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활정보신문을 한번쯤 보셨을 것입니다. 이사를 하려면 맨 먼저 생활정보신문부터 뒤져보게 되지요. 중고차를 구입하거나 일자리를 구할 때도 생활정보신문이 유용합니다. 필자도 지난 봄엔 이사를 하느라 매일 아침 생활정보신문을 들고 색연필로 줄그어 가며 여기저기 전화도 꽤나 했습니다. 다리품도 적잖게 팔았고, 덕분에 살만한 집 하나를 얻을 수 있었답니다.

특별히 사거나 팔만한 것이 없어도 간혹 생활정보신문을 읽어보곤 합니다. 유치원생들의 장난질 같은 정치이야기로 반복되는 일반 신문보다는, 그래도 생활정보신문에선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것 같습니다. 요샌 집값이 어느 정도 되나, 중고차 시세는 얼마쯤 되나 참고삼아 봐두기도 합니다.

경기(景氣) 변화에 따라 집값이 오르내리고 구인 구직이 늘고 주는 경향, 주로 어느 직종에 대한 구인 광고가 많고 임금수준은 어느 정도 되는가를 찬찬히 살펴보는 것도 좋은 실물경제 공부입니다. 서민들의 체감(體感) 경기지수가 이 생활정보신문에 담겨 있다고 할까요. 경제각료들이 가끔 생활정보신문들을 펼쳐 보는 것도 좋을 텐데 말입니다.

2.

대한민국에서 발행되는 생활정보신문이 몇 종류나 되는 지는 모르겠지만 그 중 ‘벼룩시장’이라는 이름의 신문은 가장 유명한 신문 중 하나입니다. 이 신문의 TV 광고를 보셨을 것입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 실로폰 소리로 울립니다. 그와 함께 “전국 백 아흔 다섯 개 지역에서 매일 만날 수 있는 벼룩시장. 백 아흔 여섯 번째 지역은 평양이었으면 좋겠습니다”라는 맑은 목소리의 내레이션이 흐릅니다. 로동신문, 평양료리집 간판이 보이는 광장, 그곳에 설치된 배포대에서 벼룩시장을 꺼내 가는 사람들… 대동문 영화관이 잠깐 스쳐지나가고 화면이 바뀌면서, 인민복을 입은 한 남자가 벼룩시장을 살펴보고 있는 모습이 마지막 장면을 채웁니다.

아마 제작자들은, 우리 신문은 대한민국 모든 도시에서 배포된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었을 테고, 이제 남은 곳은 북한뿐이다, 북한 아니라 세계 어디든 우리는 갈 것이고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드러내 보이고 싶었을 겁니다. 이런 의도에서 본다면 단 15초 내에 성공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대단히 잘 만들어진 광고라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문득 이러한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과연 북한에서 생활정보신문을 발행할 수 있을까? 어떠한 조건이 충족되어야 생활정보신문이 창간될 수 있을까? 당겨 이야기하자면 필자는 북한에서 생활정보신문이 발행된다면, 그 시점은 북한의 개혁·개방, 민주화와 사회재건이 상당부분 진척되었을 때나 가능하리라고 봅니다.

3.

생활정보신문이 발행되자면 우선 집집마다 전화기가 한 대씩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물건을 내놓은 사람의 연락처 - ‘접촉수단’이 있어야 일단 광고가 시작될 테니까요. 이동전화나 호출기가 확산되면 생활정보신문의 활력은 더욱 커집니다. 또 시내버스나 전철 등 대중교통수단도 갖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찾아갈 수 있겠지요. 아니면 자동차나 오토바이, 자전거 등 개인교통수단이라도 많던지. 매일 아침 신문을 찍어 배포대에 갖다 놓을 수 있을만한 교통망 - 도로와 철도도 필수요건 중 하나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조건은 사유재산이 완전하게 인정되고, 거주지 이전, 직업선택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집이든 자동차든 생활용품이든 자기 것이 확실해야 사고 팔 수 있을 테고, 직업을 택하고 직장을 옮길 수 있어야 구인 구직란도 채워지겠지요. 하고 싶은 장사를 할 수 있어야 점포가 거래될 것이고, 살고 싶은 동네에서 살 수 있어야 아파트나 주택도 거래될 것입니다.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사회적 안정과 신뢰’입니다. 이번 호 Keys는 <2001년 6월, 북한 인민들은 이렇게 살고 있다>라는 제목의 현지 통신에 많은 지면을 할애했습니다. 증언에 의하면 김정일은 최근 이른바 ‘총대사상’으로 군수(軍需)공장을 쉼 없이 가동하고 징집, 군사훈련을 강화하면서 온 사회를 군사요새화 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아직도 여염집에는 전기가 공급되지 못하고 꽃제비가 다시 늘고 있으며 식량배급은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데 말입니다. 우리는 이번 북한소식에서 “애미네는 빌려줘도 자전거는 못 빌려준다”는 재미있는 표현 하나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자전거 도둑이 많아 아예 방안에 자전거를 들여놓는다고 하는군요. 사회가 전반적으로 안정되어 있고, 서로 믿고 물건을 사고 팔 수 있는 분위기가 되어야 활발한 거래와 중개, 투자도 가능할 것입니다. 총대사상으로 폭압(暴壓)정권의 일시적 연장을 꾀할 수 있을지는 모르나, 그것으로 인민을 살릴 수는 결코 없습니다.

4.

이번 벼룩시장 광고는 장소 선정에 꽤나 애를 먹었다고 합니다. 평양 현지 로케를 계획해보기도 했지만 여러 가지 조건이 여의치 않았나 봅니다. 그래서 평양거리로 재현된 곳은 수원의 경기도 시민회관. 시민회관 주변 건물에 노동신문 간판 등을 세우고 붉은 플래카드를 걸어 만들어진 가짜 김일성광장에, 역시 가짜인 100여명의 평양시민들이 동원되었다는군요. 또 광고에서 시민들이 뽑아 가는 그 벼룩시장은, 광고를 위해 1면을 평양판으로 특별 제작하였다고 합니다. 물론 내용까지는 채울 수 없었겠지요. 가짜가 아닌 ‘정말’ 벼룩시장 ‘평양 지역판’이 만들어질 날은 언제쯤 될지….

북한의 민주화는 한 여름날 오후에 이글거리는 태양처럼 우리 마음을 갈증나게 하지만, 후드득후드득 땅바닥을 두드리다 ‘쏴’하며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시원스럽게 우리 앞에 나타날 것입니다. “호외요, 호외!”를 외치는 신문배달 소년의 흥분된 목소리 따라 “50년 독재, 종말을 고하다”라고 큼직하게 쓰인 신문지가 손에 손에 쥐어질 날, 그 날은 머지 않아 찾아올 것입니다.

“평양시 선교구역 진달래아파트 23평형 방2 전세 6천만 원”, “원산시 중평리 임야 50,000평 평당 3만원 4차선 도로인접 신도시 예정지역”, “혜산시 혜강동 개혁백화점 가전제품매장 판매원 남녀 상관없음 10시∼8시 급여 상담 후 결정” 이런 광고를 볼 수 있을 날도 뒤를 이어 곧 찾아올 것입니다.

역사상 유례없는 독재정권에 맞서 열심히 잘 싸웠다고 북한 민중에게 축하의 메시지를 보내줄 그 날…, 우리가 살아가는 ‘오늘’이 바로 그 날의 열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