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렌. 당신과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 대한민국에서 편지를 띄웁니다. 요즘 뉴스를 통해 당신 나라의 불안한 소식을 자주 듣습니다. 그럴 때마다 혹시나 당신에게 무슨 일이 있지는 않을까 걱정이 됩니다. 먼저, 당신의 안부를 묻습니다.

9월 11일, 당신 나라에 일어난 끔찍한 사건을 몇 분 후에 나도 TV 화면을 통해 보았습니다. "영화의 한 장면 같다"는 표현은 사건을 경험한 당사자들에게는 너무도 잔인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이미 20세기와 함께 작별을 고했어야 할 사건이, 온 인류가 새로운 화합과 평화의 시대를 합창해야 할 21세기의 서두에 일어났다는 사실에, 나도 몸서리치며 슬퍼했습니다. 당신이 받았을 충격과 분노는 나보다 더 컸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요인을 암살한다든지 군사시설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민간항공기를 자폭 무기로 삼아, 세계 각 국에서 모인 수 천 명의 민간인이 근무하고 있는 무역센터를 공격한 이번 테러는, 미국의 중동정책에 대한 항의나 규탄 등 어떠한 명분으로도 합리화 될 수 없습니다. 어떻게든 더 많은 사람을 죽이면 죽일 수록 좋다는, 자신이 싫어하는 나라가 혼란에 빠지면 빠질수록 좋다는, 인간의 정상적 정신상태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이런 행동을 나는 '악마'라는 말로 밖에는 달리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이런 악마 같은 행동을 어떻게든 이해하자 주장하고 서둘러 대변인의 자세를 취해주는 일체의 발언과 행동에도 나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헬렌. 이곳 한국에서도 일부 사람들은 "9.11 테러는 미국 패권주의의 결과물이며 자업자득"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에게 "당신의 가족과 애인이 그곳에 있었다 하더라도 그러한 말을 할 수 있겠느냐"고 묻고 싶습니다. 또한 설령 미국의 패권주의의 업보라 한들, 앞서 말했듯 그것이 수천의 민간인을 학살한 명분이 될 수 있는지를 묻고 싶습니다. 또한 일단의 평화주의자들은 "미국의 이번 대테러 전쟁은 테러의 불씨를 오히려 키우게 될 것"이라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대책 없는 평화주의자들에게 "그럼 대안은 무엇이냐"고 묻고 싶습니다. 반성하고 자숙하며 그동안 미안했다고 고개 숙여 사과하는 것이 테러를 근절시키는 방법이냐. 그것이야말로 테러분자들이 노리는 결과일 것입니다. 더욱 단호하게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고 테러분자들이 설 곳은 지구상 어디에도 없음을 확실히 보여주는 것만이, 안타깝지만 지금으로서는 유일한 해결책인 듯 싶습니다.

2.

그러나 헬렌. 나는 당신 나라가 주도적으로 이끌어가고 있는 전쟁에 지지의 뜻을 표하려고 오늘 이렇게 편지를 쓰는 것이 아닙니다. 헬렌, 이번 테러와 미국의 패권주의를 나는 연결해서 생각하고 싶지 않지만 - 그렇게 생각하는 것을 '반대'하지만 -, 나는 이번 기회에 당신 나라가 그동안의 대외정책을 되돌아보고 잘못을 수정하는 계기로 삼았으면 합니다. 화제를 돌려 '탈레반'에 대한 이야기를 먼저 합시다.

헬렌, 당신은 올해 초 아프가니스탄의 집권 탈레반이 53m나 되는 세계 최대 높이의 불상을 파괴한 사건을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유네스코를 비롯한 각종 국제기구들이 보호가치가 있는 세계적인 문화유산이므로 훼손을 중단하라고 수 차례 경고하고 청원했음에도 그들은 로켓포와 다이너마이트를 동원해 보란 듯 폭파해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이슬람 계율에 따라 모든 조각상은 파괴해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야만적인 반달리즘에 전 세계가 경악했었습니다.

당시 나는 '너무했다'는 정도로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이번 테러사건의 배후로 오사마 빈 라덴이 주목받고 그의 지원을 받는 정권이 탈레반이라고 알려지면서 이들이 어떤 정책을 취해 왔는가에 새삼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익히 알고 계실테지만 탈레반은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이슬람국가를 건설한다는 명목 아래 이슬람교가 아닌 모든 종교를 배척하고 TV, 영화, 음악 등의 시청을 금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범죄를 척결한다는 이유로 공개처형과 수족절단 등을 도입했고, 또 여성을 철저히 차별해 항상 차도르를 쓰도록 하고, 학교, 직장에 다닐 수 없으며, 심지어 병원 치료도 제대로 받을 수 없게 했습니다. (꼭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것은 절대 이슬람 본연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슬람을 잘못 믿고 있던지, 아니면 이용하고 있는 것뿐입니다)

헬렌, 나는 당신 나라가 테러지원국으로 지목한 나라들의 공통점을 특정한 종교나 율법, 혹은 마약판매나 생화학무기 보유 같은 것에서 찾고 싶지 않습니다. 이들 나라의 본질적인 공통점은 '독재국가'라는 것입니다. 이들이 테러를 하고, 테러를 지원할 수 있는 배경은 종교적 신념이나 불법적인 달러, 가공할 무기가 아니라, 범죄자를 제어할 수 있는 '민주주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전 세계를 민주화하는 것만이 테러를 근절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헬렌, 나는 이 지점에서 20세기 미국의 대외정책은 상당히 이기적이었다는 비판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언젠가 나는 당신에게 중국의 인권문제와 북한의 인권문제를 대하는 미국의 이중적 태도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도 미국은 중국의 한 언론인이 반체제적인 글을 써 투옥되어 있는 사실을 비판하며 중국의 인권문제를 거론하였습니다. 물론 이러한 언론탄압은 있어서 안되고 중국의 제반 인권상황은 당연히 개선되어야 하겠지만 북한의 인권상황이 중국의 그것보다 수 백, 수 천 배 뒤쳐져 있다는 것을 당신 역시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왜 미국은 유독 중국의 인권문제에는 그리 민감한 것일까. 그건 솔직히 중국이 미국의 경쟁국이기 때문 아닙니까?

나는 미국의 정치인들 역시 국민들을 상대로 정치를 해야 하고, 그래서 당연히 국익에 따라 움직일 수밖에 없음을 이해합니다. 당신 나라는 세계를 위해 무조건 희생하고 봉사하는 '천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자국의 이익과 관계 있는 부분에는 인권을 앞세우고 민주주의를 주장하지만 그와 상관없는 지구촌 소식에는 침묵했던 과거를 반성해야 합니다. 그것은 큰 나라의 책임과 역할에 맞는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또한 당신 나라가 과거 패권을 다투던 나라들의 영향력을 억제하기 위해 3세계의 독재정권을 지원하고 묵인했던 것도 이제 마땅히 반성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강대국 사이의 경쟁에서 일시적인 우위를 점하게 했을지 모르나 결국 부메랑이 되어 당신 나라에게 돌아오고 있지 않습니까. 나는 한국 국민들 일부의 반미감정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봅니다.

진정 미국이 민주주의를 사랑하고 세계의 평화를 바란다면 나는 이제 국익의 틀을 뛰어넘어 생각하고 행동하는 '큰' 자세를 보여주길 바랍니다. 미국 본토에 테러를 가한 세력을 응징하는데 선차적 힘을 집중하는 것도 이해가 되지만, 미국에게 직접적으로 테러를 가하든 가하지 않든 인민을 학살하고 탄압하는 독재국가들에게 항의하고 그 나라 민주화운동을 지원하는데 이제라도 관심을 쏟기를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북한보다 더 심각한 反민주, 인권탄압이 벌어지고 있는 곳이 또 어디 있습니까.

3.

헬렌. 이 편지는 당신과 나만 보는 편지가 아니기에 나는 북한의 현실에 대해 조금 설명하고자 합니다. 북한을 그저 '독재국가'라고 말한다면 너무도 부족한 느낌이 듭니다. 우리는 북한을 '수령절대주의 사회'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이 말도 북한 인민들의 끔찍한 현실을 묘사하기에는 여전히 부족합니다. 지금 한국에는 북한에서 탈출해온 탈북자들이 1600명을 넘어섰습니다. 이들이 전해오는 북한소식은 참혹하기만 합니다. 지금 북한은 인류 역사상 한번도 있어본 적이 없는, 사람을 사람이 아니라 짐승과 노예처럼 만들어버린 그런 사회라고 말해야 아주 조금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봅시다. 북한에서 공개처형은 너무도 비일비재합니다. 그들은 무슨 특별한 죄를 지어서 죽는 것이 아닙니다. 매년 초에 수령이 발표하는 신년사를 외우지 못했다는 이유로 죽는 사람도 있고, 강냉이 몇 알을 훔쳐 먹다 그 자리에서 즉결 사살된 사람도 있습니다. 일하던 도중 외국 노래를 흥얼거렸다는 이유로 맞아 죽은 사람도 있고, 재봉기의 바늘을 실수로 부러트렸다는 이유로 죽도록 고문을 당한 경우도 있습니다. 또 굶주림을 참다 못해 중국으로 도망갔다가 잡힌 사람들은 강제수용소로 끌려가 최후를 맞아야 하고, 한국의 정보기관과 접촉했다는, 하지도 않은 일을 자백해야 합니다. 공개처형을 집행할 때는 주민들을 모두 모아놓고 진행되며 죄수의 머리와 가슴, 다리를 차례로 쏩니다. 머리를 먼저 쏘는 이유는 "썩은 사상이 들어있는 머리를 날려 버리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지난 9월 14일 북한의 당 기관지인 노동신문은 농장 주택에 불이 나자 불 속으로 뛰어들어 김일성과 김정일의 초상화를 밖으로 꺼낸 후 죽은 두 청년의 사망소식을 전하면서 "장렬하게 최후를 마쳤다"고 선전했습니다. 북한에서는 불이 나면 김부자의 초상화를 꺼내는 것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며, 그렇지 않으면 수령에 대한 충성심이 없다는 이유로 처벌을 받습니다. 수령의 초상화는 북한의 모든 가정에 보급되어 있는데, 집안 가장 깨끗한 벽면에 부착하여야 하며, 수령의 초상화가 있는 벽면에는 다른 어떤 것도 함께 걸지 못합니다. 초상화는 매일 같이 깨끗한 헝겊으로 닦아야 하며, 헝겊 역시 아무 것이나 쓰지 못하고 늘 '정성함'이라는 상자에 보관해 두어야 합니다. 또 온 국민은 수령의 얼굴이 그려진 뱃지를 착용하여야 합니다. 이를 향해서는 손가락질을 할 수 없고 분실하여서는 안되며, 훼손 시 처벌을 받습니다. 수령의 초상화는 아무나 함부로 그리지도 못합니다. '1호작품' 미술가라는 사람만이 그릴 수 있습니다. 김정일이 참석하는 행사는 '1호 행사'라 하여 사전에 철저히 통제하여 진행합니다. 그가 다니는 도로마저 '1호 도로'라 하여 특별히 만들어 놓았습니다. 수령은 파라오보다 강력한 힘을 갖고 있고 인민은 노예보다 못한 삶을 사는 곳이 오늘의 북한입니다.

4.

너무도 잔인하고 어이없는 이야기이지만 이것은 현재 북한사회의 모습을 극히 일부만 소개한 것입니다. 헬렌, 그래서 저는 내기 하나를 제안합니다. 만약에 당신이 현재 북한의 모습보다 더 끔직한 나라가 세상 어느 곳에 있다고 이야기한다면 저는 북한을 민주화하기 위한 지금의 활동을 그만 하겠습니다. 그리고 북한보다 더 끔찍하다는 그 나라 인민들의 민주화운동을 돕겠습니다. 조금 잔인한 내기가 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북한과 조금이라도 비슷하게 운영되는 나라가 하나 더 있다면, 그것은 인류에게 더할 수 없는 비극일 테니까요.

언젠가 당신은 내게 "북한의 인권문제에 대해 한국 사람인 당신의 의무가 크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물론 북한과 휴전상태이고, 한때는 한 나라였던 한국 사람인 저는 다른 어느 라 사람보다 북한 문제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제게 했던 말은 "절반만 맞는 이야기"라고 해두고 싶습니다. 내가 한국 사람이 아니더라도 지금 북한 인민들의 이런 끔찍한 현실을 알게 되었다면, 나는 북한의 민주주의와 인권실현을 위한 크고 작은 실천을 하려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북한이 내 이웃에 있는 나라가 아니라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라 할지라도 북한과 같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면, 나는 그 나라 혁명을 위해 힘닿는 데까지 노력할 것입니다. 이것이 정답입니다.

헬렌. 나는 한국의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세대로서 민주주의는 숱한 사람들의 노력과 희생으로 얻어지는 값진 열매라는 교훈을 배워왔습니다. 그리고 숨막히는 독재의 어둠속에 인민들이 신음하고 있을 때, 외부에서 들려오는 지원과 지지의 목소리가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이, 당신나라의 국익이 아닌 보편적 인류애의 관점에서 북한 문제를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나아가 모든 미국인들이, 그리고 지구촌 모든 인류가 북한 문제를 남의 나라 얘기가 아니라 '한 시대를 함께 호흡하며 사는 인간의 문제'로 바라봐 줄 것을 당부합니다. 지금껏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또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죽음 보다 못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북한보다 더 절박한 곳이 세상에 없습니다.

헬렌. 당신의 아픔에 위로가 되지 못하고 또 하나의 아픈 현실만을 덧붙여준 것 같아 미안합니다. 그러나 이 아픔을 20세기에 여전히 풀지 못한 '세계 민주주의'의 숙제를 이제 함께 풀어 나가는 계기로 삼았으면 합니다. 민주주의만이 테러를 막을 수 있고 인류를 고통과 불행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습니다. 당신 나라가 슬기롭게 위기를 풀어나갈 것이라 믿습니다. 미국과 미국 인민들에게 깊은 위로의 인사를 전합니다. 또 테러분자들의 반인류적 행동으로 느닷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을 아프간의 인민들에게 진심 어린 위로의 뜻을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