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들의 피눈물로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
D-데이를 앞두고는 하루 18시간씩 맹훈련
'남북의 창', ‘통일전망대’같은 통일관련 TV 프로그램, 또는 뉴스화면을 통하여 북한의
카드섹션 모습을 누구나 한번쯤은 보았을 것이다. 마치 화보집을 한 장 한 장 넘기며 바라보듯
정교한 그림이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펼쳐지고, 미사일이 발사대에서 날아가는 모습, 꽃이
피어나는 모습 등 동적인 형상까지 담아내는 기술은 가히 ‘세계 최고’라 할 만하다. 그러나
정상적인 의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그러한 모습을 연출하기 위해 끊임없이 동작을 반복하며 동원된
군중들이 얼마나 고초를 당했을지 한번쯤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북한의 카드섹션과 매스게임,
이른바 ‘대집단체조’는 주로 고등중학교 학생들의 몫이다. 이번 겨울에도 「아리랑」준비를 위해
숱한 학생들이 꽁꽁 언 손을 녹이지도 못한 채 하루종일 카드판을 넘기고 있을 것이다.
집단체조에 참여하는 것은 평양 학생들의 특권 중 하나다. 힘들고 고되긴 하지만 행사가 끝나면
상품이 주어지기 때문에, 행사종료만을 기다리며 그 혹독한 훈련을 견뎌낸다. 보통 5만명 이상이
동원되기 때문에 평양시에 있는 고등중학교 학생이 거의 모두 차출되며, 부족하면 인근에서 충원한다.
이번 「아리랑」공연도 아마 평양 시내의 전체 학생들을 총동원하였을 것이다. 보통 행사 6개월
전부터 연습을 시작하며 행사 시작 15일전부터는 모든 수업을 전폐하고 아침 6시부터 밤 12시까지
하루 18시간동안 맹훈련을 거듭한다.
집단체조는 크게 체조대(體操隊)와 배경대(背景隊)로 나눠진다. 체조대는 운동장에서 율동과
무용, 격파시범 등을 보여주는 단위로, 유치원 학생부터 군인, 무용수 등 다양한 사람들이
출연한다. 배경대는 카드섹션을 하는 단위로 경기장 전면 계단에 앉아 다양한 화면을 연출하며,
고등중학교 학생들이 맡는다. 카드섹션은 한 학급(40명 정도)이 세로로 한 줄을 이루고,
담임교사가 그 줄을 책임진다. 전체 그림을 화가가 그리면 마치 모눈종이로 옮겨 놓은 듯 그림의
색깔을 분할하여 각자 카드를 준비한다. 카드 제작은 본인이 직접 하는데, 이 과정을 작도(作圖)라고
한다. 준비비용은 개인의 몫이다. 행사 한 번에 학생이 넘기는 카드의 숫자는 대략 100개정도,
무게는 10Kg이 넘는다. 매 페이지마다 고유번호가 매겨져 있어 순서대로 이를 모두 외워야
한다.
실수는 용납되지 않는다
릉라도 경기장에 들어가면 의자 위에 카드를 올려놓을 수 있는 받침대가 길게 놓여있다. 여기에
카드를 놓고 정면 주석단 밑에 위치한 지휘자의 수기(手旗) 명령에 따라 카드를 넘긴다. 수만명의
두꺼운 카드가 0.1초의 차이도 없이 일시에 ‘쫙’소리를 내면서 펼치고 닫히는데, 그 소리만
들어도 전율이 느껴진다고 한다. 여기에 카드 뒤로 머리를 숨기는 훈련, 시차(時差)를 두고
닫고 펴는 훈련 등 갖가지 기교를 훈련한다. 매일 같이 10Kg가 넘는 카드를 짊어지고 다니면서,
카드번호를 일일이 외우고, 꼼짝없이 사람들이 들어찬 틈에 끼어 몇 시간씩 연습을 거듭한다.
생리현상도 제대로 해결할 수 없어 남학생들의 경우엔 오줌통을 옆에 놓고 서서 문제를 해결한다.
만약 본행사 도중이라면 절대 꼼짝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그냥 일을 보아야 한다.
조금이라도 실수가 있으면 바로 눈에 띄게 되는데, 연습도중이라도 이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교사의 폭언과 폭행은 물론이고, 김일성, 김정일의 얼굴 부분 그림에 위치한 학생들에게 ‘실수’는
곧 목숨을 내놓는 일이다. 체조대의 고생도 이루 말할 수 없다. 매일같이 똑같은 동작을 수도
없이 반복하여 움직이며 걷는 속도, 팔의 각도, 심지어는 얼굴 표정까지 하나로 일치시킨다.
하얀 옷을 입은 처녀들이 꽃 모양을 형성하며 한치도 흐트러짐 없이 군무(群舞)를 펼치는
것은 하루 아침, 한두 번의 연습으로 탄생한 것이 아니다.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그 표정의
뒤에 뼈를 깎는 고통이 담겨져 있다.
천둥소리같은 기합과 함성, 형형색색의 옷과 깃발, 한사람처럼 움직이는 수 천명의 어린이,
학생, 일반인, 군인, 컴퓨터 그래픽같은 학생들의 카드 섹션.... ‘인류 역사상 가장 잘
조직된 집단공연’이라는 평가에 걸맞게 공연은 충격적인 완성도를 보여줬다. 수출만 할 수 있다면
이 매스게임이 미사일을 제치고 대표상품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북한은 회담장보다 수 백 배 웅변적으로 그들의 메시지를 전달하려 했다. 학생들은 핵개발을
연상시키는 핵분열 장면을 연출했고, 카드 섹션은 장거리 미사일 발사를 그려냈다. 군인 수
백 명은 천둥소리 같은 함성을 지르며 총검술과 집단격파를 보여줬다. 카드 섹션은 이렇게 썼다.
"우리를 건드리는 자, 이 행성 위에서 살아남을 자리가 없다." 대표단과
기자단은 한대 얻어맞은 듯한 침묵 속에서 눈앞의 행사를 응시했다. (중앙일보 2000년 10월
25일자, 올브라이트 前 미 국무장관의 방북당시 공연되었던 ‘백전백승 조선로동당’에 대한
김진 특파원의 소감 中)
인민을 서커스단 광대로 만든 김정일
이렇게 해서 학생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과자 몇 봉지, 고기 몇 근, 학용품 몇 가지이다.
꼬박 6개월 동안 동원된 피눈물의 대가가 이렇게 차려지는 것이다. 그래도 북한 학생들은 ‘수령의
뜨거운 사랑’에 눈물을 흘린다. 만약 월드컵 개막식을 앞두고 남한 학생들에게 이러한 훈련을
시킨다면 어떻게 될까? 모르긴 해도 폭동이 일어날 것이다. 실제 6-70년대까지만 해도 권위주의적
국가들이 ‘국민통합’의 상징처럼 자랑하면서 각종 행사장에서 보여주었던 카드섹션은, 세계의
민주화가 진척되면서 ‘획일성 시대의 유물’로 사라진 지 오래다. 독자들은 지난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보았던 자유분방한 개폐막식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그런데 아직도 지구상에는 일사분란한 카드섹션과 같은 파시즘적 정치예술을 ‘단결력의 상징’으로
여기며 흐뭇해하는 독재자가 있다. 바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국방위원장으로 있는 김정일이다.
북한은 집단체조를 일종의 문화상품으로 개발, 해외에 수출해 왔는데, 60년대 초반부터 아프리카의
나이지리아 잠비아 등 40여개 국에 전문가들을 파견, 행사를 지도하며 외화벌이를 하였다.
그리고 이제는 급기야 수도 평양 한복판에 세트를 만들어 놓고 인민을 동원시켜 세계적인 구경거리로
만들려는 참이다. 10만명을 동원해 그들의 행동을 하나로 맞추는, 그런 파쇼정치가 가능한
곳은 지금 지구상에 북한말고 없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겠다는 생각이 아니고서야 정상적인
사람의 사고방식으로 어찌 이러한 행사를 기획할 수 있단 말인가. 우리는 우선 김정일의 이러한
사고방식에 분노를 금치 못한다.
세계에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파시즘적 정치예술
「아리랑」을 홍보하면서 북한당국은 "볼 기회를 놓치면 일생을 두고 후회하게 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틀린 말은 아니다. 김정일 정권이 사라진다면 지구상에서
두 번 다시 그러한 광경을 구경이나 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세계인의 양심에 호소한다. 그러한 행사를 관람하는 것은 본인의 자유이지만,
화려한 조명과 카드유희, 틀에 맞춰 찍어낸 듯한 무용동작의 이면에 숨어있는 피눈물을 기억하시라!
개혁과 개방으로 인민경제의 활로를 찾으려는 생각은 없이 전 세계를 상대로 한 협박정치, 구걸정치로
정권을 연명하고, 그동안 쏟아졌던 인류의 온정마저 인민에게 베풀지 않고 빼돌려 축재하는 독재자의
뻔뻔한 웃음을 잊지 마시라!
특히 좌파일수록 그렇다. 화려한 자본주의의 이면에 숨은 노동자들의 고통과 피눈물을 떠올리자던
맹세는 조금의 오차도 없이 김정일 정권과 현재의 북한에 갖다 대어야 한다. 인민의 현실에
대한 가슴 뛰는 애정과 열정에, ‘북한 인민’을 예외로 둘 수는 없지 않은가. 일사분란한
카드섹션과 군중무용에 감탄하며 박수치는 자칭 좌파가 있다면, 그는 이미 ‘파시스트’에 가깝다.
대규모로 북한에 찾아가 “이러한 획일적 주민통제와 청소년에 대한 착취를 당장 중단하라”고
외치며 항의시위라도 벌어야 진정한 좌파의 모습이다.
행여나 이런 집단체조를 자발적인 인민의 단결, 수령에 대한 충성심의 발로라고 주장할 극소수의
친북세력에게는 엄중히 경고한다. 가슴에 손을 얹고 대답해 보라. 그러한 단결과 충성심이 나라의
문을 외부에 열어놓고 자유로운 판단이 가능한 상태에서 일궈낸 결과인가를. 눈과 귀와 입을
틀어막고 만들어낸 단결과 충성은 단지 노예의 삶이 아니고 무엇인가. 김정일의 폭정과 당신들의
방조 속에, 오늘도 피눈물을 뿌리며 북녘의 형제들이 울고 있다.
북한의 주요 집단체조 작품 (자료출처:연합뉴스)
공연
제목
장소
참가인원
1958.08
영광스러운 우리 조국
평양
확인 불능
1960.05
우리 조국 만세
평양
2만여명
1961.09
노동당 시대
평양
2만7천여명
1962.09
빛나는 우리 조국
청진
2만7천명
1963.08
노동당의 깃발따라
혜산
확인불능
1964.05
독로강반의 새 노래
강계
2만여명
1964.10
천리마조선
평양
3만7천명
1970.11
노동당의 기치따라
평양
연7만5천명
1975.09
주체의 조선
평양
5만여명
1975.10
위대한 주체의 기치따라
평양
3만5천여명
1977.04
조선의 노래
평양
5만여명
1980.10
당의 기치따라
평양
5만여명
1982.04
인민들은 수령을 노래합니다
평양
확인불능
1985.09
빛나는 조선
평양
확인불능
1988.09
공화국이 걸어온 40년
평양
5만여명
1992.04
수령님 모신 내 나라
평양
10만명
1994.03
농촌테제 위대한 승리
평양
1만여명
2000.10
백전백승 조선노동당
평양
10만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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