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역사는 기록하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이렇게 기록적인 행동을 즐기는 걸 보면 김정일씨는 역사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인 것 같은데, 그렇다면 ‘영원한 독재는 없다’는 역사의 기록과 교훈도 꼭 알아두었으면 합니다. 김정일씨의 이모저모를 유쾌·통쾌·상쾌하게 파헤쳐 온 〈김정일 시리즈〉는 김정일씨의 이번 러시아 방문을 추적하였습니다. /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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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폴로를 닮고 싶었던 것일까? 철(鐵)의 실크로드 따라 왕복 2만㎞에 달하는 대장정을 이루어낸 김정일씨. 하루사이에 지구 반대편의 국가로 출장을 가고 1분 1초까지 계산하여 바쁘게 움직이는 개명천지(開明天地) 21세기에, 일국의 국가원수가 다른 나라 국가원수를 만나러 ‘기차를 타고’ 20여 일 간 대륙을 횡단했다. 한 두 번 그런 것도 아니긴 하지만, 그의 이런 독특한 취향에 전 세계가 다시 한번 놀랐다.

딱 1년 전 이맘때 (2000년 8월 5일∼12일) 남측 언론사 사장단의 방북이 있었다. 당시 김정일씨는 ‘통일은 내 맘먹은 때 한다’, ‘NHK는 광고가 없어서 좋다’, ‘역시 포도주는 프랑스 산이 최고’라는 등 여러 가지 재밌는 말을 했고, 『Keys』는 이것을 <카피라이터 김정일씨>라는 제목으로 실은바 있다. 그런데 이번에도 김정일씨는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러시아 방문에 얽힌 몇 가지 에피소드는 “과연 김정일!”이라는 감탄사를 연발하게 한다. 우리를 감탄하게 만드는 김정일씨의 자기 소개를 들어보자.

죄 많은 사람은 겁도 많다

2차 남북정상회담, 곧 김정일씨의 답방이 기대보다 자꾸 늦어지는 이유를 놓고, 혹자는 ‘경호(警護)’상의 문제, 남측 환영분위기 조성 미흡을 들기도 한다. 즉 김정일씨가 남한에 왔다가 행여 돌멩이라도 맞지 않을까 하는 우려에서이다. 하긴 그가 오면 시위를 벌이겠다, 내가 나서 거사(?)를 이루겠다고 공개적으로 입장을 밝힌 단체와 개인이 많으니 겁날 만도 하겠다. 또 철저히 사람을 가려내 김대중 대통령이 지나는 연도에 수만 명의 환영 인파를 동원하였던 평양과 달리, 서울에서 이렇게 사람을 ‘동원’했다가는 ‘큰 일’난다. 김정일에 대한 반대 감정에 앞서, 남한 정부가 먼저 국민들의 격한 저항에 부딪힐 것이다. 호기심에 거리에 나와 볼 사람은 물론 많겠지만 열렬히 환영하며 깃발을 흔들 대한민국 국민은 얼마나 될까. 고층건물이 봉쇄되고 엄청난 경호인력이 배치되는 걸 언론은 긍정적으로 써줄까. ‘전 세계가 우러르는 21세기의 태양’이라고 입이 닿도록 선전했던 북한의 입장에서 이는 난감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래서 이번 러시아 방문처럼 북한 인민들은 모르게 ‘홀연히’ 남한을 다녀간 뒤, 나중에야 “장군님께서 친히 남조선을 방문하시었다”고 보도할지도 모르겠다. 혹 섬을 봉쇄하고 서울이 아닌 제주에서 정상회담을 하던지.

하여튼 김정일씨의 이번 방러 과정을 보니 ‘답방이 늦어지는 이유는 경호 탓, 환영 탓’이라는 일각의 주장이 크게 틀리지는 않은 것 같다.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길이는 9,288㎞, 평양에서 모스크바까지는 10,600㎞라고 한다. 모스크바를 지나 러시아 끝에 있는 상트페테르부르크(옛 레닌그라드)까지 다녀왔으니 간단히 계산해 보아도 이번에 김정일씨가 지나간 거리는 왕복 20,000㎞를 훌쩍 넘는다. 러시아에서는 이런 김정일씨를 위해 철로변 100m마다 경찰 1명씩을 배치했다고 한다. 여기에 투입된 사람만 9만 3,000여 명. 그가 머무는 역마다 동원된 경호요원들을 합치면 10만여 명에 이른다고 하니 가히 ‘기록적’이다.

김정일씨가 지나는 곳, 머무는 곳은 철통같은 경비와 ‘청소‘가 이루어졌다. 하바로브스크 역에서는 30분간 정차하였을 뿐인데 역내 대부분의 전등을 끈 채 승객들의 출입을 차단하였다. 야로슬라브스키 역에서는 도착 4시간 전부터 역사 주변 수백 미터 이내의 통행을 완전 차단하고, 모스크바 교외선 운행을 중단했다. 이로 인해 2만 5천여 명의 이용객이 열차이용이 취소되거나 지연되는 불편을 겪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에서는 김정일씨 도착 전후 2시간 30분 동안 모든 열차의 운행을 취소시켰다. 레닌그라드스키 역, 옴스크 역에서도 그랬다. 일반인의 출입이 통제되고 저격병이 배치되었으며 주위의 모든 상점은 문을 닫고 주변 건물의 모든 옥상은 봉쇄되었다. 러시아 신문 이즈베스티야는 “공허한 플랫폼과 얼어붙은 열차들, 그리고 무인지경에 당황한 참새들, 경찰의 경비선 등 (8월) 3일 밤 야로슬라브스키 역이 보여준 모습은 (현대사회의) 기적으로, 바로 공산주의의 망령”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세계 어느 나라 원수가 방문을 해도 이렇게 삼엄한 경비를 취하는 경우가 없다. 경호는 보통 쌍방의 합의와 사전 요청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무리한 경호 요구는 방문국에 대한 결례이기도 하다. 러시아 정부기관지에 해당하는 한 신문도 “체첸전쟁 때 대통령의 안전을 위해 펼쳤던 경비조치는 이해할 수 있지만 왜 다른 나라 국가원수의 방문에 우리가 불편을 겪어야 하느냐”고 불평했다 한다.

서방의 국가원수들은 방문국 국민과의 친근감을 더하고 자신 있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경호인력을 줄이고, 경호를 하더라도 드러나지 않게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작년 ASEM 서울회담 당시 네덜란드의 빔 콕 대통령이 만찬회장을 빠져나와 1층 라운지에서 일반 투숙객들과 함께 티타임을 가졌다든지, 독일의 슈뢰더 총리가 호텔에서 회담장까지 1.5㎞를 걸어다닌 일화는 유명하다. 김정일씨에게 이런 이야기는 ‘간 큰 녀석들의 무모한 짓’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을 것이다.

김정일씨는 이번 방러 기간 중 이타르타스 통신과의 서면인터뷰에서 “내 취미는 공화국의 인민들과 군인들 속에 함께 지내는 일”이라고 이야기했는데, 이것이 허무맹랑한 거짓말이라는 것은 자신의 행동에서 다 드러난다. 김정일씨의 이번 방러는 전 세계가 다 알고 있었지만 정작 북한 인민들은 모르고 있었다. 이미 러시아 국경을 건넜던 7월 26일 조선중앙방송을 통해 “가까운 시일 내에 러시아를 방문할 것”이라는 애매한 보도를 했고, 7월 29일에는 최고사령관 명령을 통해 전군에 전투태세를 확립하라는 보도를 내보냄으로써 마치 국내에 아직도 있는 듯한 인상을 풍겼다. 8월 4일에야 러시아 공식 방문을 보도하였고, 북한에 거의 다다를 때가 되니 ‘머나먼 5만여리 대장정’이라고 호들갑을 떨면서 세계 언론이 김정일을 칭송하고 있다고 연일 보도하고 있다. 살고 싶은 것은 인간의 당연한 욕망이라지만, 철두철미한 경호와 인민을 기만하는 밀행(密行)없이는 안심하지 못하는 것을 보면, 김정일씨는 정말 자기 죄가 큰 줄은 아는가 보다.

내가 갈 곳은 나만 안다

신문보도를 중심으로 김정일씨의 이번 방러 과정을 정리해보면 골치가 아플 지경이다. 어느 도시에 가서 무엇을 볼 것, 누구를 만날 것이라는 예상은 거의 대부분 빗나갔다. 물론 일정을 확인해보지 않은 채 자의적으로 보도한 기자들의 잘못을 탓할 수 있겠지만, 기자들이 김정일씨의 다음 행선지를 알래야 알 수도 없다. 상식적으로 국가원수의 일정은 ‘공개’되어야 정상 아닌가. 항상 그랬지만, 이번에도 김정일씨가 어디로 움직일지, 무엇을 할지는 모든 것이 ‘비밀’이었다.

이번 방러 기간 중 김정일씨는 어떤 기자와도 만나지 않았다. 양국 정상회담 이후 관례적으로 갖는 기자회견도 이타르타스통신과의 서면 인터뷰로 대체했다. 더구나 이타르타스가 질문서를 전달한 것은 지난해 말이라고 한다. 콤소몰스카야 프라우다는 “김정일의 동선(動線)은 그 자신만 안다”고 보도했다. 이즈베스티야도 같은 내용을 보도했다. 뉴욕타임즈는 ‘국가 원수를 숨기는 방법’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통해 김정일씨를 “스텔스 익스프레스(stealth express)”라고 불렀다. 프랑스의 르몽드는 “스탈린에 관한 옛날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며 ‘구세대 비밀강박증’이라고 꼬집었다.

김정일씨는 어디에 가든 자기 맘대로 행동했다. 하바로브스크 역에서는 내외신 기자 30여명이 취재를 위해 대기했지만 열차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꼭 들를 것이라 예상됐던 북·러 친선각에도 들르지 않았다. 김일성 부대가 주둔하였던 항일유적지를 둘러보았다는 보도 역시 오보였다. 울란우데에서는 자치공화국 대통령을 비롯한 주요인사들이 역으로 나갔으나 만나주지 않았다. 기차가 세계 최대 담수호인 바이칼호 주변을 지날 때는 느닷없이 기차를 세워 호수물에 손을 담가 보았다고 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당초 예정되었던 피스카료프 묘지 참배와 레닌박물관 관람일정을 일방적으로 취소해 시당국을 당황케 했다. 이유는 ‘비가 와서’라고 전해지는데, 결국 다음날 묘지를 참배했다. 그러자 러시아 언론들은 김정일씨를 ‘레인맨(rain man)’이라고 비꼬았다. 평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머문 모스크바의 메트로폴 호텔에서는 사우나를 즐긴다는 이유로 오전 일정이 취소됐다. 또 미술관을 향하던 차량을 갑자기 돌려 크렘린궁으로 가더니 갑작스레 푸틴과 비공개 2차 회담을 가졌다. 노보시비르스크에서는 철통같은 경호속에 비밀 여행을 한다는 여론의 비난을 의식해서인지 시민들이 이용하는 지하철 역에 난데없이 들어가 멋쩍게 손을 흔들어 보이고 나왔다.

김정일씨의 이러한 비밀주의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돌출적인 행동을 두고 일각에서는 이것을 ‘멋있다’, ‘호탕하다’고 평가한다. 작년 남북정상회담 이후엔 이른바 ‘김정일 신드롬‘이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무척 속없는 이야기다. 김정일씨는 탈옥수 신창원이나 괴도 루팡이 아니다. 상식을 가진 국가원수라면 그렇게 하지 않는다. 김정일씨는 자본주의 국가들의 이런 호들갑스런 여론까지 적절히 이용할 줄 아는 영악한 인물이다. 벨기에 최대 일간지인 르수아르는 김정일씨의 이번 방러를 “희화적인 스탈린주의와 개인우상숭배가 지배하고 있는 북한의 특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라며 “북한의 그 같은 특성이 현대적인 러시아를 ‘오염’시켰다”고 까지 비판했다. 정말 그는 인류의 21세기를 오염시키고 있다.

내 취미는 무기 수집

김정일씨는 자신의 취미를 “인민들 속에 지내는 것”이라고 자주 농담을 하지만 실제 그의 취미는 ‘무기수집’ 인 것 같다. 이번 방러 기간 중 확인된 그의 방문처는 10여 곳 정도이다. 주로 옴스크, 모스크바, 노보시비르스크, 생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이루어 졌는데, 일부 생활관련 시설과 예술 공연 관람들이 있긴 하지만 그가 관심을 보인 부분은 핵, 로켓, 전투기, 탱크로 요약된다. 확인된 보도사항만 간단히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도시
공장
성격
주요사항

옴스크
트란스마시 공장
T-80 탱크생산
탱크기동훈련,
영화감상
트렉터에 관심

푸슈킨 도서관
한국 관련 전시회
일부 서적에 관심

옴스크 베이컨


모스크바
흐루니체프우주센터
인공위성 제작
및 지상통제
로켓 제조과정에 관심

상트페테르부르크
발티카 맥주공장
맥주 제조
맥주 제조기술 자문요청

레닌그라드 금속공단
제철
원전용 터빈생산 관람

마린스키 극장
고전발레 공연
'실피다'공연 관람

노보시비르스크
아카뎀고로독
핵물리학 연구
열핵 합성장치 감상

츠칼로프 공장
군수공장
수호이 전폭기 시범비행 감상

시베리아 철도대학
철도기술인력양성
TSR과 TKR 연결에 관심
북한학생 연수 지시

영국 선데이 타임스는 러시아가 북한에 단거리 방공시스템과 정찰기, 레이더 등 4억 2천만 달러 상당의 방어용 무기를 판매키로 했다고 보도했다. 당초 김정일씨는 푸틴 대통령에게 탱크, 전투기 등 첨단무기 구입을 희망했다고 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주요 언론들은, 북한이 러시아에 빚진 55억 달러를 갚기 위해 시베리아 벌목공 파견을 확대하기로 했다고 보도했다. 그것도 앞으로 30년 동안 이라고 한다. 무기 사들여 진 빚을 인민들이 갚게 하고, 또 무기를 사들이겠다니… 시베리아 밀림에 메아리치는 한 맺힌 원혼들의 절규가 두렵지도 않은 건가.

나는 왕이로소이다

작년 언론사 사장단의 방북과정에 재밌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다. 북측에서 사장단에게 ‘하늘소 고기’라는 것을 오찬 메뉴로 내놓았는데, 한 참석자가 “천연기념물인 장수하늘소를 먹어도 괜찮은가”라고 물어 봤더란다. 김정일씨는 “하늘소 고기는 당나귀 고기인데, 당나귀 고기라는 말이 귀에 거슬리니 김일성이 하늘소 고기라고 부르라 했다”고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그래서 남한에도 그 이름이 전해진 하늘소 고기. 김정일씨는 이 당나귀 고기를 무척 즐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이번에도 역시 특별열차 안에서 당나귀 고기를 드셨다 한다. 열차 안에 초대받은 한 러시아 관리는 바다가재가 산 채로 올라와 즉석에서 요리됐다고 경험을 이야기했다. 음식은 모두 북한에서 직접 가져온 것들이고, 심지어 자신이 늘 타던 벤츠승용차까지 모스크바까지 배달해왔다 한다. 과연 김정일이다.

김정일씨를 끝까지 수행했던 콘스탄틴 풀리롭스키 극동 연방지구 러시아 대통령 전권 대리인은 김정일씨가 탄 열차 안의 풍경을 비교적 소상히 알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 열차 안에는 현재 위치를 알려주는 위성추적장치가 작동되고 있었고, 영화감상을 위한 대형스크린이 있다고 한다. 또 김정일씨는 그곳에서도 인터넷을 즐겼으며 응접실에는 노래방 기기도 비치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적(赤)포도주를 여전히 즐기고 있으며 흥이 나면 러시아 노래도 불렀다는데…. 속에서 꿈틀거리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비밀을 털어놓지 못해 뒷동산에 올라가 고함을 쳤던 이야기 속의 그 사나이처럼, 당나귀를 좋아하는 김정일씨의 귀에 대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다. 언제쯤 정신을 차릴거냐고.

김정일씨가 모스크바에 머물던 날, 러시아의 인권운동가 8명이 북한 대사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 연행되었다. 그들은 ‘북한에 민주주의를’, ‘정치범 석방’ 등의 피켓을 들고 있었다. 당연히 우리도 함께 했어야 할 일을 하지 못했음을 송구스럽게 생각하며, 이 운동가들의 활동에 멀리서나마 동지적 애정과 감사를 보낸다. 러시아의 한 일간지는 김정일씨의 시베리아 기차여행을 놓고, “오랫동안 기차를 타고 올만큼 북한에는 할 일이 없는가”, “그가 역에서 출발하자 발이 묶였던 주민들이 잘 떠난다며 박수를 쳤지만 본인은 환송으로 착각했다”고 풍자했다. 아무튼 세계적으로 욕을 얻어먹으면서도 꿋꿋이 그 기나긴 여정을 마친 김정일씨에게도 수고했다고 말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