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15일 평양에서 있었던 '2001 민족통일대축전'(이하 통일대축전)은 그 파행적 진행에 따른 파문으로 남북관계는 물론 남측 정부와 민간통일운동세력에게 커다란 상처를 남겼다. 세간의 여론과 언론에 의한 비난이 빗발친 건 물론 민간 방북단 인사 중 여럿이 구속되고 국회에서 통일부장관에 대한 해임결의안이 통과되는 사태에까지 이르렀다.

지금까지 남북관계와 관련된 사항에서 항상 그랬듯이 이번에도 남측의 사회집단들은 두 개의 적대적인 진영으로 나뉘어 갈등을 빚었다. 한쪽이 '친북세력의 평양광란극'이라고 비난하자 반대편에서는 '반통일세력의 반공소동'이라고 반격하는 양상이다.

남북관계의 성격상 앞으로도 이런 파문이 재발할 가능성이 큰 만큼 이번 사태의 전말에 대해 올바로 평가하고 특히 북한 당국의, 상식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행태의 본질을 제대로 인식하는 것은 남북 민간교류의 정상적 발전을 위해 필수불가결한 일로 보인다.

통일대축전의 뿌리는 범민족대회

통일대축전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1990년부터 1999년까지 매년 8.15 때마다 계속되어 온 범민족대회를 만나게 된다. 범민족대회는 북한당국 및 어용단체들과 남한의 민간통일운동세력이 공동으로 추진해 왔으나 이를 대남 통일전선전술의 일환으로 판단한 남측 정부의 제지로 남북해외 대표단이 한 자리에 모이지 못하고 매년 남북에서 따로 진행해왔었다. 1차대회 때는 남한 내 다양한 사회단체들이 이 대회에 참가했지만 대회의 내용이 주한미군철수, 연방제통일방안 지지, 남측 정부에 대한 규탄 등 북한 노동당의 주장과 동일한 궤를 그리며 진행되자 다음 해부터 남측에서는 소수의 급진세력만이 참가하는 친북적 통일행사로 축소되었다.

북한당국은 이 대회를 남북해외의 전체 민족이 김일성-김정일 중심으로 단결하는 모양새를 만드는 데 이용한다든지 또는 대회를 계기로 발생하는 남측 정부와 친북세력과의 충돌을 남측 정부의 '반민족, 반통일성'을 입증하는 근거로 이용함으로써, 북한정권의 정통성을 선전하고 주민들의 체제이탈을 막는 수단으로 활용했다. 민간차원에서 남북간의 불신과 반목을 씻고 통일의 길을 연다는 목적을 표방했던 범민족대회는 이렇게 북한당국에 의해 대남 통일전선전술의 수단으로 이용된 것이다.

일부 맹동적 친북세력을 제외한 남한 민간통일운동세력들이 범민족대회의 흐름을 보다 온건한 방향으로 바꾸기 위해 노력했지만 이런 노력은 북한측 행사파트너인 조국통일범민족연합(이하 범민련) 북측본부와 남측 일부 친북세력의 완강한 저항으로 수포로 돌아갔다. 행사의 성격이 북측과 함께 추진하는 남북공동의 통일행사였기 때문에 북측 파트너가 거부하는 남한 사회단체들의 그 어떤 주장도 남북 사이에 합의가 될 수 없었으며 행사에 반영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범민족대회는 작년 남북 정상회담이 있고 난 후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중단되었다. 아마도 김정일은 남한에서 한참 자신의 인기가 치솟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남정책을 획기적으로 바꾼 것처럼 꾸며야 할 상황에서 구태여 소수의 맹동적 친북세력만 모은 군중집회로 남측 여론을 자극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을 것이다. 이렇게 해서 과거 범민족대회를 주도해온 범민련 남측본부와 한총련 등의 단체들은 작년 8월에는 범민족대회 대신 '6.15 남북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2000 통일맞이 대축전'을 개최하게 되었다. 맹동적 친북세력을 제외한 남한의 대다수 참가자들이 이 행사를 남북화해와 협력의 분위기를 확산할 계기로 생각한 반면 북한당국은 이를 남한 내 친북분위기의 확산과 반김정일 세력의 고립약화를 노린, 보다 유연한 통일전선전술로 간주한 것으로 판단된다.

통일대축전 추진과정과 장소문제

이러한 흐름 속에서 올해에도 북한당국은 범민족대회를 추진하지 않고 '2001 민족통일대축전'이라는 이름의 행사를 추진했다. 북한측은 올 1월 10일 평양 인민문화궁전에서 당국, 정당, 단체 대표들이 참석한 '우리 민족끼리 통일의 문을 여는 2001년 대회'를 갖고 6.15∼8.15 기간을 '민족통일촉진운동기간'으로 정해 8월 15일을 전민족통일대축전으로 장식할 것을 남쪽에 제안했다. 남측 정부는 이에 통일부 대변인을 통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때만 해도 남측 정부는 8.15 통일대축전을 남북의 민관이 함께 하는 문자 그대로의 '거족적'인 행사로 추진함으로써 6.15공동선언 이후의 남북해빙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킬 생각을 가졌다. 정상회담을 통해 북 당국이 남측 정부를 대화상대로 인정했다고 본 까닭이다. 이것은 논리적으로는 자연스러운 판단이었으나 이 기대는 그 후 북측이 남측 정부를 배제한 채 남한의 민간통일운동세력만을 행사의 남측 파트너로 인정함으로써 현실화되지 못했다. 우리 정부는 북측의 의도를 제대로 읽지 못했던 것이다.

북측의 제안이 있은 후 남측의 민간통일운동세력은 <6.15 남북공동선언 실천을 위한 2001 민족공동행사추진본부>를 결성하고 8월 1일부터 3일까지 평양에서 북측의 <6.15∼8.15 민족통일촉진운동을 위한 북측준비위원회>와 행사추진을 위한 실무접촉을 가졌다. 이 실무접촉에서 남북 양측은 8월 15일 평양에서 통일대축전을 거행하기로 합의하고 남측 대표단을 파견하기로 하였다. 남측은 당초 서울과 평양 두 곳에서 공동행사를 하기를 원했으나 북측이 올해에는 평양에서만 공동행사를 하고 서울의 공동행사는 내년으로 미루자고 해 이렇게 합의되었다

그런데 이 실무접촉에서 복병이 돌출했다. 북측이 행사를 평양에 새로 건설된 '조국통일 3대헌장 기념탑' 앞에서 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3대헌장 기념탑이란 김일성이 제안했다는 소위 조국통일 3대헌장 즉 '조국통일 3대 원칙',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 등을 기념하기 위해 평양시 통일거리 입구에 건립한 기념탑이다. 북측은 이 기념탑의 준공식(14일) 다음 날 그 앞에서 남북과 해외 대표단이 참석하는 통일대축전을 진행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만일 이곳에서 그것도 기념탑의 준공 직후에 통일행사가 열린다면 그것은 남측 대표단이 김일성이 내놓은 북측의 통일방안을 지지하는 모양새가 될 수밖에 없었다. 북측이 굳이 이곳에서 행사를 갖자는 의도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통일대축전행사를 기념탑 앞에서 하자는 북측의 제안에 부담을 느낀 남측 추진본부는 이에 응할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양측은 이를 미합의로 남겨두고 추후 논의하기로 했는데 이것이 결국 8.15 당일 행사를 파행으로 이끈 불씨가 되었다. 그 후 확인되었듯이 북측은 행사를 3대헌장 기념탑 앞에서 치를 생각이 확고했고 무슨 수를 쓰든 남측 대표단을 이 행사에 참석시킬 생각이었던 것이다1). 당연히 북측은 그 후에도 행사 개최장소를 변경해 달라는 남측 추진본부의 요청을 완강히 거부했다. 이렇게 장소문제가 미해결인 상태에서 남북 양측은 행사를 맞게 되었다.

한편 남측 정부는 8월 13일까지도 행사장소가 변경되지 않는 한 남측 대표단의 방북을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 입장에 변화가 온 것은 행사 전날인 14일이었다. 그 전날까지 방북을 불허하던 통일부는 애초의 불허방침을 철회하고 3대헌장 기념탑 앞 행사에 참관하지 않겠다는 남쪽 대표단의 각서와 함께 별도의 장소에서 공동행사를 치르는 조건으로 대표단의 방북을 승인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통일부 당국자는 이때 "정부가 시종일관 견지해온 기념탑 앞 행사 절대 불가 방침이 충족된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통일부가 무슨 근거로 정부의 방침이 충족되었다고 판단했는지 분명치는 않지만 만일 남측 대표단 지도부의 각서만을 받고 안심했다면 북측과 남측 대표단 내부 친북인사들의 행태에 대해 너무 안이하게 판단한 셈이다. 어쨌든 이렇게 하여 남측 대표단은 원래 예정된 시간보다 한참 늦게 인천공항을 떠나 평양으로 향할 수 있었다.

행사파행의 전말

행사 후 평양에 갔던 남측 대표단의 한 인사는 이렇게 말했다. "[장소문제로 난항을 겪다가] 마지막에 북쪽이 이야기를 바꿔서 참관 형식으로 와 부문별 대화에 집중하자고 해서 남쪽 민족공동행사 추진본부는 '참관은 자의적으로 할 수 있고 강제적 요소가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 또 대표단 스스로 모든 문제를 결정할 수 있으리라 믿었다. 그래서 정부에 3대헌장 기념탑에 가지 않겠다고 하고 참가했다." 그러나 이들의 기대와 달리 북측은 시종 남측 대표단에게 기념탑 앞 행사에 참여하도록 종용했고 남측 대표단 중 범민련 남측본부,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 한총련, 민주노동당 등 통일연대 소속 100여명의 인사들은 남측 지도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북측이 준비한 버스를 타고 행사장으로 갔다.

북측은 기념탑 부근에 2만여 명의 평양 시민들을 오전부터 대기시켜 놓고 고려호텔 앞에는 기념탑으로 향할 버스를 대기시켜 놓은 상태에서 남측 대표단에게 행사참여를 요구했다. 애초 기념탑 앞에서 행사를 치르는 것이 목적이었던 북측으로서는 이 문제로 남측 통일운동세력이 겪을 어려움이나 그 내부에 빚어질 갈등 따위는 안중에 없었다. 따라서 남측 대표단 지도부가 행사 참여여부로 격론을 벌이고 있는 와중에2) 개별적으로 직접 남측 인사들에게 행사참석을 요구했던 것이다. 이러한 북측의 행위는 상식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남측 대표단의 불참방침이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분명하게 전달된 상태에서 그 구성원들에게 개별적으로 공식입장에 반하는 행동을 유도하고 일방적으로 행사를 진행했다면 이는 공동행사의 취지에 어긋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남측 민간통일운동세력을 대화의 파트너로 보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북측의 정략적 필요에 따른 이용대상으로 본 셈이었다.

남측 대표단 중 민주노동당 등 통일연대측 인사들은 "북녘 동포들이 뙤약볕에도 불구하고 기다리고 있다는데 우리가 안가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주장하며 북측이 준비해둔 5대의 버스에 나눠 타고 6시 20분께 호텔을 떠나 3대헌장기념탑으로 향했으며 소설가 황석영씨도 동행했다. 그러나 북한체제의 속성으로 보아 뙤약볕 밑에서 2만여 명의 평양시민이 이들이 오기를 기다린 것은 당연히 당국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북측은 평양시민을 볼모로 남측 대표단내의 친북인사들에게 행사참여의 명분을 만들어 준 것이다. 남측 대표단은 이날 밤 북측에 이러한 행위의 시정을 요구하는 항의문건을 보냈는데 북측은 답신에서 오히려 남측 추진본부 일부 사람들이 기념탑 앞에서 열린 대축전 개막행사에 참석하는 것을 거부함으로써 엄중한 복잡성이 생겼다고 주장하며 유감을 표했다. 그야말로 적반하장이었다.

그러나 남측 대표단의 이 같은 항의에도 불구하고 북측의 상식을 벗어난 행태는 계속되었다. 다음날 폐막식후의 야외행사장에 다시 한번 남측 인사들을 버스로 실어 나른 것이다. 이러한 북측 행태의 절정은 모든 행사가 끝난 후 발표한 '공동보도문' 내용의 조작이다. 애초 북측은 제시한 초안에 '외세의 간섭과 전쟁의 근원을 제거하며'라는 의도성 짙은 구절을 넣었다가 남측의 반대로 이를 삭제했었다. 그런데 북한 중앙TV를 통해 보도된 공동보도문에는 남측과 합의 당시 삭제했던 이 대목을 넣어 발표한 것이다. 마치 그 내용에 남북이 함께 합의한 것처럼 돼버렸다. 이것은 행사 당일 군중집회에서 북측 김영대 축전준비위원장이 "민족의 자주권을 억압하는 미국의 전쟁책동을 반대하고..." 운운하는 연설을 한 것이나 안경호 부위원장이 미군철수 문제를 언급한 것과 같은 맥락이었다. 이는 이 행사가 북측의 정치적 입장을 선전하는 데 남측 대표단을 들러리로 이용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 후 남한에서 전개된 사태는 익히 알려진 대로다. 그간 남측 정부의 포용정책에 비판적이던 우익 언론이나 정치인들이 비난의 포문을 연 것은 물론 포용정책을 지지해 온 사람들조차 북측과 그에 발맞춘 남측 일부 인사들의 몰상식한 행태에 비판적 시각을 감추지 않았다. 북측 당국과 일부 친북인사들의 이 같은 행태가 포용정책의 대중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남북 간의 불신을 조장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남한 내에서 북한에 대한 시각은 다시 냉랭하게 얼어붙게 되었다.

파행의 배경과 북측의 의도

행사 기간에 보여준 북쪽의 행태는 단순히 우발적인 것으로 보기 힘들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 범민족대회 등 남북공동행사가 추진되어온 지난 10여 년 간 너무도 자주 되풀이 되어온 것이기 때문이다. 과거 범민족대회에 참가해본 사람이라면 북측의 행태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남측의 많은 단체들이 남한 내부 실정을 고려해 대중적인 통일운동을 주장해도 북측은 이를 무시하고 연방제지지, 주한미군철수, 남측 정부 규탄 등의 내용을 가진 노골적인 친북행사로 몰아갔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이번 통일대축전의 파행은 처음부터 예정된 것이었다. 애초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치르자는 남측의 요구를 거부하고 평양에서만 행사를 치르겠다는 북측의 태도에 그 전조가 암시되어 있었다. 남북화해협력의 기운을 높이고 통일운동을 확산시킬 목적이라면 북측이 서울에서의 공동행사를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북측이 이를 거부한 것은 아마도 연초에 동결된 남북관계의 경색국면을 더 유지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북한 당국은 이미 작년 가을부터 남북 당국간의 여러 합의사항의 이행을 늦추며 남북관계의 진전에 제동을 걸고 있었다. 미국의 부시행정부가 들어서 대북정책 재검토 의사를 표명한 것은 북측으로서는 울고 싶은 사람 뺨 때려주는 격이었다. 남북관계 동결의 책임을 미국 쪽에 떠넘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작년 10월 노동당 창건 기념행사 때는 일부 남측인사들이 금수산궁전, 만경대 등의 방문을 희망했을 때 남측 여론의 반응을 우려하며 돌출행동을 삼가도록 충고까지 했던 북측은 올 8.15행사에서는 목적의식적으로 돌출행동을 유도했다(당시 행사에 참관했던 한 남측인사는 이것을 북한의 대남정책이 변한 증거로 제시하기도 했었다). 이것은 작년과 올해의 달라진 환경 때문으로 해석된다. 작년의 경우는 북한 당국으로서도 정상회담을 통해 고조된 남북협력 분위기를 그토록 빠른 시일 내에 다시 냉각시키는 것이 부담이 클 뿐만 아니라 남측으로부터 여러 가지 실리를 얻어내는 데 장애가 될 것으로 본 반면, 올해에는 어차피 당분간 남측으로부터 얻어낼 것이 별로 없는 마당에 남북관계 개선의 희망만을 부풀릴 대규모행사를 서울에 와서 함께 치를 의사가 없었다는 것이다. 평양의 비상식적인 행태는 결코 우발적인 것이 아니었으며, 북측 당국이 만든 치밀한 각본에 따라 북측 준비위가 감독하고 남측 친북인사들이 주연한 일련의 계획된 작품이었다. 북측은 올 8.15에도 과거와 마찬가지로 통일행사를 정권 안정화 그리고 북한 주민들에 대한 세뇌의 수단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적극적으로 북측의 의도에 부화뇌동한 일부세력을 제외한 대부분의 남측 대표단은 이러한 사정을 모르는 상태에서 북한 당국의 의도를 관철하는 데 들러리가 되고 말았다. 이번 행사는 결과적으로 북측이 통일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남한 민간통일운동을 어떻게 정략적으로 이용하는지를 다시 한번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남측 대표단의 책임과 과제

북한 당국이 매번 이런 식으로 통일행사를 정략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요구를 관철하는 데 앞장서온 남한의 친북인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수적으로는 비록 소수라 하더라도 남북 민간교류에서는 북측의 적극적인 지원 하에 실제 세력 이상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가 있다. 이들의 입장은 곧 북측의 입장이므로 북측과의 교류를 원하는 세력들은 그 누구도 이들의 입장을 무시할 수 없다. 남한 내 친북세력과 합의가 안 되는 것은 당연히 북측과도 합의될 수 없으며 따라서 북측과의 교류를 원하는 사람, 원하는 단체는 누구라도 친북세력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거부하는 단체들은 북측에 의해 교류대상에서 배제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

이들 친북인사들은 북측의 요구를 달성하는 데 장애가 된다면 우리 정부나 다른 민간단체들과의 약속 같은 것은 휴지조각처럼 취급해 왔다. 이번에도 평양에 간 통일연대측 인사들은 자기 단체의 간부가 조직을 대표해서 정부 당국과 약속한 것은 안중에 없이 북측 요구대로 행동했을 뿐만 아니라 돌아와서도 약속을 어긴 데 대해서 아무런 반성의 자세도 보여주지 않았다. 오로지 남한 내 '수구세력'이 통일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자신들을 근거 없이 매도한다는 반응뿐이었다. 이들에게는 자신들의 상식을 벗어난 행동이 남측의 이른바 수구세력의 대북비판보다 몇 배나 더 민간통일운동단체들의 입지를 어렵게 만든 요인이 되었을 뿐 아니라, 통일을 바라며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대다수의 중도적 사회집단들이 그들의 행태를 비판하고 있다는 사실 따위는 관심사가 아니다.

일부 친북인사들과 다수 대표단은 구별해 보아야

이들 친북세력을 제외한 다수의 남측 대표단은 북측의 의도에 부화뇌동할 목적으로 평양에 갔다고 볼 수 없다. 이들은 아마 당국간 대화가 동결된 상황에서 민간교류를 통해 대화의 물꼬를 트겠다는 소박한 생각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행사후 내심 북한 당국과 남측 친북인사들에 대해 커다란 불신을 갖게 되었겠지만 적어도 표면상으로는 행사와 남측 대표단의 일탈행동을 변호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이것은 자신들이 북측의 문제점을 공개적으로 드러낼 경우 남한 내에 매카시즘이 기승을 부리고 수구적 우익이 이를 기화로 남북화해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지나 않을까 염려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북한 당국은 지금까지 남한 통일운동세력의 바로 이러한 선의를 자신들의 반민족·반통일적인 목적을 관철하는 기회로 이용했다. 만일 남측 추진본부의 다수가 북측의 몰상식한 행위에 대해 공개적으로 비판하고 강력하게 문제를 제기할 것으로 예상되었다면 아무리 철면피 같은 북한 당국이라 하더라도 남한의 민간통일운동세력의 대다수를 적으로 돌리고 남한 내 친북세력의 몰락을 가져올 그같이 무모한 행위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요컨대 북측은 남한 민간단체들을 자신들이 무슨 짓을 해도 반발하지 못하고 끌려올 '만만한 대상'으로 보았던 것이다.

이 행사가 있은 지 얼마 후 북한 당국은 남한 정부에 대화를 제의해왔다. 또 북측의 민족화해협의회는 남측 민간단체들에 평양축전공동보도문 실천을 위한 실무협의를 제의해 왔다. 남측 추진본부 인사들은 이러한 사실들을 근거로 일부 친북인사들의 몰상식한 행태는 비록 문제가 있지만 이 때문에 이번 행사 전반을 부정적으로 보는 것은 자신들의 진심을 몰라주는 냉전적 대결의식의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생각은 정확하다고 볼 수 없다. 우선 이번 행사의 성과와 관련해서 살펴보자. 행사 후 북한 당국이 우리 정부에 대화를 제의해 온 것은 통일대축전의 성과라기보다는 남북대화를 원하는 중국 장쩌민 주석의 평양방문과 축전행사 이후 남한 여론이 극히 악화되고 남측 정부의 포용정책이 위기에 놓인 상황을 고려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전문가들은 북한이 장쩌민의 평양방문 직전에 대화제의를 한 것은 장쩌민 방문 후 제의를 할 경우 중국의 지시에 따른 것으로 비칠 것을 우려했기 때문으로 분석하고 있다. 또 남한 내 문제와 연관시켜 보자면 민간통일운동세력의 노력 때문이라기보다는 반대로 이번 행사에 대한 남한사회 내 비판적 여론이 미친 압력 때문이라고 보는 게 더 논리적이다. 이번 행사의 후과로 임동원 당시 통일부장관 해임안이 국회에서 처리되기 전날 그런 제의를 해왔다는 것은 북한 당국이 행사 파행에 따른 남한 여론을 크게 부담스러워 했다는 하나의 방증이다. 이어서 며칠 후 북측의 민족화해협의회가 평양축전공동보도문 실천을 위한 부문별 실무협의를 제의해 온 것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다. 평양에서 그토록 남한 민간단체들을 무시한 북한 당국이 새삼 남한 민간단체들의 요구를 배려해 원치 않던 남북대화 제의를 했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남한 민간통일운동세력이 남한 내 수구우익세력이 두렵다하여 북측의 반통일적인 행태를 묵인할 때 이번과 같은 일은 끝없이 되풀이되고 의도와 달리 매번 매카시즘이 힘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보다 더 큰 비극은 이들의 선의가 북한정권의 주민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데 이용됨으로써, 통일이 아니라 독재체제의 유지에만 공헌할 것이라는 점이다.

덧붙이는 말

이제까지 통일대축전 파행의 전말에 대해 살펴보았는데 한 가지 추가로 짚을 게 있다. 그것은 이번 통일대축전 파문에 대한 우리사회의 대응방식 문제이다.

파문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통일연대측 인사 7명이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되었다. 이들의 행태가 상식의 궤를 벗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 모두를 국보법을 적용해 구속하는 것이 옳았는지는 의문이다. 북측과 남한에서의 반정부투쟁을 협의한다든지 하는 명백한 반국가적 행위가 있었다면 이에 대해서는 사법처리를 피할 수 없겠지만 단순히 북한체제나 김부자를 찬양하는 의사표현만을 가지고 사법처리 하는 것은 사상과 양심의 자유에 대한 논란을 불러오고 민주주의 원칙을 중시하는 건전한 중도세력들이 심정적으로 이들에게 동조하게 만드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이제 우리 국민은 체제비교에서 남한이 북한에 대해 비할 바 없이 우월하다는 것을 잘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소수의 친북세력이 아무리 준동을 한다 한들 그것 때문에 남북한사회 비교인식에 혼란을 일으킬 가능성은 작다. 오히려 사안의 경중을 가리지 않고 사법처리 할 때 정말 단호히 처리해야 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하는 기준이 흐려질 가능성이 크다. 북한 독재체제의 통치엘리트의 산실인 '만경대 혁명열사유자녀학원'을 떠올리며 "만경대 정신 이어받아 조국통일 앞당기자" 운운하는 몰상식한 사람이 대학교수로서의 자질을 갖추고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그렇다고 이런 행위들을 사법처리 방식으로 다루는 것은 우리사회의 민주역량을 너무 약하게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이런 상식에 어긋나는 행태는 여론의 비판에 맡겨도 충분히 자정효과를 볼 수 있을 만큼 우리 국민의 이념적 판단력은 성숙되었다고 판단된다. 앞으로도 이런 파문이 빈발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이 문제에 대한 사회적 기준을 옳게 세우는 것도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주)

1) 남측 대표단의 일원으로 평양에 갔다 온 한 인사의 말에 따르면 행사장소 문제로 정부의 허가가 늦게 떨어진 관계로 평양에 도착할 즈음이면 이미 기념탑 앞의 행사는 끝났을 것이고 이 문제는 자연히 매듭지어질 것으로 믿었다고 한다. 그러나 북측은 남측 대표단이 도착할 때까지 2만여명의 평양시민들을 대기시켜 놓고 행사를 연기시킨 채 기다리고 있었다. 북측이 얼마나 집요하게 남측 인사들의 행사참여를 꾀했는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2) 남측 대표단을 구성하고 있던 7대교단,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통일연대 중에서 앞의 두 단체가 정부와의 약속을 들어 기념탑 행사에 불참할 것을 주장한 반면 통일연대측 인사들은 행사 참석을 강력하게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