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번째 Keys를 보냅니다. 어느덧 스무 권이 되었습니다. 한 권 한 권 정성 들여 만들지 않은 Keys가 없고, 원고를 쓸 때마다 떠오르는 북녘 동포들의 얼굴에 눈물 적시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Keys를 보내면서 여전히 변하지 않는 생각 하나는 ‘이번이 마지막 Keys가 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몇 권을 내다보면 북한에 대해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질 줄 알았는데, 열 권을 내고 스무 권을 내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영도자는 끊임없는 화제거리를 우리에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매호에 실린 글의 제목과 소재는 조금씩 다르지만, 어떤 사람이 어떤 글을 쓰든 결론은 “김정일이 있고서 북한 인민의 삶이 달라질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지나치게 단순하리만큼 분명한 사실이며, 천지개벽이 일어나지 않는 한 Keys가 마지막 호를 내는 그날까지 변함 없는 결론이 될 것입니다.

Keys는 매월 한글판을 발행하고, 계절마다 영문판을 발행해 왔습니다. 영문판까지 합쳐 정확히 하자면 이번호 Keys는 스물 여섯 번째에 해당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글판과 영문판을 만들고 이제 일본어판까지 계획하고 있지만, 전 세계 수 십 개 나라에 배달되지만, 정작 북녘 땅에는 Keys를 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얼추 2년의 시간동안 만든 20여권의 Keys 모두를 ‘북녘으로 보낸다’고 생각하며 만들었습니다. 모든 글 하나 하나에 북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담으려 했고, 북한 인민의 목소리를 대신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우리가 대신한다’고 생각하며 만들었습니다. ‘지금 우리와 똑같은 생각과 의지로 북녘 인민들이 독재에 맞서 봉기할 날이 분명히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만들었습니다. 이것 역시 Keys가 마지막 호를 내는 그날까지 변함 없는 결론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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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북한민주화네트워크를 창립하고 월간 Keys를 첫 발행하던 당시만 해도 우리의 ‘북한민주화운동’을 오해하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줄곧 있어왔던 반공단체나 우익단체들에 이름 하나를 더 보태는 것이 아니냐는 시큰둥한 반응도 있었습니다. 일각에서는 얼마 못가 특별한 활동도 없이 간판만 남게 될 것이라 혹평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북한민주화운동을 주장하던 시작부터 “북한민주화운동은 반공운동이 아니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북한이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만약 북한이 중국 정도의 사회주의 정책을 펼쳤다면, 사회주의 교범대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만이라도 펼쳤다면 우리는 북한민주화운동을 주창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김정일 정권이 스탈린식의 독재정권만이라도 됐으면 굳이 김정일 ‘타도’를 외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혹자는 우리를 ‘반북단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히려 ‘친북단체’이지 반북과는 거리가 멀다는 입장도 분명히 했습니다. 우리가 반대하는 것은 북한 민중이나 북한이라는 국가 자체가 아니라, 그 민중에게 비참한 운명을 들씌우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건국이념을 깡그리 무너뜨린 ‘김정일 정권’입니다. 우리는 매번 우리는 “북한민중을 사랑하며 그래서 김정일을 반대한다”고 밝혀왔습니다.

어떤 이들은 “북한은 개혁 개방으로 나아갈 것”이라며 북한민주화운동은 이에 장애물이 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북한 변화의 핵심은 김정일이 변하는 것인데, 이것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은 올 한 해에도 우리가 누차 확인했던 사항입니다. (이것이 확실해지니까 이번에는, 북한에 그 무슨 강경파가 따로 있어 김정일이 개혁 개방의 길로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는다는 황당한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독재자가 스스로 변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지구가 거꾸로 돌기를 기대하는 것보다 허망한 일입니다. 또 어떤 이는 “북한을 민주화하는데 남한에서 할 일이 뭐가 있느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할 일이 너무도 많아 셀 수도 없음을 그간의 과정을 통해 느꼈습니다. Keys를 본 독자들의 격려 전화를 자주 받습니다. 그 대다수는 탈북자들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단체가 존재한다는 자체만으로도 북한 사람들에게는 큰 힘이 될 것”이라고 한결 같이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북한민주화운동을 ‘존재 자체만으로도 희망이 되는 운동’이라고 말합니다. 그동안의 크고 작은 노력으로 국제사회에 북한 인권문제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고, 북한민주화를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대열이 늘어나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신념과 의지에 넘쳐나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우리의 뜻이 철의 장벽 넘어 저 북녘 땅에 메아리칠 날이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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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한국에는 북한의 식량난과 인민들의 불행이 ‘외세의 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부 ‘전문가’라는 사람들조차 모든 문제를 마치 수학공식적으로 미국과의 문제에 들이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한 3-4년전에 이러한 주장을 했다고 하면 그냥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결론이 극명하게 드러나 있는데 왜 자꾸 미련을 갖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번호 Keys에 우리는 〈2001년 북한 인권·민주화에 대한 10대 뉴스〉를 간추려 보았습니다. 올 한해에만 대한민국으로 입국한 탈북자는 500여명입니다. 중국, 러시아, 베트남, 미얀마 등 제 3국을 떠도는 탈북자들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올해 Keys는 몇 차례에 걸쳐 중국 국경지대에서 탈북자들을 인터뷰하여 최근의 북한소식을 연이어 보도했습니다. 보셔서 아시겠지만, 인민들의 생활은 변함이 없습니다. 잔혹한 이야기지만 ‘이미 죽을 사람은 다 죽었고’, 산 사람들은 죽지 못해 사는 삶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인민들에 대한 통제는 더욱 강화되고, 군대는 더욱 늘어나고, 군사훈련도 강화되고 있습니다. “나에게서 그 어떠한 변화를 기대하지 말라”는 카드섹션을 당당하게 국제사회에 펼쳐 보이게 하는 김정일입니다. 지난 3년간 현대에서 북한으로 보내진 금강산 관광대금만 4억달러에 이릅니다. 국제사회의 각종 원조도 끝없이 이어졌습니다. 북-중, 북-러 관계가 가까워지면서 우방으로부터의 지원도 봇물처럼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들려오는 소식은 배급이 정상화되고 살림집이 재건되고 인민생활이 안정되고 있다는 소식이 아니라, 우상화 기념물이 더욱 늘어나고 전투기를 신형으로 교체하고 새로운 미사일을 개발한다는 소식뿐입니다. 김정일이 초호화 특급열차를 타고 러시아를 일주했다는 소식뿐입니다. 김정남이 보석 박힌 롤렉스 시계를 차고 금목걸이를 반짝거리며 일본으로 들어가다 잡혔는데 그의 가방에 달러 뭉치가 가득했다는 소식뿐입니다. 도대체 그 많은 외화가 어디로 행방을 감춰버렸지…, 이제 분명해지지 않았습니까? 자, 이래도 북한문제의 원인을 밝히는데 더 많은 시간과 팩트가 필요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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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저는 중국 국경지역을 여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는 북한의 식량난이 절정에 달해있던 때로 인육까지 먹는다는 끔찍한 소문마저 들려 오던 때였습니다. 내가 잘못 알고 있기를, 새빨간 거짓말들이기를, 간절히 간절히 바라곤 하던 때였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소문보다 끔찍하더군요.

이제 현실은 분명한 것 같고, 그렇다면 이 끔찍한 현실의 ‘원인’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던 중 한 중국 대학생을 만났습니다. 조선족인 그 학생은 별 희안한 고민을 다 한다는 듯 딱 잘라 제게 말했습니다.

“정치가 잘못 된 건 영도자의 탓 아니냐. 영도자를 바꿔야지!”

너무도 당연한 그 말이 그때는 왜 그리 충격적이었는지 몰랐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부지불식간 내 머리 속에 존재하는 일종의 ‘금기(禁忌)’에 대한 충격 때문입니다. 한국의 역대 정권에 대한 비판은 서슴없이 하고, 대통령의 이름은 이 놈 저 놈 하며 옆 집 개 이름 부르듯 당연히 했던 내가 왜 북한 정권에겐 그리 관대했던 것일까. 한국사회 민주화를 위해 투쟁할 때는 ‘정권타도’를 잠꼬대처럼 외쳤으면서 ‘김정일 타도’라는 말에는 왜 그리 화들짝 놀라는 것일까. 한국의 역대 독재정권은 악랄 잔혹하고, 김정일 정권은 그렇지 않아서 인가. 실제는 김정일이 백 배 천 배 악랄한데 말이다. 그럼 한국 독재정권은 만만하니까 타도를 외쳐도 되고, 김정일은 섣불리 건드려서는 안되니까 조심해야 되는 것일까. 세상에 그런 모순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낮은 수준(?)의 독재 앞에서는 비타협적으로 싸우고 높은 수준의 독재 앞에서는 비위를 맞추며 조심해야 한다니! 혹시 우리는 지금껏 북한의 인권문제, 민주화문제를 일종의 금기처럼 여겼던 것은 아닐까. 북한 인민의 삶의 현실에 대해서는 ‘알 수 없음’이라는 영원한 물음표로만 방치한 채, 알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은 채, 오히려 독재를 방조했던 건 아닐까.

스무 번째 Keys를 보내며 조선족 학생의 그 말을 되새겨 봅니다. 백 번 천 번 생각해보아도, 영도자를 바꾸어야 합니다. 그것만이 북한 인민이 사는 길이며, 그것을 위해 모든 힘을 집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 편안한 의자에 앉아 컴퓨터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저 자신과, 느긋하게 소파에 앉아 Keys를 펴보고 계실 독자 여러분께 묻습니다. 하루에 북한 인민들의 삶에 대해 몇 시간 몇 분쯤 생각해보는지. 너무도 자명한 진실을 앞에 두고 우리는 오늘 또 룸펜 같은 고민과 논쟁만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북녘 땅을 향해 스무 번째 Kiss를 보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