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민행 기차 140만리

우리는 지난호 Keys '인민들은 말한다' 편에서 김정일씨가 현지지도를 나갈 예정인 도시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 지를 들었다. 김정일씨의 지난 방러당시 함경북도 전역은 1호 행사를 한다고 시끄러웠다고 한다. 청진에서는 시민의 절반이 동원되어 하루종일 도로를 쓸고 걸레로 닦고 페인트를 다시 칠했다고 한다. 이렇게 1호행사가 벌어지면 주변 교통이 통제되고 단속이 엄해지기 때문에 물자의 이동이 되지 않아 가격 폭등과 폭락 현상이 발생한다는 소식도 들었다. 그럼 김정일씨는 1년에 몇 번이나 현지지도를 다닐까.

북한의 각종 언론매체들의 주장대로라면 김정일씨는 늘 인민들속에 동고동락하는 사람이다. 1년중 절반이상을 '인민들의 여염집'에서 보내며 구들장도 만져보고 부엌살림도 살펴주신다는 것이다. 올해초 북한잡지 <천리마>는 김일성이 생전에 다닌 현지지도를 거리로 환산하면 140만리에 달한다고 보도한바 있다. 어떤 근거로 이런 수치를 주장했는지는 모르나 이를 미터표기법로 환산하면 약 56만Km, 남북한 삼천리를 23차례 왕복한 거리이고 지구를 두바퀴 정도 돈 거리이다. 잡지는 명절이나 휴일날의 현지지도 일수는 2천530여일이라고 밝혔는데 이를 시간으로 따져보면 6만720시간, 햇수로는 만 7년 정도에 해당한다.

김정일씨도 아버지에 질세라 엄청난 현지지도를 하고 있단다. <천리마>는 김정일씨가 지난 64년부터 98년까지 34년 동안 3천693일을 현지지도 했다고 주장했다. 김정일이 공식적인 현지지도를 시작한 것은 후계자로 공인된 80년 6월 노동당 6차대회 이후이니 일년에 절반은 '현지'에서 보낸 다는 말이다. 이것을 또 거리로 따져보면 총 5만9천196km라고 한다.

군부대시찰은 김정일씨가 들르는 중요한 '현지'중 하나이다. 김정일씨는 군부대에 들르면 쌍안경과 자동보총을 선물하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쌍안경은 '적의 동태를 철저히 살피라'는 뜻, 자동보총은 '멸적의 신념으로 초소를 지키라'는 당부의 뜻이라 한다. 평양방송은 지난 10월 15일 보도를 통해 김정일씨가 "1994년 7월부터 2000년 말까지 걸은 전선길은 무려 14만5천800여리나 되고 군부대에 대한 현지지도는 275회에 560여개 부대에 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영감! 연형묵이 또 거짓말 했어!

일단은 이러한 보도를 믿자. 전국 방방곳곳을 돌아다니면서 '현지지도'로 하루를 보낸다고 믿자. 그러면 현지지도를 나가서 무엇을 할까? 현지지도의 기록은 <김일성 선집>등에 나오는 각종 담화, 연설문, 녹취록으로 남아있다. 김일성과 김정일씨가 현지에서 한 이야기는 또 '말씀판'이라는 이름으로 공장이나 학교 벽면에 걸리고, 몇월 몇일에 다녀갔다는 '현지지도 기념비'도 세워진다. 하지만 이런 공식적인 문헌을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있을까? 한 탈북인의 증언을 들어보자.

1987년 4월에 김정일이 우리 직장을 현지지도 하였답니다. 그 날은 일요일이었지요. 그래서 우리 단위가 모두 휴식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김정일이 현지지도 나온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간부가 아니고 직일근무를 선 졸병이었기에 먼 발치에서 구경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답니다.

김정일은 이번에 러시아에 데리고 갔던 연형묵과 당시 무력부장이었던 오진우 등을 배동하고 호위성원들도 별로 없이 10시경 현지에 나왔습니다. 멀리서 보자니까 김정일은 손가락 짭에 시종일관 담배를 끼고 있었습니다. 다 피운 담배 꽁초는 아무데다나 막 던지고 그리고 또 피웠습니다.

구체적으로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종종 큰 목소리로 오진우를 보고 "영감!"이라고 부르는 소리가 들리고, 또 "연형묵이 또 거짓말 했어!"하고 고함을 지르는 소리도 들렸지요. 자신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간부들을 코앞에 놓고 "오 영감", "연형묵이…"하고 연방 불러대는 것을 보고 그 때는 좀 놀랐지요. 그러면서 김정일이 소탈하고 인민적인 성품을 가지고 있어서 저렇다고 좋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면 김정일이 버르장머리라고는 쥐뿔만큼도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종종 듭니다. 김정일은 그렇게 한 시간 정도 야외에서 앉지도 않고 서서 담배를 연방 피워물고 때로는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때로는 웃기도 하면서 떠들다가 돌아갔습니다.

그로부터 한 주일후 김정일이 우리 단위를 현지지도할 때 했다는 강령적 '말씀 노작'이 정리되어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노작'에서 김정일은 얼마나 '말씀'을 정중하게 했는지…. 오진우를 보고도 "영감"이라고 분명히 호칭을 했는데도 "무력부장동무…" 이런 식으로 '노작'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때에야 나는 김정일의 '노작'이라는 것이 거짓말이 절반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후부터 나는 김정일을 떠올릴 때마다 그가 로간부들을 동네 영감 부르듯, 졸병 부르듯 마음대로 호통치던 모습을 생각하게 되었으며 김정일의 모든 추행이 그의 행실로 보아 필연적이라는 것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지요.

인민만 살린다면 무엇이 어떠랴

김정일씨가 예의범절을 배우지 못해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반말을 한다는 것은 황장엽씨의 책, 이한영·성혜랑의 수기, 최은희·신상옥의 증언 등을 통해 여러 차례 밝혀진 바 있지만, 인민들이 보는 앞에서까지 그런다는 것은 참으로 실망이다. 그런데 김정일씨 전기에는 현지지도 과정을 이렇게 쓰고 있다.

1972년 3월 9일, 하루해가 기울어 갈 무렵이었다. 경애하는 김정일영도자님께서는 황해북도 은파군 양동협동농장과 옥현협동농장의 갈림길을 지나고 계시었다. 현지지도의 길이시었다. … 중략 … 영도자님께서는 트랙터운전사와 이야기를 나누시었다. 이름이 무엇이고 어느 협동농장에서 일하는가, 나이는 몇살이고 지난해 농사는 어떻게 하고 분배는 얼마나 받았는가를 알아보시었다. 그분께서는 트랙터운전사를 미덥게 바라보시면서 앞으로 농사를 더 잘 지어 어버이수령님께 기쁨을 드리고 주체농법의 위대한 생활력을 남김없이 시위하여야 한다고 가르치시었다. 그러시고는 농촌테제를 잘 관철해야 한다고 하시면서 동무들은 농촌에 파견된 우리 당의 기계화 초병이라는 높은 영예와 책임감을 깊이 간직하고 농촌기술혁명의 앞장에 서야 한다고 말씀하시었다. … 중략 … 영도자님께서는 트랙터운전사들에게 수고했다고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을 밭머리에 불러앉히시었다. 차안에서 과자를 꺼내어 그들의 손에 쥐어주시고 변변지 않으나 과자를 들면서 이야기나 나누자고 하시었다.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트랙터를 잘 다루어 농사를 더 잘 지어야 하겠다고 하시면서 농촌에서 트랙터가 할 일이 많다, 앞으로 논밭갈이로부터 씨붙임, 김매기, 낟알털기, 운반작업에 이르기까지 힘든 일을 다 기계로 하여야 한다, 트랙터의 이용률을 높이려면 길도 잘 닦고 논밭들도 정이해야 한다고 강조하시었다.

이 일화가 만약 사실에 기반한 것이라면 실제는 어떻게 말했을지 참 궁금하다. 아무렴 좋다. 욕을 하면 어떻고 담배꽁초를 땅바닥에 버리고 침을 마구 뱉은들 어떠랴. 인민들의 생활만 잘 챙겨준다면 말이다. 그러나 허구헌날 인민들 속에 살고 있다는 사람이 왜 인민들을 굶어 죽게 내버려두었던 것일까? 아래 간부들이 허위 보고를 해서 몰랐다면 모르겠으되 일년에 절반 이상을 현지에서 보낸다니 몰랐을 리는 없고…. 이 정도면 "미필적 고의" 정도는 성립될 것 같다.

현지지도라는 이름으로 인민들을 귀찮게 하지말고, 또 상하이에서 높은 탑을 보고 돌아와 "우리도 저만한 것 하나 지으라우"하면서 괜한 오기 부리지 말고, 인민들의 삶을 알고 있다면 나라의 문을 열어라. 개혁개방만이 인민이 살길이고 당신에게 최소한의 양심이라도 있음을 증명하는 길이다, 김정일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