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순이라는 말은 '돌아올 귀(歸)'에 '좇을 순(順)', 즉 '도리를 따라 돌아왔다'는 뜻이다. 국어사전을 살펴보니 "(적이나 간첩 등이) 더 이상 맞서거나 대항하지 않고 이쪽 세력에 동조하거나 속하게 되어 복종하는 것"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어찌되었든 귀순이라는 말은 저 쪽은 잘못되었고 우리는 올바른데, 정통(正統)인 우린 쪽으로 돌아올 사람이 당연히 왔다는, 이를테면 '체제우월성'과 '당위성'을 담은 표현이라 하겠다.

반면 탈북이라는 말은 말 그대로 '북(한)을 탈출했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가치개념은 들어있지 않다. '벗어남'을 뜻하는 탈(脫)이라는 접두사는 탈냉전, 탈근대라는 용어에서도 볼 수 있듯 '옳고 그름'의 판단은 배제되어 있다. 물론 무언가를 벗어난다고 하면, 기존의 것이 잘못되어 있기 때문 아니냐 혹은 무언가 문제가 있지 않느냐 하는 약간의 의미를 찾을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필자는 가치판단이 배제된 탈북이라는 표현을 쓰지 말고 본질을 명확하게 담은 표현을 쓰자는 (혹은 그 반대를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탈북이라는 말은, 그것이 오히려 북한 주민들의 체제이반 현상이 더욱 강렬해지고 있음을, 나아가 북한정권이 더 이상 갈 곳 없는 내리막길에 다다랐음을 역설적이고 보편적으로 증명해 보이고 있는 표현이다. 탈북과 귀순이라는 두 낱말 사이에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표현의 변화만으로는 다 품을 수 없는 '무엇'이 담겨있다.

신문기사검색을 전문으로 하는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서 '탈북'이라는 검색어를 지정해주니 1990년부터 2001년 7월 현재까지 무려 7000여 개의 기사를 펼쳐 보인다. 그만큼 우리사회에서 이제 탈북은 일상화된 용어가 되어있다. 그런데 언제부터 우리는 탈북이라는 말을 사용하게 되었을까.

탈북이라는 말이 우리사회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94년의 일로, 이때부터 각 신문 사설에 '탈북난민 버려 둘 것인가', '탈북자 정착준비를' 등의 제목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당시 탈북자 문제가 대두된 것은 북한에서 러시아로 돈 벌러 간 (혹은 끌려간) 벌목공들의 집단탈출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탈북을 세계공론에', '인도적 배려, 잘한 일이다', '북한인권이 문제다' 등 북한문제를 인권문제와 결부시켜 이야기하는 사설과 논평도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상당히 의미 있는 변화이다.

예전에 '귀순'이라는 용어는 '북한을 탈출하면 당연히 남한으로 온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1994년 러시아 벌목공, 95년 이후 식량난으로 북중(北中)국경을 넘은 북한주민들은 '북한 탈출＝남한행'이라는 이전의 등식을 깨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지금 북한을 탈출한 '북한 국적의 사람들'은 중국 동북부 일대 뿐 아니라 본토 깊숙한 곳, 러시아, 몽고, 심지어 베트남, 미얀마 등지에까지 흩어져 있다. 즉 이전의 '귀순자'들이 남한으로 간다는 일정한 목표와 계획 아래 북한을 탈출했다면, 지금의 탈북자는 어떻게든 이 죽음을 땅을 일단 벗어나야 한다는 절박함이 만들어낸 '긴급피난'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수는 조사기관에 따라 다르지만 적게는 3만여 명, 많게는 10만∼30만여 명으로 추산된다.

혹자는 숫자를 놓고 시비하는데 3만이면 어떻고 10만이면 어떤가. 중요한 것은 단 몇 명이라 하더라도 이들이 어떠한 처지에 놓여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들 대다수는 일정한 주거지가 없이 산 속 토굴에서 짐승처럼 살아가거나 도시에서 빌어먹으며 살고 있다. '체포의 위험'은 이들을 항상 따라 다니는 공포이다. 중국 공안을 피해야 하고 북한에서 파견된 특무들(일명 '추격조')의 추격에 쫓긴다. 당당하지 못한 법적 위치에 놓여 있는 사람이 어떤 불리한 처우를 감내해야 하는지, 우리는 최근 많이 보도되고 있는 한국 내 외국인 근로자들에 대한 차별과 가혹행위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런데 한국보다 인권의식이 훨씬 낮은 중국 등지를 떠도는 탈북자들이 현지에서 당하는 인권유린은 한국 내 외국인 근로자들의 그것보다 몇 백 배 가혹하다. 산골 마을로 노예처럼 끌려가고, 10대 소녀들이 매춘부로 팔려가고, 기껏 일하며 돈을 모아 놓으니 신고하겠다고 협박하여 무일푼으로 도주할 수밖에 없었다는 일화 등은 너무도 많아 헤아릴 수조차 없다. 북한당국은 아직도 인민배급을 정상화하고 있지 못하면서 탈북자들의 목에는 거액의 현상금을 걸어 놓았으며 그 액수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한다.

이런 탈북자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 크지 않다. 체포의 위험 없이 편히 누울 수 있는 곳, 일 할 수 있는 곳, 먹을 수 있는 곳이다. 배부르고 안락하고 쾌적한 곳이 아니다. 그저 생명을 유지하며 '잡히지만 않으면' 된다. 그런데 문제는 지구상에 그러한 곳은 단 한 곳 밖에 없다는 것이다. 바로 '남한(대한민국)'이다. 숨막히는 도피생활 중에 탈북자들은 '세상에서 나를 받아 줄 곳은 남한 밖에 없다'라는 인식을 자연스럽게 갖게 된다. 수단 과 방법을 안 가리고 남한으로 오려는 이들의 노력, 그 이유를 남한 사람들은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이 바라는 건 정착금이나 성대한 환영, 높은 대우, 그런 것이 아니다. 아직 '자유'와 '생명'이다.

만약 중국이나 러시아 쪽에 탈북자들이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정착촌이 있다면 그들이 그렇게 목숨을 걸고 남한으로 오려 하지 않을 것이다. 정착촌까지는 아니더라도 체포나 송환만이라도 하지 않는다면 이들의 인식은 많이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북한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중국과 러시아, 특히 가장 많은 탈북자들이 머무르고 있는 중국은 이러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 같다. 중국은 올해에만 천여 명의 탈북자를 북한에 송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중국의 입장도 이해 못되는 것은 아니다. 수 만에서 수십 만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중국 정부의 재정상태가 여유로울 것 같지도 않고, 중국 정부가 일부 탈북자를 허용하게 된다면 더 많은 탈북 행렬이 명약관화하고 이는 순치(脣齒)의 관계에 있다는 북한과의 관계에 큰 악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굶주린 탈북자들이 절박한 상황에서 저지르는 범죄행위도 점차 중국의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중국 정부의 입장은 이렇게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탈북자들이 '희망의 등대'로 생각하는 남한 정부의 태도는 어떠한가.

몇 해 전 어느 잡지의 시론에서, 한 탈북자가 주중 한국대사관을 찾아갔더니 대사관 직원이 "당신 우리나라(남한)에 세금한번 낸 적 있어?"하면서 쫓아냈다는 내용의 글을 읽으며 '설마'하고 생각했는데, 필자가 최근 탈북자들과 면담하는 과정에서 이것이 사실임을 확인하고 얼마나 분노하고 허탈해 했는지 모른다. 한두 명만 이러한 사실을 털어놓는 것이 아니었다. 동남아 4개국을 거쳐 정말 영화 같은 체험을 겪으며 재작년 남한으로 온 한 탈북자는 한국대사관에 구명을 요청하니 "당신이 알아서 왔으니 알아서 가시오"라는 대답을 들었다고 한다. 한오라기 마지막 삶의 희망마저 꺾여버린 경험을 거쳐본 사람만이 이때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이 남한 정부 전체의 입장은 절대 아니고 일부 공무원의 잘못된 처사임은 분명하다. 일단은 이 공무원들의 발언을 이해하는 입장에 서보자. 한 해에 한 두 명 정도 남한으로 들어올까 말까 하던 '귀순자'의 숫자는 이제 한 해에 수백 명을 헤아리고 있다. 지난해 남한 땅을 밟은 탈북자는 3백12명으로, 1994년 52명, 1996년 56명, 1997년 86명, 1999년 148명 등 매년 배로 늘고 있다. 올해는 1,000명이 넘을 것이라는 전망도 있다. 현재 남한 내 탈북자들의 숫자가 총 1,400여명임을 감안할 때 남한 내 탈북자들의 증가추세는 가히 기하급수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1990년대 이전의 귀순이 휴전선을 넘는다든지 배를 타고 넘어온다든지 하는 말 그대로 '알아서 오는' 귀순이었다면 지금은 중국, 러시아 등 제3국을 통한 '탈북-귀순'이 주를 이루고 있다. 남한으로 오자면 비행기나 배를 타야하는데, 몰래 타지 않는 이상 대사관의 협조는 필수적이다. 한해에도 수백 명씩 찾아와 남한으로 보내달라 아우성이니 담당자가 귀찮아 할 만 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본인에게는 귀찮은 사람 한 명 쫓아내는 것일 수 있으나, 쫓겨난 사람은 이제 죽음 밖에 돌아갈 곳이 없다. 이들의 원망 어린 통곡소리가 두렵지도 않을까. 최근 세계언론에 화제가 된 '길수가족' 역시 무작정 유엔고등판무관실(UNHCR)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한국대사관을 통한 남한행이 좌절되니 최후의 방법으로 이를 택한 것이다. 이번 길수가족 사건은 여러 가지 정치적 사정이 맞물려 성공한, 예외중의 예외이다.

이런 탈북자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그들에게 '안식처'를 제공하는 것이다. 이 안식처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 중국 정부가 탈북자 보호에 적극 나서기 힘든 형편이고 남한 정부 역시 탈북자 모두를 받아들이기 어렵다면 NGO들이 탈북난민 지원사업을 통해 그 공백을 메워야 한다. 현재 중국에는 몇 개 선교단체와 인권단체, 기타 민간단체들이 탈북자 보호시설을 비밀리에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이런 단체의 활동가 몇 명이 중국 정부에 체포되어 추방된 사건이 있었고, 비밀시설에 대한 추적도 훨씬 심해졌다고 한다. 이러한 활동이 탈북자 문제에 대한 궁극적인 해결책을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국가의 준비가 미흡한 영역, 선뜻 나서기 어려운 영역을 맡아 헌신하는 것이 NGO 본연의 자세 아닌가. 이런 단체들의 활동을 물적, 심적으로 지지해 주는 것이 당면한 해결방법의 하나이다.

둘째, 북한문제에 관해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 책임이 있다고 할 수 있는 남한 정부가 탈북자 문제에 대책을 세워야 한다. 만약 남한 정부가 우리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나라와 전혀 상관이 없고 이 나라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힌다면, 또는 '통일'이라는 국시(國是)를 포기하겠다고 대외적으로 천명한다면, 나아가 그러한 내용으로 국민을 설득할 수 있다면 탈북자 문제에 대해 남한 정부가 특별히 대책을 수립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남한 정부와 국민 대다수가 북한을 한 민족으로 생각하고 통일해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는 한, 북한문제에 관해 가장 책임을 갖는 국가는 대한민국이다. 그래서 통일과 북한문제에 관련하여 어떤 '예측 가능한' 상황에도 대책을 세워두어야 한다.

특히 한 해에도 수백 명씩 남한으로 들어오고 있는 탈북자문제는 이제 가능한 상황이 아니라 '현실의' 상황이 되고 있다. 이들의 교육문제, 지원문제, 남한국민들과의 융합문제 등 산적한 과제가 한 둘이 아니다. 탈북자 정착을 위한 교육시설인 <하나원>은 지금 수용인원 100명을 훨씬 넘어서 있다. 그래서 3달 정도의 교육과정을 2주 정도로 마치자는 행정편의적인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심정만으로 통일을 이룰 수 없다는 예시로 우리는 흔히 독일 통일의 과정을 이야기한다. 급작스레 이루어질 수 있는 통일을 상정해 보지 않고 있는 현실은, 통일을 자꾸 지연시키는 것이 남북 모두에게 유리한 것이라는 결론으로 갈 수밖에 없다. 한해에 수천 명씩, 한꺼번에 2천만 모두가 몰려 온다해도 받을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을 때, 이에 대한 물적, 제도적 준비가 갖춰져 있고 국민정서가 합의되어 있을 때 비로소 통일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탈북자들이 가야할 가장 궁극적인 안식처는 역설적이게도 '북한'이 되어야 한다. 북한을 '돌아갈 만한 땅'으로 만들면 된다. 중국 등지를 떠돌고 있는 탈북자들이 돌아갈 수 없는 이유는 돌아간 이후의 가혹한 처벌과 생활이 두려워서이다. 돌아가도 처벌을 받지 않는다면, 그것에 대한 확실한 보장만 있다면, 돌아가도 굶지 않는다면, 또 그것에 대한 확실한 보장이 있다면, 돌아가도 자유를 누릴 수 있다면, 그러한 환경이 확실히 보장되어 있다면 분명히 탈북자들은 북한으로 돌아갈 것이다. 남한 내에 있는 탈북자들도 모두 북한으로 갈 것이다. 이것이 최고 최선의 탈북자문제 해결방안이다.

최근 북한당국은 유엔인권이사회에 16년 만에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 보고서에서 북한은 북한에 공개처형은 없으며 정치범수용소라는 것도 없고 여행의 자유가 있으며 강제노동 등은 없다고 주장했다. 지난 1999년에 북한으로 송환됐던 '7인의 탈북자'중 6명에 대한 생사도 확인해 주었다. 이번 보고서의 내용이 전부 허위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사실이니 논외로 돌리고, 필자는 북한이 이러한 보고서를 제출했다는 자체만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한다.

국제사회는 꾸준히 북한의 정치체제와 인권실태에 대해 물어 북한이 자꾸 이 문제에 대답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돌아가도 처벌을 받지 않도록, 국가보위부 등 폭압기구와 정치범수용소의 문제에 대해 물어야 한다. 돌아가도 굶지 않도록, 구호물자 배분의 투명성을 확인하여야 하며 자유경제정책 도입을 권유하여야 한다. 돌아가도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북한정치체제의 여러 문제점을 꾸준히 지적해 개선여부를 확인하여야 한다. '돌아갈 수 있는 땅'으로 만드는 일, 이것이 탈북자 문제의 궁극적인 해결책이자, 북한민주화·인권운동이 무엇보다 중요한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