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30일 미국 대통령 조지 W. 부시는 의회에서 행한 연두교서를 통해 북한과 이란, 이라크를 '악의 축'(Axis of evils)이라고 표현하였다. 이 '악의 축' 발언은 지금껏 '논쟁의 축'이 되고 있다. 부시 대통령이 말한 '축(軸)'에 포함된 국가들이 거세게 반발하는 것은 물론이고, 미국 내에서조차 그 타당성의 논란이 일고 있다. 한국 내에서도 여당인 민주당이 실시한 ARS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의 56.4%가 부시의 이번 발언에 대해 '바람직하지 않다'고 대답하였다. 동 조사에서는 또 한반도 긴장고조의 책임을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37.8%가 '미국 부시 행정부'라고 답했다. '북한 김정일 정권'이라고 대답한 응답자는 30.8% 였다. 2월 5일에는 민주당 의원 50명이 부시의 대북 강경 발언에 대한 반대성명을 냈고, 각계 사회단체들도 우려·반대·규탄 성명을 발표했다. 2월 19일 부시 대통령의 한국 방문을 앞두고는 반미(反美)성향 대학생들의 각종 시위도 이어졌다.

부시 대통령의 연두교서는 북한을 가장 먼저 거론하고 다음으로 이란, 이라크를 차례대로 거론하면서 "이런 나라들이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래서 부시의 발언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악의 축' 국가 중 '북한'이 포함된 것을 주로 문제삼고 있다. 한국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이란, 이라크가 포함된 것을 문제삼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 하다. 하지만 부시에게 '찍힌' 세 나라 중 가장 억울하게(?) 생각할 나라는 북한이 아니라 '이란'이 아닐까 싶다.

이란 정부의 개혁정책은 보수파의 방해로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

한국 정부에서 흔히 '햇볕정책(Sunshine Policy)'이라고 말하는 정책, 즉 폐쇄된 국가를 지원과 교류·협력 등을 통해 개혁·개방으로 이끌어내는 정책은 집권층에 그런 변화의 가능성이 있을 때, 혹은 집권은 하고 있지 않지만 집권층에 일정한 여론 압력을 형성할 수 있는 세력이 형성되어 있을 때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이러한 정책은 폐쇄와 독재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니 개혁과 개방, 국제적인 협조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라고 바른길로 인도(引導)해 주는 정책이다.

물론 여기에는 몇 가지 원칙과 방도가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러한 정책을 취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폐쇄적이고 독재적인 정권을 끝없이 도와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밑에서 신음하고 있는 '인민들'을 구원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원을 할 때에는 정권이 악용할 수 있는 소지를 철저히 없애고 인민들에게 직접 전달될 수 있는 검증의 통로를 확실히 하여야 하며, 무작정 던져주고 보는 식이 아니라 그에 상응한 대가와 조치를 취할 것을 요구하여야 한다. 만약 이에 응하지 않는 정권이라면, 즉 자존심이 조금 상하더라도 어떻게든 국민을 먹여 살려야겠다는 각오가 없는 정권이라면, 국가 대 국가의 지원은 별 의미가 없다. 인민들이 극한의 궁핍을 피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인도적 지원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햇볕정책은 권력내부에 강경파와 온건파가 대립되어 있을 때 어느 한 쪽을 선별적으로 지원함으로써 일정한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이란의 경우가 그렇다. 알다시피 이란은 모하마드 하타미(Khatami) 대통령을 중심으로 한 온건개혁파와 종교 지도자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Khamenei)가 정점으로 있는 보수강경파가 일정한 긴장 관계 속에 대립하고 있다. 미국이 이란을 '악의 축'이라고 규정함으로써, 이란 내에는 이제 온건개혁파의 입지가 크게 축소되고 보수강경파의 목소리가 높아질 가능성이 커져 버렸다.

이란의 역사를 간략히 훑어보자. 6만명이 희생된 이란혁명을 성공시키며 팔라비 왕조를 몰아내고 등장한 시아파(Shia派) 종교지도자 아야툴라 호메이니는 10년의 집권기간동안 이란을 신권(神權)이 지배하는 이슬람 근본주의 국가로 만들어놓았다. 그는 시아파 성직자들을 정부 주요 정책결정기관의 책임자로 임명하고 팔라비 정권을 위해 일했던 수 백 명을 공개처형 했으며, 국내 반대세력을 철저히 억압해 조직적으로 투옥하거나 살해했다. 여성은 베일로 얼굴을 가리게 했으며, 서양음악과 음주를 금지시키고, 태형과 공개처형 등 비인도적 이슬람 형벌을 부활시켰다.

또한 호메이니는 현대사에 있어 '반미의 화신'이었다. 이란 혁명이 일어나던 해인 1979년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는 미국 대사관에 미국인 52명을 444일간 억류한 세계적인 사건이 일어났는데, 지금도 테헤란의 옛 미대사관 벽면에는 "이슬람의 대학생과 전사들이 몸을 던져 스파이의 소굴('美대사관'을 이르는 말)을 점령, 국민들의 명예를 높였다"라는 호메이니의 격려문구가 이란어(파르시)로 쓰여있다. 호메이니는 80년대 내내 테러단체인 하마스와 헤즈볼라의 은신처를 제공하는 등 각종 테러행위를 지원한 혐의를 받고 있다. 지난해 뉴욕의 세계무역센터 테러를 지시하였던 오사바 빈 라덴도 알고 보면 호메이니의 정신적 제자나 다름없다.

89년 호메이니가 사망한 이후에도 이란은 세계 제일의 반미 국가로 미국의 기나긴 경제제재와 무기수출금지의 테두리 속에 갇혀 있었지만, 97년 대통령 선거를 통해 하타미가 집권하고부터 조금씩 분위기가 달라졌다. 개혁파인 하타미는 지난해 미국에서 테러사건이 발생했을 때도 조의를 표명하고, 아프간에 대한 반테러전쟁에도 협조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 물론 이것은 1998년에 탈레반이 18명의 이란 외교관과 언론인을 처형하여 전쟁 일보직전까지 흘러갔던 사건과 관련하여 이란과 아프간 사이에 좋지 않은 감정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해 9월 뉴욕을 방문해 유엔총회연설에서 '문명간 대화'를 주창하기도 하는 등 하타미가 미국과 서방세계에 대해 유화적인 입장을 취해왔던 것은 사실이다. 이란 국내적으로도 머리카락이 보이는 개방형 차도르, 청바지와 짧은 치마가 허용되고, 가슴이 패인 웨딩드레스와 인터넷 카페가 등장하는 등 자유화와 개방의 물결이 밀려오고 있다고 한다.

미국 언론은 이란의 변화 속도가 미미하다고 불평하지만, 하타미의 개혁정책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이란 내 보수강경파들이다. 현재 이란 정부의 대표자는 대통령인 하타미이지만 실제 국가의 최고지도자는 종교지도자인 하메네이이기 때문이다. 이란의 성직자들은 아직도 사법부 최고기관인 혁명수호위원회에 다수파를 장악하고 있다.(혁명수호위원회 12명의 위원 중 6명은 최고지도자가 임명한다.) 의회의 다수파가 개혁파인 것과 대비된다. 의회에서 법안이 통과되어도 혁명수호위원회에서 거부하면 법으로 공포되지 못한다. 최근에도 의회가 통과시킨 외국인 투자유치법 등이 4차례나 헌법수호위원회에서 부결되었다. 심지어는 대통령 취임조차 혁명수호위원회 전원이 참석한 가운데 이루어지는데, 지난해에는 하메네이가 대통령 취임식을 보이콧하여 취임이 이틀 미뤄지기도 했다. 또 보수파들은 개혁파들의 활동을 방해하기 위해 각종 혐의를 뒤집어 씌워 구속시키기도 하고, 각종 개혁파 신문을 폐간시키는 등의 방법을 쓰고 있다. 유엔인권위원회의 이란 인권 특별조사관 모리스 코피던은 "보수파가 자의적으로 구성하여 권력의 발판으로 삼고 있는 혁명수호위원회가 이란의 대외 개방과 국내 민주화의 가장 큰 장애"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란의 이야기를 길게 했지만, 살펴보았듯 이란과 북한은 엄연히 다르다. (북한의 상황에 대해서는 굳이 설명하지 않겠다.)이란은 개혁파와 보수파가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고, 보수파의 준동이 있긴 하지만 개혁파가 의회의 다수파를 점하고 있는 등 개혁파의 입지가 점점 확대되어 가고 있는 국가이다. 만약 이번에 미국이 '하메네이'나 '혁명수호위원회'라고 했으면 모르겠으나 '이란'이라는 국가를 악의 축으로 지명한 것은 이란으로서는, 특히 개혁파들은 너무도 억울하고 화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란 의회 내 개혁파들은 2월 2일 내놓은 성명에서 "부시는 이란 내부의 변화에 반대하는 보수적 성직자들을 부추겼으며, 국제사회와의 관계를 증진하려는 개혁파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미국이 이란이라는 국가 이름 대신 '하메네이'나 '혁명수호위원회'를 악의 축으로 지칭했다 하더라도 이는 북한의 상황과 다르다. 왜냐하면 이란 보수파의 권력기반은 전적으로 폭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란의 보수파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급격한 변화를 바라지 않는 이란 국민들의 정치적 습성에서 그 이유를 찾아 볼 수 있는데(정치적 입장에서는 80%이상의 국민이 하타미를 지지하지만 종교적 입장에서는 성직자들을 지지하고 있다), 그래서 하메네이와 혁명수호위원회가 제거된다하여도 보수파가 완전히 사라진다는 보장이 없다.

하지만 북한은 모든 권력이 김정일에게 집중되어 있으며, 모든 국가 조직 체계가 김정일이 통치하기 편하도록 짜여져 있다. 그의 집권과 권력 유지에 어떠한 국민적 동의도 없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권력상층부 사이에는 어떠한 정신적 교감이나 수평적 의사교환, 정보의 소통이 불가능하다. 오직 수령에 대한 충성만이 있을 뿐 보수파와 개혁파가 따로 있을 수 없다. 이러한 북한 사회의 특징은 북한 혁명을 극도로 어렵게 만드는 요소이지만(예를 들어, 권력내부의 궁정쿠데타에 의한 혁명 가능성이 희박하다), 또 한편으론 북한 혁명의 목표를 명쾌하게 규정지을 수 있다. 즉, 김정일만 제거되면 되는 것이다.

최고지도자를 제거하고 나면 생길 수 있는 집권 상층의 내분, 그로 인한 국가적인 혼란 같은 것을 북한 혁명에서는 별로 걱정할 필요가 없다. 김정일 후계 자리를 노린 군부 실력자 사이의 세력다툼과 암살, 총격전 등을 예상하는 사람이 있는데, 설령 그러한 일이 발생한다고 하여도 김정일 실각 후의 정치적 혼란이 김정일 치하에서의 지금 인민들이 겪고 있는 고통보다 크지는 않을 것이다. 엄청난 인원이 남한으로 몰려오면서 21세기판 보트피플이 생겨날 것이라 우려하는 사람 또한 있는데, 김정일이 싫어 '어서 저 놈이 물러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 '악의 화신'이 제거되었는데 무엇 때문에 목숨을 건 탈출을 한다 말인가. 구체적인 방도의 문제이므로 차차 고민해보아야 할 사안이지만 남북간 인적교류는 인정하되 거주 이전 등은 제한하면서 과감한 개혁조치를 취해나간다면, 북한 인민들은 분명히 국가 재건에 팔 걷고 나설 사람들이지 나라가 싫다고 도망갈 사람들이 아니다.

3개국 주민이 아니라 지도부가 악이라면 김정일은 최악이요, 악의 화신이다

부시 대통령은 연두교서를 통해 "북한정권은 국민들이 굶고 있는 동안에도 미사일과 대량살상무기 개발에 열중하는 나라"라고 이야기했다. 또 이란은 "선출되지 않은 소수(보수파를 지칭)가 국민들의 자유를 향한 갈망을 억압하면서 무기와 테러를 수출하고 있다"라고 했고, 이라크는 "탄저병과 신경 가스, 핵무기 등을 개발하고 수출하는 나라"라고 표현했다. 이라크는 지난 걸프전에서 한번 맞부딪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눈엣가시로 생각되는 것이 당연하겠지만, 이란의 경우는 좀 의아하다. 아마도 미국이 오래 전부터 요구해왔던 국제 테러분자인 이마드 무그니예와 아마드 무가실의 인도를 거부한 것, 언론에 대한 탄압, 개방정책의 미진, 지난 10년 동안 120억달러 내지 150억달러의 돈을 투입하여 각종 무기공장을 지었다는 정보, 러시아와 최신 무기 기술을 공급받을 수 있는 계약을 체결하고 북한으로부터 사정거리 1200km의 미사일들을 사들였다는 첩보 등에 기인하는 것 같다.

이 글은 이란을 옹호하자고 쓰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위 혐의(?)는 현 이란정부가 직접 관련되었다는 증거가 희박하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이란 정부가 아프간전쟁에 더욱 적극적으로 협조하지 않은 것에 대한 미국의 감정적 응징이라고도 풀이하기도 하는데(알카에다 조직원 중 일부가 이란으로 도피했다는 추측이 있었으나 이란은 인도를 거부했다), 앞서 말했듯 이것은 개혁파의 입지를 더욱 협소하게 하는 악수(惡手)일 뿐이다.

이렇게 볼 때 이란을 '악의 축'으로 지명한 부시의 연두교서는 득보다 실이 많을 수도 있다. 하지만 북한을 두고 볼 때는 특별한 득실이 있을 리 없다. 자기 나라를 악의 축으로 지명했다고 목소리에 힘을 얻을 강경파가 따로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로 인해 위축될 온건파는 더더욱 없다. 다만 부시의 이번 발언이 그간 쌓아온 남북화해의 성과를 냉전시기로 되돌렸다고 믿는 - 남북관계가 소원해진 것은 북한이 일방적으로 회담 중단을 선언한 1년여 전의 일인데도 말이다 - 남한 내 일부 인사들의 목소리와 반미여론을 조금 높여놓기는 했다(미국의 대북 전쟁의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걱정하는 사람도 있는데 중국이 북한의 배후에 존재하는 한, 또 남한 내 반전 여론이 높은 상황에서 미국의 대북 전쟁 개시 가능성은 현재로서는 제로에 가깝다.).

이제 이야기를 정리해보자. '악의 축' 발언에서 약간 우려가 되는 것은, 그것으로 인해 국제 사회의 일부 우둔한 사람들이 혹시 북한 인민 전체를 적으로 상정해 버리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즉 김정일 체제가 인민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잘못된 인식아래, 김정일을 지지하는 인민들 모두를 '악'으로 상정해 버리는 잘못 말이다. 혹은 김정일 체제가 3백만에 이르는 조선노동당원들에 의해 유지되고 있다는 잘못된 인식아래, 그들도 함께 제거하여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일정한 희생도 감수하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잘못 말이다. 미국 국무장관 콜린 파월(Powell)은 2월 1일 유니비전 네트워크TV와 가진 회견에서 "부시 대통령의 말은 이들 3개국 주민들이 악이 아니라 그들 위에 군림하는 지도자들이 악이라는 뜻"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굳이 파월의 말이 아니더라도 북한 인민들은 '악'이 아니다. 악의 축으로 지명된 세 나라의 지도자가 '악'이라고 한다면, 북한의 김정일은 '최악(最惡)'이다. 아니, 한 명을 제거함으로써 문제의 본질을 해결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김정일은 최악 정도가 아니라 '악의 화신(化身)'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부시는 이렇게 말해야 한다. "Kim Jong-Il is evil personified."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