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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민아! 그동안 잘 있었니?

네가 나의 이 편지를 받아 볼 수 없으리라는 것을 잘 알지만, 또 설사 네가 나의 이 편지를 받는다고 해도 지금의 나의 모습을 리해 할 수 없으리라는 것도 알지만, 언젠가 우리나라가 통일이 되어 다시 만나게 되면 너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이렇게 적어 본다.

소중한 나의 친구야!

나는 지금 서울에서 이 편지를 쓴다.

우리가 어린 시절 한 교실에서 공부를 배우면서 꿈꾸던 우리의 미래는 이것이 아니었지만, 그리고 우리의 그 다짐들을 기억하고 있지만 나는 지금 다시 돌아갈 수 없는 곳으로 와있다. '우리 함께 학교를 졸업하고 당과 조국에 충실한 일꾼이 되자'고 맹세했던 그 맹세를 지키기 위해서 넌 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군대에 입대했지만 난 그 맹세를 지키지 못하고 지금 남조선에 와서 네가 겨눈 총구를 마주보게 되었구나.

꿈을 이룬 것이 성공한 것이라면 넌 지금 성공한 것이고, 어쩌면 난 실패한 삶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난 지금의 내 삶에 성공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싶다. 물론 너 역시 지금의 너의 모습을 성공했다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지만 내 머리 속에는 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인 네가 거친 군대생활 속에서 굶주리면서 고생하는 생각에 가슴이 아프다. 우린 고등중학교 시절에도 굶주림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 속에서 만족을 찾으려고 했었잖아... 그래서 어떨 때는 통일이 될 때가지 널 돌봐 달라고 하늘에 빌어보기도 한다. 내가 바보 같지?

내가, 고등중학교 시절 우리가 함께 다짐했던 맹세를 지킬 수 없게 된 건, 그 맹세를 지켜야 했을 무렵 난 그것이 어리석은 꿈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군대에 입대하는 너를 주초 역에서 배웅한지 불과 5일만에 나는 굶주린 가족과 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두만강을 건넜고, 우리가 살아왔던 조선이라는 세계가 인간 생지옥이었음을 알게 해주는 중국의 현실을 보게 되었다. 중국에 가니 중국 인민들은 배고픔을 몰랐고, 우리가 조선에서 살면서 겨우 먹을 수 있었던 강냉이밥은 중국사람들이 키우는 개들도 먹지 않았다. 자그마한 강하나를 사이에 두고 벌어지는 너무도 대조적인 그 현실을 보면서 우리 조선인민들이 과연 중국의 개들보다도 더 못한가 라는 생각마저 들었고, 왜 그동안 우리는 중국사람들이 가져다 주는 쌀과 사탕을 얻어먹으면서도 그런 현실에 순종하고, 그런 수령에게 복종하고 살았어야 했는지 리해할 수 없었다. 왜 그런 수령이 죽었을 때 너와 나, 우리 조선 인민들은 통곡하며 슬퍼해야 했는지도 말이다...

그래서 비로소 나는 우리의 어릴 적 맹세는 철없던 시절에 지녔던 꿈에 불과했고, 그동안 우린 당과 수령에게 속히워 살았었다는 것을 깨달았어. 그 사실을 깨닫고 나니 나는 희망도 없이 평생을 굶주리면서 살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가족과 함께 중국으로 탈출하게 되었다.

철민아!

북조선을 떠나기 전 너희 집에 들렸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것은 너희 어머니가 3일을 굶고 바닥에 누워서 '난 굶어죽기 싫어'라고 하면서 울부짖던 모습이다.

내가 가지고 있던 돈 30원을 너의 어머니에게 드리고 너희 집을 나오면서도 나는 차마 내가 지금 중국으로 도망치려고 한다는 사실을 너희 식구들에게 말할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나는 너희 식구들에게 반동으로 보이기 싫었기 때문이었다. 난 반동이 아니라 오직 나의 아버지처럼 굶어죽는 것이 싫어서, 밥이나마 실컷 먹는 세상에서 살고 싶어서 조선에서 도망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너에게도 배고픔은 고통이었겠지만, 굶어서 돌아가신 나의 아버지 기억하지? 난 그 아버지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두만강을 건넜어.

철민아!

우리가 함께 학교 다니던 시간들을 기억하지?. 너와 난 우리를 지켜보는 모든 사람들에게 꼭 함께 기억될 만큼 늘 같이 있었잖아. 참, 6명 사건 생각나니? 쌍둥이네, 명수, 동철이, 그리고 너와 나 6명이 광혁이네와 패싸움을 일으켜 온 학교를 떠들썩하게 했던 일들... 그래도 학교를 졸업하고 보니 그 사건이 가장 기억에 남고 또 자랑스럽게도 생각된다... 결국에는 광혁이네가 무릎을 끓었잖아...

지금 그때가 몹시 그립다. 다시 그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조금 더 일찍, 네가 군대로 가기 전에 함께 남한으로 올텐데... 내가 너에게 남한으로 가자고 해도 넌 거절하지 않았으리 만치 우린 딱 친구였으니까...

철민아! 네가 놀랄 일이 있어! 우리 고등학교 동무들 중에, 김영화를 기억하지? 그 영화가 얼마 전 혼자 이곳으로 왔어. 비록 여자지만 인민학교 때부터 강했고 별명이 왈가닥 이었잖아. 영화도 나를 보고 처음 말하기를 '한철 민이랑 딱 친구였던 군일이 맞지?'라고 하더라.

그리고 영화가 그러는데 쌍둥이랑, 그 외 몇 명도 지금 도망쳐서 중국으로 가있다고 하더라. 난 가끔 그 속에 네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하군 한다. 그렇다면 내가 널 도울 수 있을 텐데...

철민아! 난 아직도 드문드문 고향 꿈을 꾸곤 한다.

우리가 함께 나무하러 다니던 중개소 골짜기와, 육동골안, 학교 때 일하러 다니던 2호 창고, 농촌동원 가던 박천 등이 꿈이 나타나... 꿈속에서도 우린 여전히 딱 친구더라...

참, 재미있는 일이 있다. 너 고등중학교 때 별명이 감자였지? 그런데 여기 남한 친구들이 내게 지어준 별명이 뭔지 아니? 바로 고구마야... 신기하지 않니? 우연히 친구들이 지어준 별명인데, 지금 생각해 보니 넌 어쩔 수 없는 내 친구인가 부다!

철민아! 정말 보고싶다. 그리고 한가지 부탁이 있어... 통일이 되어 다시 만날 수 있을 때까지 꼭 건강해라.

남과 북 사이에는 리념과 사상이 있겠지만 너와 나 사이에는 친구라는 우정만이 있을 뿐이다. 넌 인민군 군인이기 전에 나의 가장 소중한 친구야. 그 사실을 기억하고, 남조선 땅에는 이 친구가 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그러면 아마 그전에 네가 느꼈던 원쑤의 나라 남조선이 아니라, 좀더 친근하고 오고싶은 땅으로 느껴질 꺼야.

행복하길 바란다. 내가 널 위해 남조선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여기 남조선인민들에게 조선에 있는 너와 우리 북조선 동포들이 착하고 선한 사람들이라는 것, 결코 우린 원쑤가 아니니 미워해서는 안되고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줄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너에게도 똑같이 말해주고 싶다.

그리운 친구 철민아! 다시 만날 수 있을 때까지 부디 건강하고, 행복하길 바란다.

2001년 9월 28일 서울에서 너의 친구 군일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