손녀…. 누구는 죽고, 누구는 망명하고, 정신병원을 왔다 갔다 하고, 누구는 피살되고, 또 누구는 공항에서 체포되어 신문의 1면을 장식하고…. 정말 어찌 이리도 박복한 집안이 있을까.

『등나무집』 내용의 진실성

이 책을 읽는 포인트는 크게 세 가지가 있을 것 같다. 먼저 우리는 김원주의 수기인 1편과 성혜랑의 회고부분인 2, 3편을 통해 해방 후 북한사회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해방이후 북한사회는 이른바 ‘사회주의 건설기’라고 한다. 연도로는 1945년 해방부터 1960년대 말까지를 이르는 때로, 김정일이 정치의 전면에 나서지 않고 김일성의 활동력이 왕성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의 북한에 대해서는 그간 여러 회고록, 수기 등을 통해 증언된 바 있다. 이 증언들은 상당히 극단적인 반대양상을 띌 수 있는데, 하나는 1960년대까지 북한에서 생활하던 중 남파되었다가 체포된 장기수들이 쓴 수기이고 다른 하나는 북한체제에 반대하여 탈출한 사람들의 수기이기 때문이다.

전자(前者)의 대표적인 책으로는 해방 이후 남로당 활동 5년과 전쟁 3년을 포함하여 북에서 20년 간 생활했던 남파공작원 김진계(1991년 타계)씨의 구술을 소설 형식으로 정리한 『조국』(풀빛)과 최근에 출판된 책으로 50년대 북한에서 정치보위부 과장으로 일하다 공작원으로 남파, 체포된 김석형(2000년 9월 북송)씨의 구술을 옮긴 『나는 조선노동당원이오!』(선인)가 있다. 그리고 후자(後者)의 경우는 1997년에 한국으로 망명한 전 조선노동당 사상담당비서 황장엽씨의 회고록 『나는 역사의 진리를 보았다』(한울)와 전 조선노동당 중앙위원, 평양시당위원장 고봉기의 유서라고 소개되어 있는 『조선노동당원의 육필수기』(시민사회) 등이 있다. 전자의 경우는 북한체제에 충성을 맹세했고 죽는 순간까지 그 뜻을 굽히지 않았던 사람들의 증언이기 때문에 상당히 미화(美化)하고 있다는 의심을 받을 수 있다. 역으로 후자는 북한체제에 대단히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탈출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다분히 감정적인 내용이 섞이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김원주와 성혜랑의 수기는 특별히 과장하거나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보이지 않는다. 일단 김원주의 경우는 그가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해 쓴 수기가 아니고, 이번에 출판된 부분도 성혜랑이 탈출할 당시 갖고 나온 부분이기 때문이 김원주의 기억이 잘못된 경우, 혹은 잘못된 주관이 개입된 경우가 아니라면 99% 사실이라도 해도 좋을 것이다. 성혜랑이 쓰고 있는 2, 3편도 거짓을 담고 있다고 보기는 힘들다. 무엇보다 그가 굳이 거짓을 이야기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성혜랑이 남한행을 위해 거짓을 이야기할 이유도 없고, 또 전반적인 책의 내용을 보건대 성혜랑은 남한행을 원하는 것 같지도 않다. 아들 이한영을 언급하는 부분에서는 어머니된 감정으로 약간 격앙된 문투가 느껴지기도 하지만, 전반적인 글의 느낌은 ‘누가 믿든 안믿든’ 자기 가족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서술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특히 지금 성혜랑의 입장에서는 아직도 북한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동생 성혜림의 안전을 생각해서라도 북한체제의 부정적인 면을 축소했으면 했지 과장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포인트 1 - 사회주의 건설기 북한사회 엿보기

성혜랑은 이렇듯 ‘담담하게’ 썼을 뿐이지만 여기에는 북한사회의 여러 단면이 녹아 있다. 우리는 먼저 해방이후 북한사회(남한의 좌익까지 포함하여)가 대단한 활력을 띠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북한정권 수립 초기에는 강압과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스스로의 적극성과 열정에 의해 사회가 발전해왔다는 것이다. 극도로 궁핍한 삶을 살던 식민지 시절의 하층민들에게 ‘만인이 평등하게 살 수 있다’는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은 얼마나 고맙고도 희망찬 메시지였을까.

“어머니는 노년에 일생에 제일 행복했던 시기가 서울에서 좌익운동할 때였다고 말했다.”(119페이지)

“김장군을 만난 우리 아버지의 소감은 만족한 것이었다. 아버지에 따르면, 그는 젊었으나 인품이 있고 통일전선 정책에 의해 광범한 민중을 단합시켜 민주 조국 건설을 추진할 노선을 가지고 있었다.” (123페이지)

“… 어머니께서는 자신의 눈으로 보고 체험을 통해 정확히 이해하고 계셨다. 해방 후 남조선의 좌익세력, 그것은 진보적인 세력이며 애국세력이었다고. 사회주의가 좌절되고 공산주의가 웃음거리가 되건 말건 어머니의 견해에는 변함이 없으셨다.” (159페이지)

“… 1500리 후퇴의 길 전 과정에 ‘북으로 가는’ 모든 사람에게는 잠자리와 끼니가 무상으로 제공되었다. … 50년도에 이미 북의 체제는 완전한 조직력을 가지고 인민을 단합시키고 있었다.” (212페이지)

“가열찬 전쟁, 어려운 생활조건이 그런 도덕적 해이를 허용하지 못했다고 볼 수 있으나 무엇보다 우리를 순화한 것은 사상일치와 정신적 통일의 우애심이었다. 그 당시에도 그랬고 한 생을 다 살고 지금 돌이켜 보아도 백송리(김일성종합대학이 전쟁중 자리잡고 있던 곳 - 편집자 주)의 대학생활은 손색없는 훌륭한 것이었다.”(241페이지)

그러나 이런 감상적인 긍지와 추억을 덮어버리는 ‘그 이후의’ 삶에 대해 성혜랑은 또한 증언하고 있다. 이젠 논란의 가치도 없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성혜랑은 한국전쟁이 북한의 선제공격으로 인한 남침이었음을, 그 기간에 대한 회고를 통해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

“별빛 아래서 대열이 편성되었다. 총이 배당되고 주먹밥이 손에 쥐여지고 군복은 없었다. 노래 노래로 이어지는 낮과 밤, 비상의 흥분 속에 대기의 시간이 흘렀다. 드디어 6·25전쟁 발발 소식을 들으셨다.”(172페이지)

“이론적으로는 전쟁의 성격은 누가 먼저 전쟁을 일으켰는가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전쟁이 누구를 위해 진행되는가에 따라 규정된다는 마르크스-레닌주의 학설이 가르쳤고 ‘공자의 말씀’에도 있다는 것이 수령님의 기준이었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그 전쟁이 잘못 타산된 전쟁이며 민족의 앞날에 끼칠 그 전쟁의 후과를 너무 경솔히 무시한 수령의 오류를 그때 누가 감히 생각이나 할 수 있었으랴.” (199페이지)

성혜랑의 가족사에 걸쳐 전반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감정은 아버지 성유경이 지주집안 출신이며 남조선 출신이라는 이유로, 온 가족이 능력보다는 ‘성분’에 의해 인생이 결정된 사실에 대한 한탄과 분노의 마음이다. 꼭 개인적 감정이 아니더라도 성혜랑은 ‘계급투쟁’이라는 미명하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고, 남조선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차별을 받고, 끌려갔는지 생생하게 들려주고 있다.

“좌익운동이 이런 상하가 있고 종주가 있다는 것이 나는 의심스러웠다. 우리 세상(빨갱이 세상)이 오면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칭찬을 받으며 떠받들릴 것이라고 그동안 생각해오던 것이 흔들렸다. 우리는 새세상의 주인이 아니구나.” (178페이지)

“대학에도 연루자 색출의 선풍이 불어 남조선에서 좌익투쟁을 한 적지 않은 남반부 출신들이 추방되었다. 예과에 같이 있던 황하일, 이소남(이태준1)의 딸), 조병량(조두원의 딸)이가 없어졌다. 남반부 출신들은 서로 말도 주고 받지 못했다. 내통한다고 감시당하고 이 투쟁을 의심한다고 감투(누명)를 씌웠다.” (246페이지)

“과학원에서 8월 종파 투쟁 대상이 된 것은 평소에 아첨할 줄 모르고 자기 주장을 하던 학자, 성분이 나쁜 사람, 낡은 인텔리(일제시기 교육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들에 대한 죄목이나 비판거리는 반정부 음모와 하등의 인연이 있을 리 없고 ‘반김일성’과도 결부시킬 수 없었다.”

『등나무집』에 나오는 여러 일화 중 이런 이야기도 있다. 성혜랑의 오빠 성일기는 일본에서 태어났는데 자식을 키우다 돈이 없으니 아버지 성유경이 돈을 구하러 고향에 다녀왔다고 한다. 애지중지하는 아들이기 때문에 행여 긴 여행 중 탈이 날까봐 큰맘먹고 비행기를 탔나본데, “1930년대 초 서울과 일본을 비행기로 왕래하던 사람이 얼마나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그 비행기 밑에서 찍은 사진 때문에 30년후 평양에서 나의 부모는 ‘죽을 뻔’했다. 일제 때 비행기를 타고 다닌 부르주아라고 간첩보다 더한 증오로 규탄을 받은 것이다”라고 성혜랑은 증언하고 있다.

한국전쟁시기 상당수의 지식인, 예술가들이 사회주의적 이상을 안고 스스로 북행(北行)을 택하거나 납북되었다. 『등나무집』에는 그들 대다수가 간첩, 반당(反黨) 자유주의자로 낙인찍혀 비극적인 최후를 맞는 과정에 대해서도 몇 개의 일화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북조선을 믿고 왔던 사람들, 문화의 대군단은 어떻게 되었는가. 슬프고 한스러운 그들의 운명은 계급투쟁이라는 이름으로 대부분 소멸되고 불과 소수의 사람들이 남아 있다.”(227페이지)

“50년대가 지나고 시간이 갈수록 계급투쟁은 심화되었다. ‘회의’라는 소리에 사람들은 미쳐 죽을 지경이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회의’가 있었는데 때도 없이 계획도 없이 ‘모입시다!’ 하고는 시간의 제한 없이 정치일꾼들이 ‘연설’을 한다. 때문에 그날 일을 마치기 위해서는 밤 1시고 2시고 새벽까지 작업시간을 연장해야 한다.” (290페이지)

성혜랑은 이 모든 숙청과 학살, 이른바 ‘계급투쟁’이 수령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졌고 모두 좌경주의자들의 과오라는 북한의 주장에 대해서도 일침을 놓는다.

“‘짚신감발에 괴나리봇짐을 지고 당을 따라 수천 리 길을 걸어온 남반부 출신’을 아껴야 한다는 수령님의 교시가 나왔을 때(연대를 잊었다) 순진한 우리 인민은, 특히 남반부 출신들은 눈물을 흘리며 ‘어버이 수령님의 현명한 영도’에 감격했다. 이런 교시에도 불구하고 남한 출신에 대한 숙청이 단행되자, 아래 단위(중간급 간부)에서 좌경적 계급주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떠돌았다. 나의 부모도 ‘그분은 이런 실정을 모를거야’ 오래도록 믿고 있었다. 그러면 그 전면적이고 철두철미한 장기간에 걸친 숙청을 누가 했단 말인가? 북조선의 50년 역사에서 잘못된 정책, 가혹한 계급주의는 다 나쁜 놈들, 반당종파주의자들이 했고 언제나 ‘수령님의 교시를 왜곡’했다고 되어있다.” (249페이지)

‘이상한’ 사회주의 나라가 되어가는 과정

이 책을 읽는 두 번째 포인트는 김정일이 정치 일선에 모습을 드러낸 1970년 전후의 상황과, 딱 그 시점부터 김정일 관저에 함께 살며 20년 간 김정일을 ‘한 집에서’ 지켜본 성혜랑의 증언을 통해 여러 가지 ‘김정일 스토리’를 감상하는 것이다.

성혜랑의 1970년대 회상은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4기 15차 전원회의에서 발표된 5·25교시에서 시작한다. 5·25 교시이후 북한에서는 수령의 노작, 체제 찬양 이외의 모든 책들은 사라졌고, 과학·기술·음악·미술 등 사회 전분야에서 대대적인 숙청과 말살작업이 이루어 졌다. 당시 발표된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은 현재 북한인민들을 옥죄는 최고의 폭압장치 중의 하나이다.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은 김정일의 작품으로, 이때부터 김정일은 ‘수령검(劍)’을 휘두르며 급부상, 당의 전권을 장악해간다. 모든 탈북인들이 “이 시기부터 북한은 ‘추락’하기 시작했다”고 입을 모으고 있고, 성혜랑 역시 이를 정확히 짚고 있다. 내용이 조금 길지만 성혜랑의 목소리를 그대로 옮겨 보자.

“북조선 역사사전에는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4기 15차 전원회의가 빠져 있다. 이것이 1967년 5·25 교시가 나온 전원회의다. 그 회의가 사전에조차 올리지 않은 비밀회의였다는 것을 나는 오래도록 모르고 있었다. … 5·25 교시는 누가 숙청되었다는 것보다 반수정주의 투쟁이라는 대선풍 아래 대대적인 인텔리 제거, 그들의 창조물인 문화에 대한 총공격, 좌경극단주의에 의한 반문화 혁명으로 기억한다”

“북조선 사람들은 모두가 ‘60년대까지는 살기 좋았다’고 말한다. 정확히 말한다면 5·25 교시 전까지는 북조선은 그래도 사회주의 인민의 나라였다. 그러나 5·25 교시를 계기로 계급투쟁과 프로(프롤레타리아 - 편집자 주)독재의 강화, 수령우상화의 심화, 인텔리 혁명화를 몰아치는 가운데 사회 전반에 극좌적인 바람이 불어닥쳤다. 사람들은 더 말을 못하고 근심에 싸여 서로 쳐다보기만 하였다. … 나에게 가장 큰 의문을 던진 것은 책의 말살이었다.”

“이것에 저촉되는 모든 것을 먹으로 칠하거나 페이지를 뜯어내거나 종이 딱지를 붙이는 작업이었다. 그 작업의 막대함은 둘째치고 내용의 규제가 문제다. 수령의 우상화를 위해 역사를 뜯어고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부드러운 문구’까지 지웠다.”

“직장마다 제지공장으로 실려나가는 책이 산더미처럼 쌓였는데 한마디로 그것은 거의 대부분이 양서였다. 남은 것은 체제와 수령 찬양의 정치서적, 그리고 수령님 노작과 교시집이었다. 전쟁 때 나는 미국 비행기가 손바닥만한 도시에 하루에 수백 개의 폭탄을 던진 때도 이런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공포를 느껴본 일이 없었다.”

이 얼마나 잔혹한 현대판 ‘분서갱유’인가. 진시황이 지하에서 부러워할 일이다. 성혜랑은 이러한 70년대에 대해 “중국의 문화혁명을 방불케 하는 반문화혁명의 결과로 북조선은 무지의 왕국, ‘세계에서 가장 살기좋은 사회주의 낙원’이 되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어지는 증언을 더 들어보자.

“… 10대 원칙 암송이라는 도저히 적응할 수 없는 규율에 암담했던 기억이 잊히지 않는다. … 40, 50 머리가 흰 사람들까지 10대 원칙을 외워야 하는데, 노력을 들여도 되지 않는 것이 연령으로 인한 기억력의 쇠퇴였다. 누가 이런 암기법을 제창했는지 그 무지하고 몰상식한 요구는 참기 힘들었다.”

“지난날 인민은 김일성 주석의 업적에 의해 수령을 따르고 떠받들어 왔다. 김일성 주석은 항일무장 투쟁을 했고 50년 동안 반제의 기치하에 미제를 필두로 하는 … 그것이면 됐지 왜 수령을 구태여 신으로 만들려 했으며 그 자신 그것을 허용했던가.”

“이때부터 우리는 초상휘장을 가슴에 ‘모시고’ 친위대, 결사대 구호를 부르며 각종 우상화 예식을 가지게 되었다. 그때까지 써본 일 없는(옛날에는 종교적 표현으로 금기시 되었던) 신앙심이라는 말이 충성심 대신 쓰이게 되었고 언제부터인가 충효, 군신, 의리 같은 낱말이 당적 용어가 되는 이상한 사회주의 나라가 되었다.”

성혜랑은 저명한 미술사학자 김용준의 죽음에 대해서도 회상하고 있다. 유홍준 교수의 『북한문화유산답사기』에 ‘아직도 많은 남한 학자들이 김용준의 학설을 따르고 있다’는 내용을 읽고 “감개무량했다”는 성혜랑은, 김용준과 같은 아파트에 사는 관계로 자주 볼 수 있었고 무척 존경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문제는 파지(破紙)를 수거할 때 노동신문을 내놓은 것에서 발생하였다. 유일사상체계 10대원칙 3조에 의해, 북한에서 노동신문을 내놓을 때 수령의 사진 등은 오려 놓고 내놓아야하는데, 그는 이 ‘엄청난 일’을 깜빡했다. 결국 그깟 사진 하나가 유능한 사학자 한 명의 목숨과 바뀐 것이다.

포인트 2 - 가장 가까이에서 본 김정일

“그때 벌써 농촌은 물자 고갈로 입을 것, 신을 것이 없었다”고 회고하고 있는 1970년대 중반, 성혜랑은 조카 김정남의 교육을 위해 ‘가정교사’로 김정일 관저 생활을 시작한다. 『등나무집』의 제4편 “울타리 안에서”는 관저생활을 시작한 1976년부터 1996년 망명 때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관저생활의 세세한 모습은 이한영의 수기에서 이미 소개된 바 있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생략하도록 한다. 다만 성혜랑이 새롭게 증언하고 있는 김정일의 몇 가지 면모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

『등나무집』에서 느껴지는 성혜랑의 김정일에 대한 감정에는 ‘연민(憐愍)’이 짙게 깔려 있는 것 같다. 성혜랑은 젊은 시절의 김정일을 이야기하면서 ‘왕자’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이 성혜랑 개인이 만들어낸 표현인지 아니면 당시 북한의 인텔리들이 흔히 사용하던 은어(隱語)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성혜랑은, 김정일의 개인적 성격을 ‘외롭게 자란 왕자’의 그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수상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에 어머니를 잃고 외롭게 자란 왕자, 평양시내를 오토바이로 질주하던 폭주족(?) 왕자, 위아래 없이 자란 환경 때문에 거칠 것 없는 성격을 소유하게 된 왕자, 외로움을 달래려 음악과 영화에 빠졌고 이러한 예술적 감성이 때론 자상함으로 때론 포악함으로 나타나는 왕자….

성혜림의 언니여서 주관적 판단이 개입되었을 수 있지만, 성혜랑은 “김정일의 연인이자 안식처는 성혜림뿐”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성혜림의 미모에 끌리기도 했겠지만, 자신보다 나이가 많아 어머니 같은 느낌을 갖게 되었을 것이고, 같이 예술을 사랑했으며, 감성이 통했다는 것이다. 성혜림 일가와의 관계를 둘러싼 여러 가지 정황과 사건들을 놓고 볼 때 틀린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또 김정일은, 아들에게는 무척 자상한 아버지였던 것 같다.

“그들(김정일과 성혜림 - 편집자 주)은 둘이 무척 잘 맞는 짝이었다. 만약 그들이 정상적인 쌍이었다면 깨 쏟아지게 재미있게 살았을 것이다. 그들은 동질의 감성, 예술적 센스, 기지로 손뼉이 딱 맞아떨어지는 교감으로 재미있어 죽는 친구 같았다.” (377페이지)

“혜림이 순안 비행장에 도착할 때, 떠날 때 김정일 비서는 아무리 ‘먼 곳’에 가 있었어도 비행장에 나가 맞이했고 바래다주었다. 순안 비행장 특별 대기실 옆에 차를 세우고 기다리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그가 외롭고 불쌍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꼈다.” (395페이지)

“김정일 비서는 이렇게 자라고 있는 아들이 애처러워서 자기 힘 자라는껏 아들을 위한 것이라면 그 무엇도 아끼지 않았다. 김정일 비서는 이 세상의 어느 아버지보다도 아들을 사랑하였다. 아버지가 아들을 저토록 사랑할수 있을까 놀라웠다. “ (383페이지)

“그(김정일)의 장점에 속하는 너그러움, 남을 좋게 대해주고 싶어하는 선심, 인정 깊음은 그의 타고난 성격, 혈통에 속한다고 본다. 그를 나쁜 인간으로 보게 하는 과격함, 까다로움 등은 후천적 성격이라고 나는 보았다. 무제한 권력, 비교육, 어머니의 부재, 그 사회의 권위주의가 만든 성격이다. 이렇게 상반되는 성격은 그에게서 종잡기 힘든 난해한 기질로 표현되기도 한다.”

이렇게 김정일을 너무 사적인 영역으로만 평가하는 것에 대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나 생각하는 독자들이 있을 수 있다. 이에 대해 성혜랑은 “등나무집, 우리 가정의 역사를 쓰면서 우리 생활에 한 때 어울렸던 인간 김정일이라는 한계를 넘지 않은 것은 나의 제한성이기도 하다”라고 스스로 밝히고 있다.

여기서 잠깐 생각해 볼 사실은 김정남의 어린 시절은 김정일의 어린 시절보다 더욱 외로웠다는 것이다. 성혜랑은 “종적 인간관계 밖에 체험하지 못한 정남에게는 횡적교제가 불가능했다”고 어린 시절의 김정남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최근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현재 북한에서는 김정남의 이복동생인 김정철이 오히려 후계자로 부각되고 있다는데, 이러한 소문의 사실여부는 확인할 수 없으나 아무튼 김정남은 그의 아버지보다 훨씬 더 극단적 감성을 갖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그가 청년기를 넘어서면서 어떠한 변화의 과정을 겪었는지는 모르지만 김정일이 김정남을 정치적 후계자로 지목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을 것으로 보인다.

또 한가지 눈여겨볼 점이 있다. 김정일은 최은희, 신상옥을 대단히 신뢰했다는 것 같다. 김정일은 최은희, 신상옥에게 막대한 자금을 쥐어 주고 각종 소품이나 자료와 관련해서도 직접 뛰어 다니며 도움을 준 것으로 보인다. 『등나무집』에도 여러 차례 최은희, 신상옥과 관련된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최은희가 김정일의 관저에서 술에 취해 감히 김경희(김정일의 동생)를 밀쳐 냈다든지, 김정일이 신상옥이 부탁한 책을 찾기 위해 서재를 뒤지고, 최은희를 위해 자료를 구하는 모습 등 말이다. 재미있는 건 주위에서 김정일에게 ‘그 사람들 뛰면(달아나면) 어쩔거냐’는 우려에 김정일이 “뛰긴 왜 뛰어. 저희가 어딜 가면 여기만큼 대우받겠다구. 돈 걱정 없이 맘대로 영화를 만들지 않나”라고 대답하는 부분이다. 성혜랑은 이에 대해 “자본주의 사회에서 늙어온 그들(최은희, 신상옥)에게 북조선이 어떤 숨막히는 곳인지를 그(김정일)는 상상도 못했다”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돈이나 명예,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자유’의 소중함을 김정일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결국 최은희, 신상옥은 ‘뛰었다’.

포인트 3 - 이한영의 수기와 비교해보기

성혜랑의 수기 『등나무집』을 읽는 세 번째 포인트는 1996년에 출판된 성혜랑의 아들 이한영(본명 이일남)의 수기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잠행 14년』과 비교하면서 읽는 것이다. 『Keys』는 2000년 4월호(통권 2호)에 <사라진 사람과 잊혀진 책>이라는 제목으로 이한영의 수기를 소개한바 있다. 그후에도 몇 번에 걸쳐 『Keys』는 이한영의 증언이 갖는 사료적 가치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그런데 문제는 친북적인 시각에 사로잡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한영의 이 증언들을 믿지 않는다는 점이다. 심지어는 이한영의 이 책을 거의 대부분 날조된 ‘쓰레기’ 정도로 취급하는 경향도 있다. 이한영의 증언이 너무도 거대(?)해서 믿지 않으려는 사람들은, “이한영이 금전적 대가를 바라고 ‘소설’을 썼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금전적 대가를 바랬다는 것은 이한영의 수기에도 솔직하게 나와있는 사실이다. 당시 그의 상황을 보건대 일면 이해가 된다. 그러나 이한영이 금전적 대가를 바랬다는 것과, 그것을 위해 ‘거짓을 꾸미는 것’은 갈라 보아야 한다. 10여 년 간 침묵해 왔던 것을 주머니 사정이 어려워지니까 풀어놓는다고 비난한다면 몰라도 (물론 이 역시 이한영의 귀순 당시 상황을 볼 때 비난거리가 되지 못한다), 금전적 대가를 바란다고 무조건 거짓을 말하는 것이라고 볼 수 없다. 한국의 정보기관 조사관들이 ‘과연 그럴까’ 의심할 정도로 엄청난 사실들을 이한영은, 성혜랑의 수기와 마찬가지로 ‘누가 믿든 말든’ 이야기하고 있다. 물론 이한영이 규모나 액수 등을 과장했을 수 있지만, 남한에서 오랜 시간 살아온 그가 ‘그렇게 엄청나면 사람들이 오히려 믿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뻔히 알고 있을 텐데 거기에 대한 별다른 설명도 없이 ‘줄기차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감언이설로 속이고자 했으면 그렇게 쓰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다.

심각한 경우는 이한영이 김정일의 처조카라는 사실조차 부정하고, 그가 김정일 관저에 살았다는 사실자체를 부정하는 경우이다. 어떤 이유에선지 모르지만 이한영의 증언을 자꾸 부정하려고 하는 대표적인 두 사례를 살펴보자. 이한영의 어머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등장하여 자신의 수기마저 냈으니 말이다. 이 두 사례는 월간 『말』과 김대중 대통령이 책의 내용을 칭찬했다는 『곁에서 본 김정일』이다.

월간 『말』 1998년 7월호에는 <조선일보를 말한다>라는 제목의 특집이 실렸다. 다섯 개의 기사로 나누어진 이 특집에는 “조선일보의 세계적 오보, 성혜림 망명사건은 없었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있다. 이글은 당시 한국역사연구회 연구원이며 현재 『민족21』 기자인 김지형씨가 쓴 글이다. 먼저 확실히 해둘 것은, 『Keys』는 조선일보의 오보를 비판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본다. 어느 신문이 되었든 오보를 내면 기자의 객관성이나 신중성에 대해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김지형씨가 조선일보의 오보를 비판하면서 그 중 1996년 ‘성혜림 망명 보도’를 예로 든 것은 좋았으나, 그는 내용의 대부분을 이한영의 증언을 비난하는데 할애하면서 오히려 더 엄청난 오보를 내놓고 있다.

먼저 김지형씨는 성혜림 망명 보도가 오보였음을 이야기하면서 이한영의 동생 이남옥이 미국 언론들과 인터뷰한 내용을 유독 강조하고 있다. 성혜랑과 이한영이 전화통화하는 중에 나타난 이남옥의 ‘평양 거주 사실’과 이남옥이 주장하는 명망 시점이 맞지 않다는 것이다. 김지형씨가 이번에 『등나무집』을 읽어 봤다면 이 의문은 이미 풀렸을 것이니 자세히 언급하지 않겠다. 그러나 한가지만 이야기하자면 이남옥의 망명시점이 맞지 않은 것이 무슨 대단한 오보이며, 이것이 이한영 증언의 사실성을 의심할만한 단서라도 되단 말인가.

성혜림이 왜 망명하지 않았는지, 그리고 김지형씨가 의문을 품고 있는 성혜랑의 망명과정에 대해서도 『등나무집』을 통해 충분히 이해가 됐을 것이다. 김지형씨는 성혜랑의 망명에 안기부가 개입되어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설령 안기부가 개입되어 있다고 해도 그래서 어쨌다는 것인가. 김지형씨는 성혜랑까지도 “가짜일 가능성”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나아가 “이한영은 호위사령부 경비병 출신”이라는 상상력의 비약을 보여주고 있다. 이한영이 경비병 출신이라는 것은 ‘이 사건을 오랫동안 취재한 한 신문사 기자’로부터 “그 해답을 발견했다”고 하는데,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의 이야기를 그렇게 신뢰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김정일 관저의 위치, 호위총국의 조직구성도 등을 잘 알고 있으면 그 사람은 곧 ‘경비병’이 되는 것인가.

김지형씨는 이한영의 증언을 무리하게 깎아 내리다 보니 여러 군데에서 실수를 저지르고 있다. 먼저 그는 성혜림이 김정일의 첫째 부인이며 김정남이 성혜림으로부터 낳은 자식이라는 것까지 부정하고 있다. 김지형씨는 “이한영은 홍일천이 김정일의 첫 부인이라는 그간의 남쪽의 통설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하면서 그간의 ‘통설’을 강조하고 있는데, 지금은 오히려 이한영의 증언대로 성혜림이 김정일의 첫 부인이라는 것이 ‘통설’로 되었지 않은가. 김정남이 성혜림으로부터 낳은 자식이라는 것도 말이다. 그럼 지난번에 김정남이 일본에서 체포되었을 때 남한의 언론은 ‘(김지형씨가 말하는) 통설을 깨고’ 그 숱한 오보를 했단 말인가. 김지형씨는 “김정남은 김영숙의 아들일 가능성이 크다”는 황당한 이야기까지 하고 있다.

김지형씨는 또 이한영이 자신의 수기에서 최은희와 성혜림이 만나는 부분을 놓고 “‘이한영 거짓말’의 극치”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한영은 무리하게 최은희와 성혜림의 운명적 만남을 이야기하는 것은 좋았으나 최은희의 수기를 꼼꼼히 챙겨 읽지는 않은 것 같다”고 비아냥거리면서 말이다. 김지형씨는 무슨 이유에선지 최은희의 수기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다. 또 일본에서 발간되었다는 ‘김정일 관저 위치 지도’까지 보여주고 있는데, 왜 이 지도를 그렇게 신뢰하는지는 밝히지 않고 있다. 그 외에도 자신이 믿고 싶은 증언과 자료만을 취사선택하는 경향이 다분하다. 최은희와 성혜림의 만남 부분은 이번에 성혜랑의 수기에 그날의 자세한 상황까지 묘사되어 있으니 이제 이해가 될 것이다. 전반적으로 볼 때 김지형씨의 기사는 ‘세계적 오보’를 비판하려다가 빚어낸 ‘악의적(惡意的)’ 오보가 아닐 수 없다.

김지형 기자, 정창현 기자는 대답해야 한다.

현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정창현 기자의 책 『곁에서 본 김정일』도 김지형씨의 논조와 마찬가지다. 김지형씨가 이야기한 ‘이 사건을 오랫동안 취재한 한 신문사 기자’도 아마 정창현씨를 지칭하는 것이리라. 김지형씨의 『말』지 기사와 정창현씨의 책은 문장까지 거의 똑같다.

그런데 정창현씨의 이 책은 대통령도 칭찬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읽었고 지금도 출판사를 달리해 계속 재판되고 있어, 문제의 심각성이 크다. 김정일을 다른 각도에서, 어찌되었든 북한을 지배하고 있는 현실적 권력자로 보아야 한다는 정창현씨의 취지는 백번 타당하지만 그 역시 기존의 관념을 깨려다 과도한 오류를 여러 군데 범하고 있다.

그의 책의 결정적인 문제는 ‘신경완’의 증언에 전적으로 의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창현씨는 신경완에 대해 “조선노동당 고위 간부로서 60년대 후반부터 김정일과 인연을 맺었다”고 소개하고 있다. 북에서 신경완의 직책은 “조선노동당 조직지도부, 선전선동부, 대남사업부서에서 지도원, 책임지도원, 과장을 거쳐, 부부장으로 승진, 30년 이상 노동당 중앙당에서 근무” 하였으며 “북한현대사의 산증인”으로 이야기되고 있다. 그러나 신경완 이전, 이후 북한을 탈출한 노동당 고위간부 출신 중 어떤 사람도 신경완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지 않다. 물론 신경완이라는 이름은 가명이지만, 노동당의 실세자리인 부부장급이 ‘없어졌는데’ 이를 확인해 주고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고위층 탈북인들은 신경완의 직책이 상당히 과장되었을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실제 인텔리 계층의 탈북인 중 자신의 신분을 과장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정창현씨는 신경완의 ‘무엇’을 그렇게 전적으로 믿었던 걸까.

논쟁점이 되고 있는 부분에 대해 그는 거의 신경완의 증언을 정설(定說)로 두둔하고 있다. 매번 “지금까지 나온 어떤 증언보다 구체적이고 경험에 기초한 것”이라면서 말이다. 그러나 구체성으로 따지면 다른 증언들도 더 구체적이면 구체적이었지 덜하지는 않다. 또 황장엽씨와 이한영의 증언, 성혜랑의 증언 등이 일치하는 경우에도 그는 신경완의 증언을 택하고 있는데, 여러 사람의 증언이 일치되는 것을 믿어야 할지 한 사람의 증언을 믿어야 하는지는 기본적인 과학적 태도가 있는 사람이라면 분명하지 않은가. 물론 특별한 위치에서 ‘자신만이 특별히 알고 있는’ 증언이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신경완의 경우는 특별히 그런 위치에 있었다고 볼 수도 없다. 신경완이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자세히 따져 물을 수 없지만 아직까지 그의 증언과 일치하는 주장을 내놓고 있는 사람도 없다.

성혜랑의 수기 『등나무집』과 관련하여 혹자는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이것 역시 이한영의 수기를 베낀 ‘조작품’ 아니냐고. 그러나 성혜랑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 이상, 성혜랑이 이한영의 수기를 의도적으로 베낄 어떠한 이유도 없다. 책을 살펴보면 알겠지만 성혜랑은 아들의 죽음에 대한 슬픔으로 가득 차 있다. 성혜랑은 이한영의 수기를 읽어보았는데 (이한영의 수기 내용 중 일부가 인용되어 있다), 만약 이한영의 수기가 거짓이라면 성혜랑이 제일 먼저 발견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한영이 가공된 인물이라면 이를 적극 제기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혜랑은 아직도 그의 아들이 죽지 않고 어딘가에 유폐되어 있을 것이라는 실낱같은 희망마저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혜랑은 ‘총을 맞아 죽은 그 자’가 자기 아들이 아니라고 믿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성혜랑은 이한영의 수기에 대해 특별한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성혜랑은 이한영이 북한공작원에 의해 죽었다는 것을 믿고 있지 않지만 (성혜랑은 한국의 정보기관이 죽였을 것이라고 믿고 있는 듯 하다), 자신의 아들임은 확실히 하고 있다.

그럼 김지형씨나 정창현씨의 경우에는 성혜랑의 존재자체를 부정해야 논리가 성립된다. 모두가 ‘가짜’라고 말이다. 만약 정말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그야말로 ‘슬픈’ 일이다. 어디서 그런 가짜들을 열심히 만들어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우리나라의 정보기관에서? 어떻게든 남북화해의 분위기를 흩트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현재 한국의 정보기관에서 북한 최고권력자의 심기를 크게 건드릴 수 있는 서적을 무엇 하러 열심히 만들고 있을까. 그럼 외국의 정보기관에서? 수백 페이지나 되는 수기를 열심히 짜 맞춰 서로 조작해 낼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불쌍하다. 설령 그렇게 노력해서 효과가 있다 하더라도, 효과가 있으면 얼마나 된다고 그 짓(?)을 하겠는가. 덧붙이자면 이한영과 성혜랑의 수기에는 적지 않은 사진이 수록되어 있다. 이한영은 계획 없는 탈출이어서 자기 증명사진 정도만 챙겨 나왔다지만, 성혜랑은 김정일과 함께 찍은 사진을 비롯해 여러 장의 사진을 들고 나왔다. 북한 주민들이 일생에 한번 찍기도 어렵다는 ‘장군님과의 합석 사진’을 말이다. 설마 이것도 조작된 것이라 생각한다면, 정말 ‘맙소사’이다.

북한의 김정일, 김정일의 북한을 둘러싼 아주 귀중한 증언들

한 인물에 대한 평가는 우선 그의 사적, 공적인 생활 전반을 놓고 ‘종합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특히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인물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김정일 역시 마찬가지다. 그의 개인적인 생활을 보고 ‘김정일은 이러한 사람이다’라고 속단하기는 어렵다.

또한 몇몇이 주장하는 평가를 ‘전부’로 환원시켜서는 안될 것이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같은 행동이라도 다르게 평가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이야기하는’ 내용이 인물을 평가하는 또 하나의 틀로 된다.

이런 측면에서 이한영과 성혜랑 등의 수기에 나타난 김정일은 사적인 측면에 꽤나 치중해 있고 많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사실들은 아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욱, 김정일과 가장 밀착된 곳에서 생활한 이들의 증언은 ‘특별한’ 증언으로 존중되어야 한다. 특히 김정일이 외부에 자신의 모습을 쉽게 보여주지 않는 ‘베일에 쌓인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은 높다. 김정일을 역사 속에 완전히 지워버려야 할 인물이 아니라 계속 연구해 앞으로는 절대 이러한 정치가가 나오지 말아야 할 ‘연구대상’으로 생각한다면, 김정일 개인을 증언하고 있는 자료의 중요성은 더해진다. 북한을 제대로 아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북한민주화운동의 측면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특히 성혜랑의 수기에는 직접적으로 김정일 통치기의 북한을 비판하고 있지는 않지만 여러 가지 일화로 백 마디의 웅변을 대신하고 있다. 북한을 더욱 깊이 알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슬픈 가족사’를 꼭 읽어 볼 것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