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북한을 움직이는 키워드는 '4대 제일주의', '아리랑', ‘라남의 봉화’가 될 것으로 보인다. 역시 북한은 ‘구호(口號)의 나라’이다. 얼마 전까지 북한을 움직이던 키워드는 '선군정치', '강계정신', '총대우선주의', '붉은기사상' 등이었다. 매시기 이렇게 구호를 바꿔 걸고, 그에 맞는 이벤트를 준비해야 나라가 굴러간다. 그리고 이러한 구호는 북한내부에서 보다는 오히려 남한의 이른바 ‘전문가’나 기자들에 의해 그럴듯하게 해석된다. 이번에 새롭게 제기되는 키워드도 이렇게 해석해 볼 수 있다.

일단 '4대제일주의'는 총론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키워드다. 그리고 ‘아리랑’은 2002년 대남·대외전술을 대표하는 키워드, ‘라남의 봉화’는 경제건설과 대내정책을 가르쳐 주는 키워드. 이 세 개의 키워드를 이전의 키워드와 비교해보자면, 이전의 '선군정치', '강계정신' 등이 위급하고 절박한 상황을 대변하는 구호들이었다면 이제 새롭게 제기되는 구호들은 그것을 극복한 '승리자의 기세', ‘여유만만’을 느끼게 한다. 이렇게 보면 정말 그럴듯한 해석이다.

구호는 ‘깃발’이다. 깃발은 전쟁터에서 병사들의 행동을 규율하고 사기를 북돋는 역할을 한다. 구호의 변경은 이 깃발을 고쳐 단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정말 정세가 달라져서 깃발을 바꿔 다는 것일까, 아니면 당면한 상황에 맞춰 그때그때 색깔만 달리하는 ‘포장’에 불과한 것일까. 확실한 것은, 정권 수립이래 지금까지 북한은 백과사전 한 권은 족히 됨 직한 숱한 구호들을 제시해 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보다 확실한 것은, 기네스북에 오를 만큼 많은 국가적 구호를 반세기동안 내걸어왔음에도 인민들의 생활은 그다지 달라지지 않고 오히려 악화일로(惡化一路)를 치닫고 있다는 것이다.

성강의 봉화 → 락원의 봉화 → 라남의 봉화

북한은 지난해 11월 22일 “라남의 봉화 따라 강성부흥의 북소리 높이 울리자”는 노동신문 사설을 통해 처음으로 ‘라남의 봉화’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등장시킨 이래 지금까지 몇 개월동안 줄기차게 이를 선전하고 있다. ‘라남의 봉화’에 대한 각급 단위 궐기대회를 연이어 개최하고 있고, 이에 대한 시, 소설, 영화, 그림 등 예술작품 창작을 독려하고 있으며, ‘라남의 속도’라는 파생어(?)까지 만들어 냈다.

‘라남의 봉화’는 새삼스런 슬로건은 아니다. 북한은 지난 98년에도 ‘성강의 봉화’를 슬로건으로 내걸었고, 2000년에는 ‘락원의 봉화’를 슬로건으로 앞세운바 있다. 성강의 봉화는 98년 3월 김정일이 함북 김책시에 있는 성진제강연합기업소룰 현지지도한 후 나온 슬로건이고, 락원의 봉화는 평북 신의주시에 있는 락원기계연합기업소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성진제강연합소는 이북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큰 제철공장이고, 락원기계연합소는 기중기, 트랙터 및 탱크 등을 생산하는 중장비 공장이다.

‘성강의 봉화’이래로 북한은 경제슬로건에 ‘봉화(烽火)’라는 이름을 붙이고 있는데, 봉화에는 ‘맨 처음 시작한 창조적·혁신적 발기’(조선말대사전, 북한사회과학출판사刊)라는 뜻이 담겨져 있다. ‘라남의 봉화’는 함북청진에 있는 라남탄광기계연합기업소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지난해 8월 김정일이 러시아 방문을 마친 후 현지지도한 라남탄광기계연합기업소(함북 청진) 노동자들의 투쟁기풍을 전 사회에 일반화하자는 슬로건이다.

일각에서는 ‘라남의 봉화’는 석탄 등 연료생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슬로건이라 추측하기도 하고, 또 한편에서는 라남의 봉화가 ‘과학기술중시’를 외치던 시점에 등장한 것으로 미루어 기술혁신과 업종전문화를 추구하는 방향에서 제시되었다고 추측한다. 무엇이 맞는 말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다시 한번 분명한 것은, 자꾸 이렇게 이름은 바뀌지만 그에 담긴 내용은 기막히게 추상적이라는 점이다. 라남의 봉화를 설명하고 있는 북한의 노동신문 사설을 보아도 △완강한 실천력 △끊임없는 사색을 통한 과학기술 개발 △유휴자재 활용 △열정적이고 진취적인 사업기풍 △적극적인 실리 추구 등을 라남탄광기계연합기업소 노동자의 투쟁 기풍이라고 소개한 후 주민들에게 이를 본보기로 삼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는 이전의 각종 슬로건에서도 매번 등장하던 단골메뉴들이다. 실질적인 실천내용이라고 해봤자 “유휴자재를 활용하라”는 것뿐이다.

알맹이 없는 구호 남발은 궁지에 몰린 자의 몸부림일 뿐

지난 1월 17일 노동신문은 "1950년대의 투쟁정신으로 살며 일하자"는 장문의 사설을 실었다. '1950년대의 투쟁정신'이라는 또다른 구호가 제시된 것이다. 이 역시 제목만으로도 알 수 있는 내용이다. 전쟁 직후인 1950년대의 정신으로 살며 일하자는 것이다. 미제에 의해 폭격된 잿더미 뿐인 나라에서 천리마의 대고조를 일으켰던 선배들의 뜻을 이어 받자는 내용인데, 지금도 그때처럼 아무 것도 없는 처지에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시인하려 했던 것일까? 사설은 “새세기의 요구에 맞게 사업작풍과 일뽄새를 대담하게 혁신해 나가야 한다”는 공허한 메아리를 되풀이 한 뿐 역시 국가 건설과 발전에 대한 별다른 비전을 보여주지 못한다. 고작 “오늘의 시대는 실력전의 시대”임을 강조하면서 “높은 실력을 겸비한 사람이 오늘날의 참된 충신”이라고 강조하고 있는 부분이 특이한 부분이다. 또 “한 와트의 전기, 한 덩어리의 석탄, 한 방울의 기름이라도 절약하고 극력 아껴 쓰는 것은 1950년대의 중요한 투쟁기풍”이라고 유독 ‘절약(節約)’을 강조하고 있는 것도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이것을 전문인력 양성의 필요성과 물자부족으로 인해 절약정신을 강조한 것이라고 해석한다면 그에 반대할 뜻은 없지만, 북한의 선동구호나 노동신문 사설은 특별히 깊은 뜻을 담고 있기보다는 ‘주민단속용’으로 보는 것이 낫다. 문구(文句)를 놓고 해석하다보면 오류를 범하기 쉽다는 뜻이다.

북한은 지금까지 "모든 것을 전후 인민경제 복구발전을 위하여"(1950년대), "생산도 학습도 생활도 항일유격대식으로"(1970년대), "모두 다 80년대의 김혁ㆍ차광수가 되자" (1980년대),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1990년대) 등 각종 구호를 쏟아냈다. 북한의 몇몇 문예창작자들에 의해 만들어지는 이러한 구호와 사설은 당연히 김정일의 결재를 받고 발표된다. 한 나라를 이끄는 전략적 슬로건이, 각계 전문가들의 구상과 협의, 검토 속에 단계적인 실행목표와 점검체계를 갖추면서 마련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임기응변식으로 인민들의 눈을 가리는 선동구호로 마련되는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나라가 발전하겠는가.

이렇게 알맹이 없는 ‘구호’가 자꾸 쏟아져 나온다는 것은 그만큼 주민통제가 어려워진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이제 '1950년대의 정신'까지 운운하는 걸 보니 김정일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고 있다는 것은 확실한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