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북한문제와 관련하여 자주 흘러나오는 있는 발언 중의 하나는 북한에 이른바 '강경파(强硬派)'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지난 6차 장관급 회담이 아무런 합의사항 없이 결렬되고 나서 남측 대표단의 책임자였던 홍순영 통일부장관은 "현재 북측에선 군부 등 강경파의 입김이 강하고 남북관계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관찰됐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또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에서 민주당 장성민 의원은 "남북이 모두 보수층의 여론을 의식한 회담이었다"고 평가했다. 남한에 보수층이 존재한다는 것은 충분히 확인가능한 일이지만 북한에 보수층이 존재한다니! 이러한 주장은 꽤나 오래 전부터 있어왔지만 최근 남북관계가 다시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마치 기정사실처럼 여겨지고 있다.

크리스챤아카데미 강원용 명예이사장은 11월 21일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김일성 시대가 노동당 중심이었다면 이제는 선군(先軍)정치, 즉 군부가 앞장서는 시기입니다. 김정일 주변의 경직된 강경파들이 돌발적인 행동을 할 가능성은 충분합니다."라고 이야기했다. 이 역시 김정일이라는 사람이 있고, 그 옆에 강경파들이 존재한다는 가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심지어 김대중 대통령 마저 지난 10월 미국 일간 〈USA Today〉와의 인터뷰에서 현재 남북관계의 정체 이유에 대해 "북한 정권 내의 의견 다툼이 남한과의 화해를 방해하는 것 같다"라고 대답했다.

해외의 시각 역시 마찬가지다. 블라디미르 루킨 러시아 하원 부의장은 11월 17일 한겨레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남과 북 지도부 내부에 화해 협력과 대화 진행과정에서 속도를 내자는 쪽과 신중하자는 쪽으로 의견이 갈려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교류를 축소하면 남북 사이의 장벽이 더 높아지고 북한의 강경파를 강화할 뿐"이라고 진단했다. 러시아의 세계경제 및 국제관계연구소(IMEMO) 노다리 시모니야 소장도 지난 9월 동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유일한 문제는 김 위원장은 변화에 대한 준비가 돼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의 주변을 감싸고 있는 군부 등 보수 강경파가 변화를 두려워한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또 지난 6월 미국 우드로 윌슨 연구센터의 셀리그 해리슨 선임연구원은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와 워싱턴에서 갖은 한반도 정책 세미나에서 북한에서는 현재 권력투쟁이 진행 중이며, 김정일은 협상을 선호하는 '비둘기파'쪽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이 무산된 이후 북한 내부의 강경파가 득세하기 시작했으며, 부시 행정부가 장기간 대북정책 재검토에 들어간 뒤에는 온건파의 입지가 더욱 좁아지면서 김정일이 서울 답방 등 6·15 남북 공동선언의 합의내용을 이행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지난 8월 중앙일보는 '북북 갈등' 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 냈다. "평양에도 '북북 갈등' 있어"라는 제목의 기사에는 "북한에도 대남 관계 사업을 놓고 '북북 갈등' 이 그동안 심심치 않게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면서 92년 7월 북한경제대표단으로 서울을 방문했던 김달현 부총리가 평양에서 "군수용 전력을 민수산업 쪽으로 돌리자"고 주장하다 실각한 사건과 지난해 남북 정상회담의 북측 주역이라 할 수 있는 대남비서 김용순이 올 6월 무렵 한 달간 공식 석상에서 자취를 감춘 것 등을 예로 들었다. 또 대한매일도 11월 15일자 사설을 통해 "북한 내 강경파와 개방파간의 '북북갈등'도 회담의 진전을 가로막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경향신문도 지난 7월 김정일의 러시아 방문을 다룬 기획 기사에서 "최근 북 군부강경파는 미국의 대북강경정책과 금강산관광대가 수입급감 등을 내세워 개혁 개방에 불만을 품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좌우 대립은 김정일의 고민거리?

결론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이러한 주장은 북한을 상대로 한 '상상력 테스트'이거나 김정일의 노림수에 그대로 빠져든 사고방식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이러한 모습을 상상할 것이다. 먼저, 길다란 테이블이 있다. 그 좌우로 북한 권부(權府)의 주요 간부들이 앉아 있는데 좌측에는 군복입은 사람들이, 우측에는 양복입은 사람들이 주로 앉아 있을 것이다. 이중 군복입은 사람들은 이른바 군부 강경파로 주로 노(老)혁명가들이며 북한체제유지에 보다 우선수위를 두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남북 화해 협력이나 대미 협상 등에 대단히 부정적이고, '선군정치', '총대우선주의' 같은 표현도 주로 이들의 브레인에서 나왔을 것이다. 테이블 반대편의 사람들은 이른바 테크노크라트로 해외 유학 경험도 있는 북한의 신세대 간부들인데 그들은 대외 개방에 적극적이고 북한체제에도 조심스러운 변화를 추구하려는 사람들이다. 남북정상회담이나 금강산관광, 김정일의 중러 방문 등도 이들의 브레인에서 나왔을 것이다.

이들 두 세력은 만나기만 하면 싸운다. 물론 드러내놓고 싸우는 것은 아니지만, 엄숙한 가운데 긴장감이 흐른다. 우측의 비둘기파는 좌측의 매파를 혁명 선배로서 존대하긴 하지만 그들의 고루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또 좌측의 매파는 피 흘려 이룩한 공화국의 역사를 요즘 젊은것들이 잘 모른 것 같아 그것이 불만이다. 이 좌, 우의 중앙에 김정일이 앉아 있다. 회의가 있을 때마다 김정일은 양쪽의 이 두 세력을 조율하자니 머리가 아프다. 아버지의 유훈을 받들어 혁명 선배도 존대해야겠고, 또 자신도 세계정세에 밝은 2세대 혁명가로서 체제 변화도 추구해야겠고….

북한에 강경파와 온건파가 따로 있다는 사람들은 아마도 이런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면서 북한문제를 생각할 것이다. 다시 한번 이야기하지만, 이것은 단지 '상상'에 불과하다. 남한과 해외의 전문가 중 이러한 상상을 하는 사람들은 남한의, 혹은 자유민주주의의 잣대로 북한을 가늠하려는 것인데, 북한에 이러한 대립 구도는 애시당초 존재할 수조차 없다.

김정일이 모든 대외문제에 대해 결정권을 쥐고 있다는 것은 천하가 다 아는 일이다. 대외문제뿐만 아니라 자잘한 국내문제까지 모든 것이 그의 손을 거쳐간다. 아랫사람들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북한의 체제 자체가 그렇게 되어있다. 수령의 결재를 받지 않은 중요한 문제가 있을 수도 없고, 해결되지도 않는다.

남북회담을 해도 공동선언문 하나까지 마지막 순간에는 김정일의 결재를 받아야 하고, 북미회담 역시 마찬가지다. 미국에 건너가 북미회담을 할 때는 통신수단을 믿지 못하니, 회담기간 중 몇 일간 북한으로 건너가 회담진행과정을 보고하고 이후 전술의 상세한 부분까지 지시를 받고 돌아온다. 물론 최종 합의문도 김정일의 결재를 받아야 한다. 이것은 회담 대표단이 자기 나라의 최고 지도자, 즉 대통령이나 총리의 결재를 받는 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회담결과가 발표되었을 때 국민들의 반응이나 다른 정치집단의 반대, 이런 것들을 우려해서 최고지도자의 책임있는 최종결재를 얻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김정일의 전략과 구도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이것이 회담의 목표이자 과정이고 결론이다. 그 이외에 어떤 것도 있을 수 없다.

작은 것 신경 쓰려다 큰 것을 잊고 있다.

그런데 재밌는 것은 북한의 외교관이나 협상기술자들이 회담에 임할 때 "우리나라에 강경파와 온건파가 있는데 그것 때문에 곤혹스럽다. 나는 온건파이다. 우리 같은 온건파에게 힘을 실어주어야 우리가 힘을 얻고 앞으로 다른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이런 사례는 북미협상의 과정에도 있었고 이번 6차 장관급회담에도 이러한 이야기를 넌지시 흘렸을 것이다. 이러한 말은 회유 반 협박 반의 이야기이다. 회사의 말단 직원이 납품업체 직원과 협상을 벌이는데 "나는 싼값에 넘기고 싶지만 우리 회사 방침이 그래서…", "우리 사장의 마지노선이 확실해서…", 혹은 "나도 처자식이 있는 사람이요, 좀 봐주시오"하는 말과 비슷한 경우이다. 물론 이런 간곡한 부탁에 넘어가 주는 척 하면서 은근슬쩍 합의에 도달하는 것도 일종의 협상술이다. 남한 내 일부 담당자들이나 김대중 대통령의 발언도 이러한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래, 알고 있다, 이해한다"며 얼래고 달래 어떻게든 협상테이블에 계속 끌고 오려는 배려가 담겨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것을 당연한 듯 기정 사실화 해버리면서, 또 실제 그렇게 믿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북한에 강경파와 온건파가 따로 있다고 믿는다는 것은 북한에도 일정한 의사 표현의 자유가 있다고 믿는 것이고, 그 의사에 따라 일정한 집단을 형성할 수도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것은 북한에 대한 모든 판단을 흐리게 한다.

뒤집어서 생각해보자. 북한에 정말 강경파와 온건파가 있다고 치자. 그래서 세간의 논리는 온건파에 힘을 실어주면 강경파의 입지가 사라질 것이라 하는데, 과연 그럴까? 이것은 일반 사회에서는 가능할지 몰라도 북한체제에는 맞지 않는 추측이다. 어느 사회에나 존재하는 강경파와 온건파라는 것도 본질은 국민의 여론과 잇닿아 있다. 권력상부에 아무리 강경파가 많아도 국민들이 지지해 주지 않으면 강경한 정책을 펼 수 없다. 역으로 권력 상부에 아무리 온건파가 많아도 국민들이 분노하여 강경한 정책을 주문하면 그에 호응하지 않을 수 없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이것이 일반적이다. 한 사회에 강경파가 많다는 것은 그것을 지지해주는 여론이 어느 정도 있다는 증거다. 반대의 경우도 그렇다. 온건파의 노선을 지원해 주어 국민생활에 어떠한 변화가 있으면 여론은 온건파에게 지지를 보낼 것이고 이는 강경파가 설 자리를 잃게 한다.

그러나 북한처럼 극히 폐쇄적인 사회에서 강경파와 온건파를 구분하기도 힘들뿐더러 그것을 구분해서 지지해준다 하더라도 그것이 어떠한 의미가 있을까? "이번 합의는 온건파를 지원하는 메시지다"라고 확인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강경파의 입지가 축소될 것 같지도 않다. 북한에 여론을 등에 업은 강경파와 온건파가 있다면 온건파를 선별적으로 지원하는 방식을 통해 강경파의 입지를 축소시킬 수 있겠지만 북한 인민의 상황이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알 수 있는 일이다. (어느 한 측의 입장과 일치하는 일방적인 조치는 반대측의 견제논리를 더욱 키워줄 수 있다는 것 또한 상식이다. 즉, 시비를 걸려고 맘먹으면 얼마든지 걸 수 있다는 것이고, 그것이 일반적으로 강경파들이 노리는 것이다.)

혹 여론에 의해 형성된 강경파와 온건파가 아닌, 그들 나름의 강·온이 존재할 수도 있지 않느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겠는데, 그래서 어쨌다는 말인가. 북한 권부 내에 설령 강경파와 온건파가 있다해도 그것은 '그들 내부의 일'일 뿐이다. 협상기술자가 "나는 온건파요, 우리를 지지해 주시오"라고 해도 "그건 당신들 내부에서 알아서 할 문제"라고 딱 잘라 말하면 된다. 그것에 호응해 주고, 신경 써 줄 필요가 하등 없는 것이다.

대북협상에 임하는 당국자들은 주로 정부 대 정부의 관계를 생각하기 때문에 북한 권력 내의 알력관계나 북한측 협상참가자들의 개인적 성향 등에 관심이 많을 수 있다. 이것이 협상의 진척에 어느 정도 영향을 주는 것도 사실이고, 이런 세세한 부분까지 잘 포착하여 유리한 결과를 이끌어낸다면 정말 노련한 협상가로 평가받을 만하다. 그러나 지금은 '큰 틀'을 깨려 하니 문제다. 북한은 국민의 여론이 주도하는 사회가 아니고, 그 여론에 의해 강경파와 온건파가 형성되는 사회가 아니며, 모든 정책결정은 오직 수령의 손에서만 이루어진다는 '상식'을 잊지 말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