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조평통은 이산가족상봉을 무산시키며 내놓은 지난 10월 12일자 대변인 담화에서 "남조선에서는 외부에서 벌어지는 일에 턱을 대고 전군과 경찰에 비상경계태세가 내려져 예측할 수 없는 삼엄한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대공포가 하늘을 겨누고 아차하면 미사일이 발사될 수 있는 비상경계태세가 취해지고 있는 지역에 몇 명도 아닌 숱한 민간인들이 비행기를 타고 드나든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며 이런 속에서 자유로운 가족, 친척 상봉이나 태권도 시범단의 출현이 잘 될 수 없다는 것은 불을 보듯 명백하다."는 등의 이유를 대고 있다.

여기서 북한의 입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현 남한의 정세에 심각한 위협을 느낀다는 것인데, 정말일까? 이 문제는 길게 이야기할 것도 없다.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한국에서 미국의 테러사태를 맞아 대비를 하는 것은 당연하고, 이는 북한을 겨냥한 것도 아니다. 특히 지금 한국정부는 북한과의 관계개선에 매우 적극적이고, 최대한 북한을 자극하지 않으려고 진심으로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무슨 비밀도 아니고, 추리가 필요한 난해한 주제도 아니다. 즉 김정일이 오해를 할 여지는 전혀 없다. 혹시 김정일이 새가슴이라서 너무 민감한 걸까? 그러나 기왕에 그가 보여준 모습은 새가슴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

다시 나타난 벼랑끝 전술

그렇다면 김정일의 속셈은 무엇일까?

우선, 이산가족 교류에 부담을 느낄 가능성이 있다. 사실 김정일이 이산가족 교류에 흥미를 갖기는 어렵다. 상봉자들이 남한의 실상을 아는 것도 부담이고, 또 이들을 사후에 감시·관리하는 것도 피곤한 일이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이산가족교류가 없는 남북관계 개선이란 국민들로부터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 김정일도 이를 잘 알고 있기에, 감히 이산가족교류 없는 남북대화를 꿈꿀 수는 없다. 따라서 아예 남한과의 대화를 중단할 작정이 아니라면, 이산가족 교류를 피하려 한다고 해석하기는 어렵다.

그럼 김정일이 이제 남북대화를 중단시키고 싶어서 그 명분 축적을 위한 수순 밟기에 들어간 걸까? 한국정부가 갑자기 금강산회담을 수용한 데는 이런 불안감이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중국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북한정권이 남북대화를 강력히 바라고 있는 중국의 의사를 거스릴 처지는 아니다.(올해초 남북대화를 중단했던 북한이 근래 중국 장주석의 평양방문 하루 전에 대화재개 제안을 했던 사실을 상기해보자) 더구나 남한정부의 북한에 대한 대단한 인내와 포용자세는 북한이 대화를 중단할 명분 찾기를 거의 불가능하게 만든다.

그럼 도대체 김정일은 무엇을 바라고 있다는 것인가? 이산가족 교류 중단, 금강산 회담 고수 등으로 남한내의 대북 비판여론은 매우 높아졌고, 김대중정부의 대북포용정책의 입지도 약화되었다. 이런 현상은 결코 김정일에게 득이 되지 않는다. 북한이 남한에서 무언가를 더 얻어내려면, 김대중정부의 포용정책이 남한여론의 지지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김정일이 어쩌면 자해(自害)에 가까운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물론 김정일의 이런 수법은 결코 새로운 것은 아니다. 과거 NPT탈퇴, 태평양을 향한 미사일발사 등을 비롯하여 6.15회담이후에도 NLL침범, 평양축전파동 등이 떠오른다.

이런 전술은 '판을 깨버릴 수도 있다'는 협박을 통해 대화 상대방을 자기 페이스로 끌어 들이려는 것인데, 때론 큰 재미를 보기도 했다. 그래서 특별히 김정일을 위해 이른바 '벼랑끝 전술'이라는 용어까지 만들어졌다. 김정일의 이번 자해전술도 이런 범주에서 해석하고 싶다. 그런데 이를 단순히 남한 길들이기 정도로 보면 될까? 그리고 길들이기라면 도대체 무엇을 길들이려고 한다는 것인가?

DJ, 미국과 떨어져라

김정일의 이번 행동은 김대중정부에 대해 분명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단순화시키면 북한과 미국중에 택일을 하라는 것이다. 올해 초 북한이 돌연 남북대화를 중단시킬 때도 거기엔 같은 메시지가 담겨 있었다. 북한은 부시행정부의 대북정책에 항의하여 남북대화를 중단시켰다. 그런데 왜 북미간의 문제를 가지고 남한에게 화풀이를 하는 걸까? 미국에게 대북정책 조정을 위한 압력을 넣어달라는 건가? 부수적으로 이런 효과를 기대할지도 모르지만 현재 부시행정부에 대해서는 한국정부가 그만한 영향력이 없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김정일이 진짜 관심이 있는 대목은 김대중정부가 미국에 대해 거리를 두는 것이다. 즉 대북정책을 둘러싸고 한미갈등을 바라는 것이다.

반미연대를 위한 북중러 3각동맹이 강화되는 조건에서(미국의 테러사태로 일시적으로 주춤하고 있지만), 북한은 한국에 대한 영향력을 기반으로 이 동맹체계내에서 발언권을 가지는데 큰 관심이 있는 것 같다. 그 영향력의 핵심은 한국의 미국에 대한 태도문제이다. 실제로 김정일이 올초 대화중단을 카드로 남한을 압박한 결과 김대중정부는 "부시정부가 남북대화를 방해하고 있다"는 시각을 공공연하게 드러내며 미국과 마찰을 일으켰다. 외부에서 이런 현상을 들여다보면, 김정일이 남한정부의 대미정책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크게 놀랄 것이다.

그런데 미국에 테러사태가 벌어지자, 김정일의 눈에 비치는 김대중정부의 모습은 크게 실망을 주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한미간의 대테러 공조는 아주 자연스럽게 차질 없이 이루어졌고, 갑자기 북한은 자리가 없어진 것처럼 되었다. 김정일은 이런 상황이 못마땅한 것이고, 이를 순순히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이 국면에서 자신의 존재를 다시금 강조하고, 한국의 대미공조에 대해 일종의 짜증으로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고자 한다는 것이다. 조평통 담화내용중 "남조선에서는 외부에서 벌어지는 일에 턱을 대고 전군과 경찰에 비상경계태세가 내려져…"라는 대목은 이런 점에서 본심을 표현하고 있다. 역시 북한은 올해 초 남북대화 중단시기와 같이 미국 때문에 또는 한국정부의 친미정책 때문에 남북대화가 방해를 받는다는 스토리를 만들고 싶은 것이다.

한편 김정일이 대테러 한미공조를 문제삼는데는 한국내의 미국의 아프간군사공격에 대한 반대여론과도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현재 대다수 진보단체들은 성명 등을 통해 이런 입장을 정리하고 있는데, 이런 기류에 북한도 편승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은 북한의 이산가족교류 취소에 대해 "남북간 입장을 바꿔서, 만약 북녘에 전군 비상 경계령이 내려진 가운데 남쪽을 향한 경계가 강화된 상황이라면 이산 가족, 태권도 방문단이 마음놓고 북을 향할 수 있겠는가?" 라면서 비상경계령 해제와 미국의 아프간 공격의 중단을 요구하는 논평을 발표했다.

죽어도 금강산을 고집하는 이유

그러면 북한이 장관급회담, 경제회담 등을 모조리 금강산에서 하자고 고집하는 것은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일까? 금강산은 시설이 낙후되어 남북대화 장소로는 매우 부적합하다고 알려져 있다. 남한당국이 묘향산까지 거론하며 금강산을 피하려 했던 데는 경험을 통해 겪은 실무적 불편함도 고려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금강산만을 고집했다.

일각에서는 금강산관광 대가의 조속한 지급을 고려한 압력이라고 추측한다. 현장을 보여주면서 금강산 관광대금을 계속 상기시키겠다는 것이다. 물론 배제할 수 없는 가능성이다. 그런데 한국의 비상경계태세를 문제삼으면서 금강산 카드를 제안했기 때문에, 그 상관성이 무엇일까 생각해 보고싶다. 물론 추측이상 가능한 정보가 없긴 하지만(김정일만이 알고 있을 정보 말이다), 남한이 미국과 대테러 공조를 하는 상황에서 평양도 아니고 금강산에서 남북대화를 갖는 모양을 세상에 널리 보이고 싶은 건 아닐까 생각된다. 금강산의 우선적 이미지는 관광지이지만 관광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정치회담이 열리게 되면 관광지 이미지는 희석된다. 오히려 아주 외진 곳을 일부러 골라서 회담하는 모양이 된다. 또한 평양을 회담장소로 내놓지 않는다는 것은 명백한 푸대접이다.

여하튼 '왜 금강산인가?'하는 것은 뚜렷한 근거를 찾기가 어려워 더 구체적으로 접근이 어렵지만, '푸대접'과 '외진 곳'이라는 이미지가 부각되는 것은 분명하다. 북한에서 금강산을 고집하며, 어차피 관광지라는 점에서 과거 제주도의 남북장관급 회담과 무엇이 다르냐고 했다. 그런데 "백두에서 한라까지"라는 표현도 있듯이 제주도는 우리국토의 최남단이라는 통일의 상징성을 고려한 선택이었다. 그래서 백두산을 회담 장소로 정하고 제주도의 사례를 들었다면 모르되 이는 말도 안되는 억지다.

이번 상황전개를 추적해볼 때 김정일의 한미관계에 대한 높은 관심은 지속될 것이 분명하고, 자신이 기대하는 수준을 벗어나는 한미관계에 대해서는 "금강산회담"과 같이 그야말로 기상천외한 억지의 동원도 서슴지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