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당신은 전철역에서 위급한 상태에 처해있는 취객을 구해주었다. 당신의 행동은 자신의 목숨을 돌보지 않고 타인을 구한 의로운 행동으로 박수를 받고, 언론에서도 이를 크게 보도하여 당신은 일약 의인(義人)이 되었다. 여러 사람들이 찾아와 당신을 취재 보도하고, 장한 일을 했다며 도처에서 격려금을 보내왔다.

여기까지는 그렇다 치자. 그런데 상업적인 기사를 쓰기 좋아하는 일부 기자들이 당신의 의로운 행동과는 상관없는 개인적 취향이나 사생활, 숨기고 싶었던 과거의 선행까지 찾아내 부풀린다면 당신은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 심지어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초인적인 영웅으로 추켜세운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래, 보고 따를 만한 대상은 '만들어질' 필요가 있어"하면서 내버려 둘 것인가. 스스로 더욱 영웅처럼 행동할 것인가. 기본적인 양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칭찬의 한도를 넘어선 이러한 행동에 오히려 분노할 것이다. 그리고 자제를 요청할 것이다.

다른 측면에서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 당신은 어느 나라의 국가적 위기를 앞장서 해결하여 전 국민적인 추앙을 받는 대상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당신이 국가의 최고 지도자가 되어주길 원했고, 당신의 애국심은 국민들의 이러한 요구를 받아들였다. 당신의 리더십과 올바른 정책은 위기에서 벗어난 조국의 위상을 더욱 높이 올려놓았다. 국민들은 더욱 소리 높여 당신을 국가의 영웅, 세기의 지도자로 칭송했다.

여기까지는 그렇다 치자. 그런데 어느 날 국민들이 당신을 위해 15m 높이의 대형 동상을 수도 한복판에, 그것도 황금으로 칠하여 세운다고 하면 당신은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 또 당신의 업적을 찬양하는 책을 만드는데, 있지도 않은 일화들을 만들어 내고, 하찮은 일을 대단한 일인양 꾸며냈다고 하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나아가 모든 관공서와 사무실에 당신의 초상화와 흉상을 걸고, 그것 앞에 고개를 숙이지 않으면 처벌하는 법을 만들고, 당신이 했던 연설문을 암송하는 것을 운동을 의무화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국민들이 그렇게 하고 싶다는데 낸들 어쩌겠어" 하고 내버려 둘 것인가.

지금까지 한 이야기는 북한과 전혀 상관이 없는 이야기다. 김정일씨는 국가적 위기를 해결한 지도자가 아니고, 국민적 추앙을 받은 바도 없으며, '당신이 국가의 최고지도자가 되어주시오' 라고 국민들이 요구한 적도 없고, 올바른 정책으로 조국의 위상을 드높인 바도 없기 때문이다. 또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동상을 세우는 것도 아니고, 자발적으로 위인의 일화를 만들어 내는 것도 아니며, 이른바 '노작'을 자발적으로 외우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자발적으로 국민적 지지와 존경 속에 이루어진 일이라 하더라도, 정상적인 사고체계를 가진 지도자라면 자신에 대한 과도한 존경이나 추앙, 숭배를 스스로 물리칠 것이다. 쓸데없는 에너지를 그런 부분에 낭비하지 말라고, 나 개인이 잘나서가 아니라 국민들이 위대하기 때문이라고 - 비록 말뿐일지라도 그렇게 - 국민들을 설득하고, 혹 화를 내며 엄하게 꾸중할 수도 있다. 어찌 보면 지나친 권력집중과 우상화를 차단하고 잘 타이르는 것도 하나의 리더십이다.

설령 내가 그런 융숭한 대접을 받을 만한 일을 했다 하더라도, 나를 위해 죽니 사니 하는 노래를 목전에서 듣는다면 얼마나 낯간지러울까. 그렇게 존경받는(?) 사람이 되어보지 못해서 모르겠지만, 필자라면 의자 밑에라도 숨고 싶을 지경이겠다. 그런데 참 낯짝 두꺼운 김정일씨는 스스로 그러한 작업을 주도했고, 이제는 그 대상이 되어 발아래 인민들을 굽어보고 있다.

비스듬하게 글 쓰는 것은 서체의 혁명?

북한의 김정일 찬양을 보면 듣는 사람으로서도 참 낯간지러울 때가 많다. 예를 들어 지난 남북정상회담 이후 북한은 각종 대남선전방송을 통해 "지금 한국에서는 김정일 장군님 입었던 인민복이 없어서 못 팔 지경이고, 머리 모양, 말투를 따라 배우는 열풍이 대단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 남북공동선언에 서명된 김정일의 서체에 대해 남한의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의 칭송이 자자하고, 이 글씨체를 따라 배우는 것이 유행처럼 번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북한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대내용 방송이라면 모르겠으되 대남 방송에 어떻게 이런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내보내는지, 그 배짱 한 번 좋다. 아무튼 남한 사람들이 '눈물 흘리며' 본다는 그 김정일의 서체를 북한에서는 '백두산체'라고 명명하였다. 또 김일성의 서체를 '태양체',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의 서체를 '해발(햇발)체'라고 이름 붙였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숙, 이 세 사람은 '백두산 3대 장군'이라고 한다.

김정일 글자체의 특징은 정자로 바르게 쓰지 않고 비스듬하게 쓴다는 것이다. 그리고 매 글자의 자모음을 갈기듯 이어 쓰는 버릇이 있다. 김정일씨의 필체는 그리 나쁘지는 않다. 반듯하게 쓴 것은 아니지만 읽을 수 있을 정도이며, 명필까지는 아니지만 악필이라고 할 정도도 아니다. '시원시원하게 보인다'고 혹자가 말한다면, 뭐 그렇게도 보인다고 수긍할 수도 있다. 김일성의 서체도 김정일과 마찬가지로 약간 비스듬히 기울여 연결해 쓰는 것이 특징이다.

그런데 그 정도면 됐지 뭘 더 바라는지, 북한에서는 이를 '서체의 혁명'이라고 이야기한다. 훈민정음은 점, 세로획, 가로획, 비낀획, 둥근획이라는 다섯 가지 요소로 구성돼 있지만 경사체는 가로획과 세로획을 쓰지 않고 점과 등근획 및 비낀획의 3가지 요소를 가지고 우리 글을 모두 표기할 수 있기 때문에 '서체의 혁명'이라는 것이다.

나아가 "우리 민족서예가 백두산 3대 장군의 필체에서 비롯"되었으며, "위대한 서예의 절정"으로 "힘있고 굳세며 활달한 명필체"이며, "글씨 구성이 완벽하게 조화되고 글의 뜻과 내용이 선명하고 감명깊게 형상"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또 "그 시작으로부터 끝날 때까지 중단함이 없이 명제와 명문장, 명문구로 필을 달리는 일필휘지의 절정"이라고 까지 이야기한다.

상황이 이 정도쯤 되면, 김정일씨의 글씨체를 그냥 좋게 평가해 주고 싶던 마음마저 싹 달아나고 만다. 글씨를 비스듬히 이어 쓰는 것이 무슨 특별한 능력이라고 '혁명'이라 추켜 올리며 명필과 일필휘지를 운운하는지. 김정일씨 말고도 글씨 비스듬히 눕혀 쓰는 사람은 많고도 많다. 김정일의 글씨체가 못 봐줄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따라 배우고 싶을 정도로 좋은 글씨체는 아니지 않은가.

자랑할걸 자랑해야지

"장군님께서는 그토록 좋아하시는 음악감상과 매일 빼놓지 않는 독서도 현지지도의 길에 오른 열차와 야전용 승용차 안에서 하신다. 음악을 들으시면서 동시에 책도 읽고 저술도 하시며 문서도 보시고 결론도 주시는 것이다. 얼마나 할 일은 많고 시간이 없으시면 이렇게 하시겠는가. 그래서 늘 하루가 24시간밖에 안 되는 것이 안타깝다고 하시면서 차안에서 쪽잠으로 피곤을 푸시고 주먹밥으로 요기를 하시는 장군님이시다."

북한의 대남선전방송인 '구국의 소리'의 최근 방송 내용 중 한 구절이다. 참 눈물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일단은 이 내용은 곧이곧대로 인정해보자. 김정일씨가 음악도 듣고, 동시에 책도 보고, 글도 쓰고, 전화도 받고, 보고서도 읽고, 결재도 한다는 것은 북한이 여러 선전매체를 통해 주장한 내용이다. 대표적인 친북인사로 지목되는 한 재미언론인이 어느 잡지에 김정일의 이러한 일처리 방식을 긍정적으로 쓴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이것이 어찌 정상적인 사람이 할 행동인가. 난잡하고 정세가 심히 불안정한 사람들이나 할 행동이 아닌가. 예를 들어 당신의 자녀가 노래 들으면서 책을 펴놓고, 한 손에는 펜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포크를 들어 간식을 먹으면서, TV까지 켜놓고 보고 있다면 이를 두고 '하루가 24시간밖에 안 되는 것이 안타까운' 수험생의 모습이라고 칭찬하겠는가.

또 북한의 선전 중엔 김정일이 밤늦게 업무를 보다가 (김정일은 새벽에 잠이 들어 오후에야 일어난다고 한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늦은 밤중에도 작성자에게 전화를 해 물어본다는 일화가 있다. 이것 역시 김정일식 사업방식으로 모든 문제를 즉석에서 해결하는 호쾌한 성격의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것 또한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아무리 부하직원이라 하더라도 새벽에 전화를 걸어, 비몽사몽간에 있을 사람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이 정상적인 사람이 할 행동인가. 기본적인 예의도 없는 행동 아닌가. 도대체 이런 것들을 무슨 자랑이라고 떠드는 건지, 이러한 선전들을 알고 있을 김정일씨는 과연 이것을 자랑이라고 생각하며 허락하는 건지 참으로 궁금하다.

최근에 북한의 선전방송 중엔 이런 내용도 있다. 김정일이 이번 러시아 방문중 한 연구소에 들렀을 때 원자로 터빈을 만져 보면서 연구원들에게 45도 각도 짜리는 없느냐고 물어봤다고 한다. 질문을 받은 연구원들은 김정일의 이 질문에 놀랬다고 하는데 "45도 각도 짜리를 이야기하는 것은 터빈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다는 증거"라고 칭송했다고 한다. 지난 중국 방문 때도 컴퓨터 공장을 들러 하드웨어 각 부품의 이름들을 늘어놓아, "컴퓨터에도 전문적인 지식이 있다"고 대내외에 선전하였다.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고, 못하는 일이 없는 장군님'이란다.

한 나라의 최고지도자가 각 분야에 박학다식하다는 것이 결코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대단한 자랑거리인 것은 아니다. 정말 자랑스러운 지도자는, 자신이 모든 것을 관장하고 모든 분야에 최고인 '수퍼맨'이 아니라, 모르는 것은 물어 배우고, 능력있는 전문가를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일을 분담할 줄 아는, 그런 사람 아닌가. 김정일씨는 지금이라도 나는 모든 분야의 최고여야 한다는 그 슈퍼맨 콤플렉스를 버리고, 무엇이 진정 지도자의 역할인지를 생각하며 진지하게 면벽(面壁)수행하길 바란다.

참, 글을 마치면서 한마디만 덧붙이자. 김정일씨, 글씨는 마음의 표현이라고 하지요? 앞으로는 삐뚤게 쓰지 말고 반듯하게 쓰세요. 듣고 계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