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설: 군부의 방해? 군부 다독거리기?
일인독재체제인가, 권력분립체제인가

북한이 4차 남북이산가족상봉을 일방적으로 연기하고 2차 당국회담, 남북경협추진위원회 등을 안전한(?) 금강산에서 하자고 억지를 부리자 각 신문들은 그 배경을 설명하였다. 다음은 10월 16일자 조선일보 기사중 일부이다.

〈금강산 관광대가 미납 등 대남사업이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데 대해 불만을 가진 북한 군부가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공격으로 인한 남한 내의 '비상경계태세' 등을 내세워 남북관계를 틀고 있는 것이란 분석이 유력하게 제기된다. 비무장지대 개방 등에 아직 소극적인 북한 군부가 의도적으로 남북관계 진전을 늦추려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다.〉

김인구 기자의 이러한 설명은 10월 13일 동아일보에 실린 세종연구소 이종석 연구위원의 해설과 비슷하다.

〈세종연구소 이종석(李鍾奭) 연구위원은 "금강산대가 미납금 등으로 대남협상을 주도하던 김용순(金容淳) 노동당 대남담당비서의 입지가 약해지고 군부의 목소리가 강화되고 있다"며 "이번 조치는 군부를 다독거리기 위한 북한 수뇌부의 결정으로 해석된다"고 말했다.〉

당일 문화일보에는 이종석 연구위원의 똑같은 발언이 나온다.

〈이종석 세종연구소 남북관계연구실장은 "북한 군부는 전력과 금강산의 대가가 들어오지 않는 데 대해 반발하고 있었고 테러사태 이후 남한 군과 경찰의 경계강화 움직임이 이들의 주장에 힘을 실어준 것"이라며 "김정일 위원장이 김용순 비서에게 남북대화 재개를 지시하기는 했지만 군부의 목소리를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일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런 주장은 가볍게 듣고 넘기면 그만이라고 생각이 들지도 모르지만, 사실 이 대목에는 북한정권의 권력구조에 대한 대단히 논쟁적인 주제가 담겨있다. 즉 '북한이 김정일 일인독재체제인가' 아니면 '권력이 분산되어 있는 체제인가' 라는 쟁점이 즉각 제기된다. 북한체제가 김일성 일인독재체제일까, 아니면 군부와 행정부, 당 등이 서로 견제하고 힘을 겨루는 체제일까? 이것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북한사회의 성격을 가늠하고 대북정책의 방향, 북한문제 해결의 방법을 달리할 수 있는 중요한 문제이다.

김정일 이외에 다른 '권력'은 없다

답부터 말하자면, 이종석 연구위원과 같은 주장은 북한연구에 나름대로 권위 있다고 평가받는 연구자로서 삼갔어야 할 경솔한 태도이다. 왜냐하면 이런 주장은 북한군부의 공개된 발언과 같은 물증도 없는 상황에서 나오는 추측 비슷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종석씨와 같은 추측이 가능하려면 북한사회의 권력구조가 일반적으로 이런 군부의 집단적 의사 수렴과 관철이 통상 가능한 사회라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즉 "군부의 반발설"은 적어도 몇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첫째, 군부라는 - 물론 여기에선 군부의 상층부를 지칭 - 내적 이해관계의 동질성과 상호 의견수렴기능을 갖춘 집단이 존재한다. 이는 고급군인이라는 직업 혹은 직책을 갖는 집단이 존재한다는 것과는 다른 의미이다. 둘째, 이 집단은 대남정책등의 결정과정에 집단적인 영향을 미칠수 있는 파워를 갖는다. 즉 김정일과 어느 정도 권력을 나누어 갖고 있다. 셋째, 이 집단은 남북관계의 진전에 소극적이고 보수적인 이해관계 내지는 의견을 갖고 있다.

그런데 아주 흥미로운 것은 이 세가지중 어떠한 내용도 충분한 근거를 갖고 주장되는 경우가 아직 발견되지 않는다. 대체로 남북접촉과정에서 북한인사가 '비공식적'으로 흘린 말을 근거로 삼는듯 하다. 이런 흘리는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 것은 어린애 같은 짓이 아닐까? 실제로는 가정의 경제권을 모두 쥐고 있는 가장이, 빚을 갚으라고 하자 "사실은 우리 마누라가 지갑을 갖고 있어서…"라고 둘러대는 것과 같다. 전형적인 핑계대기인 것이다.

현재 남한에서 북한최고 권력층에 가장 가까이 접근했던 사람은 황장엽 전 비서이다. 그의 각종 증언에 의하면 군부든 아니든 북한권력내의 간부급 인사들은 어떠한 횡적연결도 철저히 금지되고 있다고 한다. 공식적인 자리를 제외하고 서로 만나는 것은 물론 단순히 연락하는 것도 금지되고 감시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결정권에 있어서 위임이나 재량권의 행사라는 것 또한 없다. 예를들어 석유 공급권, 심지어 탈북자를 잡아내는 데 쓰는 달러 사용권조차도 김정일의 서명이 들어가야 한다. 당간부들 집안의 혼사까지 김정일이 관여하기도 한다. 아마도 김정일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결재를 하는 격무에 시달리는 최고권력자일 것이다.

상황이 이렇기 때문에 북한의 당과 군, 행정부의 간부들은 자신의 의사를 갖는데 별 관심이 없고 설사 개인적으로 어떤 의견이 있다고 해도 이를 표현하고 관철하려 시도하는 것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여하튼 북한사회도 변화할 수 있기 때문에 일인권력체제가 약화되고 이른바 군부의 파워라는 것이 생길 수 도 있다. 그런데 이런 변화에 대해 제기하려면 분명한 근거를 함께 내놓아야 한다. 이는 북한권력내의 '획기적인' 변화이기 때문이다.

'햇볕'의 대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이다.

서영훈 대한적십자사 총재는 지난 10월 15일 기자간담회에서 청와대의 한 고위 관계자의 말을 인용하여 "지난 11일까지 북측 이산가족 방문단이 평양에서 교육받은 것으로 미루어, 12일 이산가족 교환방문 '연기' 결정은 갑자기 내려진 것이며, 이 같은 결정을 할 사람은 '한 사람'(김정일 위원장을 지칭)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것이 북한과 관련된 기본적인 상식 - 누구에게도 권력을 나누어주지 않는 매우 이례적인 일인독점권력체제 - 이며, 여전히 변함 없는 현실이다. 그런데 별 근거도 없이 상상력만으로 북한 권력 내에 파벌이 있다고 주장하기를 즐기는 학자들이 있는데 그 영향은 때론 심각하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은 17일 보도된 미국 일간 〈USA Today〉와의 인터뷰에서 현재 남북관계의 정체 이유에 대해 "북한 정권 내의 의견 다툼이 남한과의 화해를 방해하는 것 같다"라고 대답했다. 또 "조지 W 부시 미국 행정부의 초기 강경 방침으로 인해 북한 정부가 대미관계 개선에 자신을 갖지 못하는 등 여러 가지 주저하는 일이 생긴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면서 일종의 미국책임(영향)론도 덧붙였다.

대통령마저 이러한 시각을 갖게 된 것은, 위와 같이 잘못된 시각을 갖고 있는 이른바 '북한전문가'들의 잘못이 크다. 북한의 권력구조가 독점체제인데 마치 과점체제인 것처럼 말하는 것은 사실의 왜곡일 뿐만 아니라, 이를 북한이 핑계대기 혹은 책임회피등에 이용한다는 문제도 있다. 물론 대북정책을 세우는데 차질도 빚어진다.

현정부의 대북정책의 골자인 '햇볓정책'도 어쩌면 이러한 잘못된 분석으로부터 난항을 겪고 있는 듯하다. 즉 북한권력체제 내부에는 강건파와 온건파가 있는데, 햇볕정책을 통해 강경파의 입지를 축소시키고 온건파의 목소리를 키워줘야 한다는 논리다. 하지만 이것은 북한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주장이며 햇볕정책의 대상과 실현방법을 잘못 짚고 있다.

북한에 강건파와 온건파, 또는 김정일에게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군부가 존재한다는 생각은 남한의 잣대로 북한을 상상한, 지극히 잘못된 생각이다. 북한에는 오직 김정일의 명령과 노선만이 있을 뿐이며, 이 명령과 노선은 어떻게든 수령독재를 유지하려는 방향이지 인민을 먹여 살리고 화해와 통일로 가려는 입장이 아니다.

햇볕정책은 북한체제의 이러한 성격을 똑바로 파악하고, 햇볕이 비치는 대상을 '북한인민'으로 바로 잡아 나가야 한다. 햇볕정책이 수령독재를 인정하고 유지시켜주는 정책이라는 인상을 심어주는 것은, 북한인민들에게 좌절만을 안겨주고 북한의 변화를 그만큼 더디게 한다.

다시한번 강조하건데 북한을 바로 알아야 한다. 요즘 정치권에서도 이른바 '설'이니 '카더라'논란이 벌어지고 있는데 북한에 대한 접근에 있어서도 이런 추측과 상상의 공해는 아주 심각하다. 사실을 잘 몰라서 그런 사람도 있겠지만 일부 '전문가'들의 경우에는 김정일의 책임을 면해주기 위한 의도에서 그런 것 아닌가 싶을 정도로 심각한 경우도 있다. 북한 당국이 무언가 상식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행동을 할 때 그것이 김정일의 의도가 아니라 김정일에 반발하는 '강경파'의 의도에서 빚어진 일이라고 말한다면 김정일은 '온건파'가 되고 합리적인 사람이 되는 것인가. 이런 주장은 기분에 따라 떠들 수 있는 성질이 아니다. 학자답게 항상 근거를 갖고 주장하는 습관을 들여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