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북한의 인권문제, 민주주의 문제에 대한 세계 각 국 정부와 언론, 단체들의 목소리가 한껏 높아진 한 해였다. 미국의 민간단체인 프리덤하우스는 2000년 12월 20일 발표한 연례 인권조사보고서에서 북한의 인권현황을 "최악중의 최악"이라고 평가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수헌 외부성 부상은 4월 1일 프랑스와의 수교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파리에 도착했는데, 프랑스 정부측은 북한의 인권개선과 개방, 핵과 대륙간 탄도미사일 확산 금지 이행 등을 선결조건으로 제시했다. EU는 6월 브뤼셀에서 북한과 인권회담을 가졌고, 유엔인권이사회는 북한이 제출한 인권보고서에 대해 수정 제출을 요구하는 권고안을 채택했다. 국제엠네스티는 중국 장쩌민 주석 앞으로 탈북자들을 북한으로 강제송환하는 것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 편지를 보냈고, 유엔인권소위는 '난민에 대한 국제적 보호'에 대한 결의안을 채택했다.

프랑스 일간 <리베라시옹>은 「국경없는 의사회」 피오나 테리 조사국장의 증언을 인용해 북한인민들의 여전한 식량난과 특권층의 전횡에 대해 보도했다. 독일의 <프랑크푸크터 알게마이네 자이퉁>, 프랑스의 <르몽드>, 미국의 <뉴스위크> 등에서도 북한 인권문제를 특집으로 다루었다. 북한에서 공화국 친선메달을 받은 바 있는 로베르트 폴러첸(Norbert Vollertsen) 씨는 타임지에 '미친 곳에서 쓰는 일기'라는 제목으로 북한의 현실에 대해 고발했다. 그는 친선메달을 받은 대가로 북한의 이곳저곳을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었는데, 인민들의 현실을 외신기자들에게 보여주려다 추방되었다. 그의 일기는 한국에서 책으로 출판되었다. 지난 10월 25일에는 미국의 저명인사들이 「북한인권위원회」를 출범시켰다. 북한인권위원회는 원조식량의 분배검증, 탈북자 정치난민자격인정, 북한 주민 개방화 조치, 인권단체와 언론사 대북접근 허용 등 7개 항목의 활동과제를 제시했다.

국내에서도 북한 인권·민주화에 대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북한인권시민연합」, 「좋은벗들」 등 북한 인권NGO들은 각종 토론회, 발표회, 난민 지원사업, 국제연대 등을 활발히 전개했다. 「납북자가족협의회」는 87년 납북된 이재환씨가 사망했다는 북한측의 통보에 대해 사인 규명과 유해 송환을 요구하는 등 납북자 송환을 위한 활동을 벌였으며, 「6·25전쟁 납북인사 가족협의회」가 발족하여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대한항공 858기 폭파희생자 유족회」는 87년 KAL기 폭파사건과 관련해 김정일을 대량학살 및 테러지령 등의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2.만천하에 드러나는 정치범 수용소 실태

북한의 대표적 정치범 수용소의 하나로 꼽히는 요덕수용소(15호 관리소)에 1994년 4월부터 1999년 1월까지 5년간 수용됐던 인민군 중위 출신의 이백룡씨가 탈북해 수용소의 실체를 증언함으로써, 그동안 북한 당국이 극구 부인했던 정치범수용소의 실태가 다시 한번 만천하에 드러났다.

이씨는 "식량난이 악화되자 1996년부터는 1인당 배급량이 하루 80g으로 줄어들었고 그나마도 옥수수 쭉정이였다. 영양실조로 마르다가 온몸이 부어 올라 죽어 넘어지는 시체들을 치우는 것이 하루 일과였다. 혁명화구역 대숙리에서만 2000여명 가운데 400명이 1996년 1년 사이 사망했다. 그래도 밀려드는 사람들로 수용자 수는 3만5000여명에서 4만여명으로 오히려 늘어났다"고 증언했다. 그는 "공개 처형도 갈수록 잔인해졌다. 96년에 수용소에서 도주하다가 붙잡힌 김승철이라는 청년은 다리를 묶인 채 짚차에 매달려 10리를 끌려온 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자동보통(AK 소총) 수십발을 맞아 처형됐다. 경비병들은 수용소 사람들에게 그 피를 손에 묻히게 했다. 잘못하면 너희들도 그렇게 된다는 경고였다."면서 "1996년에는 국제인권단체의 수용소 방문을 염려해 집들을 모두 부숴버리고 산 속으로 대피한 적이 있다. 보름간을 산 속에서 보냈다. 진짜로 외국단체가 관리소를 방문한다고 하면 기관총으로 다 갈겨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들었다."고 말했다.

지난해에 탈북자 김용씨는 개천교화소의 실태에 대해 폭로한 바 있다. 그의 증언은 개천교화소에서 생활했던 이순옥씨('꼬리 달린 짐승들')의 증언과도 일치했다. 요덕수용소의 실태는 92년 탈북한 강철환, 안혁씨가 이미 증언한 바 있다.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는 어느 정도 출소의 희망이 있는 '혁명화 구역'과 평생 나올 수 없는 '완전통제구역'으로 나누어지며 현재 10여 곳에 20여만명이 수용되어 있는 곳으로 추정되고 있다. 최근 완전통제구역이 더욱 늘어나는 것으로 보인다.

3.대한민국으로 온 탈북자, 올해에만 500여명

2001년 한 해에만 500여명의 탈북자가 대한민국으로 왔다. 11월 17일 현재 입국한 탈북자는 505명. 연말에는 550명에 이를 것으로 보인다. 대한민국으로 입국하는 탈북자의 숫자는 95년부터 대폭으로 증가, 97년 86명, 98년 71명 이었다가 99년 148명, 2000명에 312명으로 늘어났다. 이로써 전체 탈북귀순자는 2000명에 육박하고 있다.

올해 6월 26일에는 장길수군을 포함한 북한 주민 7명이 중국 베이징 주재 유엔고등판무관실로 찾아가 한국으로의 망명을 주장하여 세계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길수 가족은 6월 30일 오후, 중국정부의 추방 형태로 제 3국을 거쳐 대한민국에 입국했다. 또 5월에는 탈북자 김순희씨가 미국 이민국(INS)에 망명신청을 했다. 일반 탈북자가 미국으로 망명을 신청하기는 처음이다. 그는 중국 옌벤 등지에서 온갖 고생을 하다 위조 여권을 구입해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러나 이렇게 대한민국에 입국하는 탈북자의 수는, 지금 이 순간도 중국, 러시아, 베트남, 미얀마, 필리핀 등지에서 떠도는 수십만(으로 추정되는) 탈북자들의 숫자에 비하면 너무도 적은 숫자이다. 국제사회가 이들에게 '난민'의 지위를 부여하고, 대한민국 정부가 탈북난민을 수용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해야 한다는 절박한 여론도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하지만 대한민국 정부는, 지난해 리비아에서 근무하던 북한 간호사가 신변보호를 요청했음에도 북한으로 되돌아가도록 북한당국에 협조한 사실 등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과연 탈북자를 보호하려는 의지가 있는지 의심케 했다. 한국 외교공관이 헌법상 대한민국 국민인 탈북자를 쫓아내는 통탄할 노릇은 올해에도 고쳐지지 않고 있다.

한편 탈북자를 체포하려는 북한 당국의 색출작업도 더욱 거세졌다. 보도에 의하면 중국 공안이 체포하여 북한으로 끌고 간 탈북자는 올해에만 6000여명으로 추산되며, 신고자와 체포자에게 거액의 현상금을 지급하고 있다. 이 현상금은 북한측에서 제공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4.최악의 식량사정, 그러나 '총대중시'만을 외치는 영도자

북한 인민의 식량사정은 좀처럼 나아질 것 같지 않다. 올해도 북한은 식량난을 맞았다. 연초부터 평양시가 50년 만에 최저기온이라는 영하 26.5도를 기록했고, 봄에는 남북이 모두 극심한 가뭄을 겪었다. 조선중앙방송은 이를 '천년만의 왕가뭄'이라 이야기했다. 여름에는 큰 물난리를 겪었고 외신이 이를 생생하게 보도했다. 그러나 한국이 남아도는 쌀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결코 기쁘지 않은' 대풍(大豊)을 이룬 것에 비해 북한은 최악의 흉년을 맞았다. 북한의 식량난이 결코 기후 탓, 자연재해 탓이 아니라는 것이다. 연초에 한국농촌경제연구원이 발표한 '농업전망 2001'에는 올해 북한의 식량 부족분을 약 187톤이라 예측했다. 그러나 실제는 훨씬 더 클 것 같다. Keys는 올해 3차례에 걸쳐 중국 국경지대에서 탈북자와의 인터뷰를 통해 생생한 북한 소식을 전했다. 전해오는 소식은, 외국에서 지원되는 원조식량들이 장마당에서 거래되고 인민들에게 제대로 배분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대부분 군대로 흘러가고 그나마 빼돌려져 비싼 가격에 판매되고 있다.

국제사회에서 북한 인권·민주화 문제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고 북한 인민은 더욱 더 주린 배를 움켜쥐고 있지만 김정일은 '총대중시', '선군정치'를 더욱 목놓아 외쳤다. 연초 공동사설에서부터 북한은 "선군혁명 노선은 우리시대 혁명의 영원한 전략적 노선"이며 "사회주의 건설의 만능의 보검"이라고 표현했다. 또 "선군혁명노선에는 총대로 혁명을 개척하신 위대한 수령님의 한생이 어려 있으며, 총대로 혁명을 끝까지 완성시키려는 김정일 동지의 강철의 의지가 구현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노동신문은 인민군 창건 69주년 기념일(4월 25일)을 맞아 발표한 "위대한 선군사상의 기치 따라 백전백승하자"라는 기념 논설에서 "인민군대의 총대 위에 평화 있고 사회주의가 있다"라고 거듭 주장했다.

5월 한달 동안에만 김정일은 18 차례의 공개활동 중 14번을, 군부대를 시찰하는 것으로 채웠다. 그것도 제688부대, 제224부대, 제230부대 등 강화도와 교동도가 보이는 최전방 부대를 주로 찾았다. 통일부 정보분석국 자료에 의하면 상반기 김정일의 공개활동 중 56%는 군관련활동이었다. 이와 함께 경비정이 NLL(북방한계선)을 침범하고, 관례와는 다르게 북한 상선이 남한 영해를 통과하도록 지시함으로써 의도적으로 긴장관계를 조성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최근 북한에서는 인민군 사단을 증설하고, 그동안 벌어들인 외화로 미그 전투기 등을 수리, 교체 하는 등 '군장비의 현대화'에 전력을 쏟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갈수록 명확해지는 것은, 이러한 '영도자'를 바꾸지 않고서 인민들의 삶이 달라질 수 없다는 교훈이다.

5.북·중·러 트라이앵글 가속화

내적으로는 총대중시 선군정치로 인민들을 얽어 메고 외적으로는 북·중·러 삼각동맹을 통해 반미연대전선을 형성하는 것이 김정일의 전술이다. 연초부터 이러한 움직임은 발빠르게 진행됐다. 남북정상회담 직전인 2000년 5월 중국을 방문하여 중국 지도부의 의사를 타진했던 김정일은, 올해 1월 극비리에 상하이를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상해가 천지개벽했다"고 말했다 전해지면서 화제가 되기도 했고, 곧이어 신의주 등을 경제특구로 개방할 것이라는 추측도 있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와 관련해 진전된 사항은 없다. 2000년 7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일본 오키나와에서 열린 G8 회담에 앞서 베이징과 평양을 잇따라 방문했다. 올해 7월에서 8월 사이에는 김정일이 장장 20여일간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러시아를 방문, 푸틴과 두 차례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어 9월에는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이 북한을 방문했다.

중국, 러시아, 북한은 과거 어느 때보다 활발히 오가면서 공생관계를 형성해가고 있다. 김정일은 국제사회의 지각변동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이를 정권연명의 수단으로 삼고 있다. 북한은 북미관계가 개선되지 않고 있는 이유를 '미국의 대북강경책'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실제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6.김정일 장남 김정남, 위조여권으로 일본 입국하려다 체포·추방

5월 1일,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이 일본에서 체포됐다. 당시 김정남은 도미니카 위조여권을 갖고 있었으며 남자 어린이 한 명, 여성 2명과 동행하고 있었다. 체포 후 김정남의 트렁크를 수색한 일본 경찰에 따르면, 그의 여행가방에는 100달러짜리 지폐가 3㎝ 두께로 가득 채워져 있고, 지갑 속에도 달러와 엔화 고액권이 두툼했다고 한다. 일본 TV는 김정남의 다이아몬드 박힌 롤렉스 시계와 금목걸이 등을 포착하여 보도하기도 했다. 176㎝가량의 키에 비만한 몸집, 가는 금속제 안경을 낀 김정남은 흰 티셔츠에 갈색 조끼, 검은 바지의 관광객 차림이었다. 그와 동행한 여성들도 고급스런 옷차림이었다. 김정남은 취조실에서 "도쿄에 있는 디즈니랜드를 보러왔다"고 진술했다 한다. 그는 "14∼15세 때도 도쿄 디즈니랜드를 관광한 일이 있다"고 말했으며, 이번에 도쿄에 오기 전엔 프랑스 파리를 거쳤다는 진술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화려하게(?) 세계 무대에 등장한 김정남은 5월 4일, 중국으로 추방됐다.

동아일보 객원논설위원인 한양대 이민웅 교수는 7월 21일 '난해한 일들'이라는 칼럼을 통해 그동안 자신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제외한 북한 사람 가운데 배 나오고 살찐 사람을 발견한 학생에게는 1만원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한다. 하지만 몇 년이 지나도록 이 현상금의 수혜자는 나오지 않았다. 이 교수는 "드디어 5월 초순 처음으로 현상금을 지급해야하는 일이 생겼다"고 이야기했는데, 바로 '김정남' 때문이었다.

7.황장엽씨 미국 의회 증언 논쟁

전 조선노동당 비서 황장엽씨를 미국으로 초청하여 북한문제에 대한 그의 견해를 들어보려는 미국 정치인들의 노력은 꾸준히 있어왔다. 2000년 11월 제시 헬름즈 미 상원외교위원회 위원장이 상원 청문회에 초청한 바 있고, 올해 3월 김대중 대통령도 방미기간 중 "신변안전이 보장된다면 황씨 방미가 문제될 것 없다"고 공개적으로 언급한 바 있다. 황장엽씨는 올해 2월 초청 수락 의사를 전달했다. 그러나 한국 정부는 그의 방미를 허락하지 않았다. 올해 7월, 이번에는 헨리 J 하이드 하원 국제관계위원장이 황장엽씨에게 초청 서한을 보냈다. 심지어는 초청 특사까지 보내왔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황씨를 면담하는 것마저 거부했다.

제임스 켈리(James Kelly) 미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는 "황씨의 미국 방문은 의회 차원의 초청이지만 미국 행정부는 그의 신변안전을 보장할 수 있다"고 밝혔다. 디펜스 포럼 역시 "특별기까지 지원할 의사가 있다"고 말했다. 줄곧 '신변안전'을 이유로 내세우던 한국 정부는 이번에는 "미국 의원 개인 차원의 초청일 뿐"이라고 의미를 축소하기에 바빴다. 그렇다면 미국 의회 상·하원이 전부 결의하고 미국 대통령의 재가라도 받아야 공식초청이란 말인가? 상원 외교위원장과 하원 국제관계위원장, 디펜스 포럼 등은 단지 '개인'인가? 결국 한국정부는 국제적으로 망신을 살 부끄러운 변명만을 거듭했다. 논리로 되지 않으니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충성심을 돋보이고 싶어하는 여당의 한 젊은 의원은 "황씨는 북으로 돌아가라"는 망발을 서슴지 않았다.

황장엽씨가 미국 의회에서 증언하는 것이 무엇이 그렇게 두려운가? 일각에서는 김정일 답방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만약 황씨의 방미가 실현된다면 북한이 이를 거세게 비난하며 답방 거부의 한 구실로 삼을 것은 분명하지만, 김정일의 한국 답방은 '손익계산서'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이익이 되면 황씨가 미국 의회에서 증언을 하든 말든 백 번 답방할 것이고, 이익에 맞지 않으면 엎드려 절을 해도 오지 않을 것이다. 남한에게 얻어낼 것이 있느냐 없느냐. 이것이 그의 판단 기준이다. 이미 그의 생각은 "더 이상 건질 것이 없다"로 굳어진 듯 하다. 그런데도 한국정부는 언제까지 황장엽씨의 미국 방문을 막아서고만 있을 것인가.

8.불안했던 남북관계, 안개를 건너 어둠으로

2000년 한반도는 금방이라도 통일이 될 듯한 분위기였다. 2000년 11월 19일 <시사저널>에 실린 여론조사에는 "통일후 한반도의 대통령으로 누가 적절합니까"라는 질문에 김대중, 이인제, 이회창에 이어 김정일이 4위에 랭크되기도 했다. "바야흐로 북한은 어둠 속에서 햇볕으로 나오기 시작했다"고 예측하는 북한전문가들이 많았다. 그러나 2001년 연초부터 남북관계는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지난 3월, 북한은 5차 장관급회담을 단 하루 앞둔 시점에서 일방적으로 '연기'를 선언했다. 그리고 미국에 대한 비난방송을 연달아 내보냈다.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열린 제46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남북 단일팀을 구성하자는 합의도 파기했다. 6월에는 10여차례에 걸쳐 북한 어선이 NLL을 침범하여 총격전까지 벌어졌다. 상선(商船)이 제주도 남단 공해상을 항해하면서 "장군님이 개척한 항로"라는 교신을 남기기도 했다.

금강산에서 남북공동 노동절 행사가 열리고, 평양에서 8·15 민족통일대축전이 열기기도 했지만 정부당국간 대화는 3월부터 9월까지 6개월간 교착상태에 머물렀다. 남한당국은 영문을 알 수 없었고, 전력지원과 금강산 관광대가를 요구하는 것이라는 남한 내의 추측만 무성했다. 그러다 장쩌민 주석의 북한 방문을 며칠 앞두고 북한은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명의로 갑작스레 대화 재개를 제안했다. 하고 싶으면 하고 말고 싶으면 마는 과거의 행태가 똑같이 되풀이되었다. 역시 북한은 변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역시, 6차 장관급회담은 아무런 성과 없이 결렬되었다. 정해진 수순을 밟아간 것이다. "모든 책임은 남한에게 있다"는 고루한 주장도 변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 북한이 다시 손을 내밀지는 김정일만이 알고 있겠지만, 한국정부의 화려한 햇볕은 이렇게 속수무책 어둠 속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9.장밋빛 환상으로 끝난 현대의 금강산 관광사업

현대에 대한 정부의 자금 지원문제도 계속 논란이 되고 있는 부분이다. 문제의 발단은 애당초 현대가 무리한 관광대가에 합의한 탓이다. 현대는 올해 2월까지 매월 800만 달러(96억원)씩을 북한에 제공해왔으며 3월부터 2005년 2월까지는 매월 1200만달러씩을 입산료 명목으로 줘야 한다. 모두 9억4200만달러가 되는 셈이다. 기타 교예단 공연료, 각종 시설 건축비, 사용료 등을 합하면 현대가 북한에 쏟아 붓는 돈은 북한의 외화소득 중 거의 전액에 해당할 정도이다. 한국 굴지의 그룹 현대가 금강산에 승부수를 던진 것일까? 그러나 금강산 관광은 한 때의 이벤트는 되었지만 수익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매년 72만명 이상이 관광을 해야 수지가 맞다는데, 이런저런 행사를 모두 금강산에서 하고 중고등학생 수학여행까지 동원을 했지만 지난 3년 동안 관광객을 다 합쳐도 43만 명이 채 되지 않는다. 현대는 관광료를 지급하지 못했고, 사업당사자인 현대 아산은 사상 최초로 직원들에게 월급을 지급하지 못하는 등 엄청난 재정난에 허덕이게 되었다. 북한은 현대의 이러한 관광료 미납을 남북관계 정체의 한 이유로 삼았다.

결국 대북문제와 관련해 정경(政經)분리 원칙을 내세우던 한국 정부는 입장을 선회해 공기업인 한국관광공사가 금강산 사업에 참여하도록 했다. 관광공사는 그동안 현대가 미납한 관광대가금을 치러주기 위해 곧바로 900억원의 남북협력기금을 신청했고, 이는 "밑빠진 독에 물 붓기"라는 여론을 낳게 했다. 조홍규 한국관광공사 사장은 "남북협력기금 900억원은 역사와 민족의 제단 앞에 헌금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고 했고, 정부는 1차로 450억원을 지원했다. 곧이어 금강산 육로관광, 관광특구 지정 등을 요구사항으로 내세우며 북측과 회담도 가졌다. 정부는 "육로관광만 실현되면 금강산에서 채산성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했다. 김윤규 현대아산 사장도 지난 6월 "6개월내에 육로 관광이 실현될 것"이라 장담했다. 하지만 이것은 '희망사항'에 불과해 보인다.

10.깊어진 남남갈등의 골

남남(南南)갈등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민주당 국가경영전략연구소 부소장인 황태연 교수가 국회에서 열린 '21세기 동북아평화포럼'에서 "김정일은 유아시절 발발한 6.25 전쟁에 책임이 없으므로 침략범죄 용의자도 아니고, 대한항공기 폭파를 지휘했다는 증거도 없고 조사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고 말한 사건이 올해 초 대표적인 남남갈등의 한 사건이었다. 이 발언을 둘러싼 여야간 설전이 벌어졌고, 황 교수는 부소장직을 사퇴하고 야당 의원 등을 고소했다.

현대의 금강산 사업을 정부가 지원하는 문제를 놓고 내내 갈등을 빚었고, 북한 선박의 영해 침범 문제를 놓고도 남쪽 여론은 갈라졌다. 7월에는 김원길 보건복지부 장관을 비롯한 민주당 의원 79명이 주축이 된 '새시대전략연구소'가 '통일헌법' 문제를 공론화하고 나서 또 한번 이념논쟁을 재현했다. 평양에서 열린 8·15 민족통일대축전 당시 남측 인사들의 친북적인 행동과 발언은 '남남갈등'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특히 동국대 강정구 교수의 "만경대 정신 이어받아 통일위업 이룩하자"는 글귀는 남북문제뿐만 아니라 문화, 예술, 교육 등 사회 전 분야를 통틀어 올해 최고로 화제가 된 말로 기록될 것이다. 그 글이 담고 있는 뜻이 백 번 옳다 해도 대학교수답지 않은 경거망동이었다. 참가단이 돌아오는 김포공항에서는 양쪽으로 선명하게 갈린 두 세력의 물리적 충돌까지 있었다. 이러한 민족통일대축전의 파장은 결국 햇볕정책의 전도사로 자타가 공인하던 임동원 통일부 장관의 해임안 결의로 이어지면서, 2001년 남남갈등의 정점을 이루었다. 김대중 대통령이 국군의 날 기념사에서 한국전쟁을 "우리 역사상 있었던 통일 시도 중 하나"라고 한 것도 논란이 되었다. 서로 물고 뜯는 남쪽의 모습을 TV 화면으로 흐뭇하게 바라보며, 이를 적절히 활용할 줄 아는 것도 김정일의 특출한 기술 중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