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인권실현에 세계적 관심을 촉구하는 일본 오사카에서 도쿄까지
'한일 대학생 자전거 행진' 참가자의 일기
김영구 (前 선문대학교 신문사 편집장)
지난 2월 13일 오후, 지난 98년 12월에 한국으로 귀순했다가 아내를 데려오기 위해
2000년 6월 재입북했던 유태준 씨가 극적으로 탈북에 성공해 기자회견을 했다고 언론에서는
대서특필을 하며 떠들썩했다.
더욱 최근의 언론매체를 접하다보면, 미국의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이란 발언이 국제적
이슈로 언론의 입방아에 하루가 멀다하게 오르내리고 있다. 오늘도 이렇게 예측불허의 국제관계는
반복에 반복을 되풀이하고 있다. 이에 우리나라도 이런 영향을 받아 확실하게 외교 방향을 잡지
못한 채 태풍의 가장자리를 돌면서 외력과 인력의 균형을 이루며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를 하고
있는 듯한 인상이다.
그래서 인지 일본에서의 북한 인권실현을 위한 한일대학생 자전거 행진동안의 여정들이 생생하게
회상된다. 지금도 그 때를 생각하면 심장이 펄떡펄떡 뛰기 시작하고 두 눈의 동공이 갑자기
팽창하게 된다. 아직도 자전거 행진 중 겪었던 일상의 작은 일들까지도 뚜렷하게 기억하며 모든
순간 순간들을 잊지 못하고 있다.
오르막길에서 힘겹게 자전거를 끌고 올라가던 일, 급경사 길을 따라 30여분을 내리 달리던
짜릿하고 스릴 넘치는 느낌, 햇빛을 쬐며 하루종일 달린 탓에 벗겨진 살갗이며 검게 그을린
듯한 얼굴.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로 열의에 찬 참가자들의 얼굴과 뜨거운 가슴은 지금도 느낄
수 있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펜 끝에서는 이루 말 할 수 없는 많은 감정들로 만감이 교차하고
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동안 우리 일행들은 생사를 같이하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눴다.
우리 참가자들은 어려움을 함께 하며 같은 뜻을 가슴에 품고서 지난 2월 4일부터 9일까지
5박 6일 동안 오사카에서 동경까지 600㎞를 ‘북한 인권 실현’을 위해 달리고 또 달렸다.
‘함께 있을 때, 두려울 것이 없다’라는 어느 영화의 카피처럼, 우리 한국측 11명(흥순,
정백, 민수, 영석, 수원, 지수, 서화, 민선, 익수, 치헌 그리고 나)과 일본측 5명(이자와,
시바, 케이코, 유미, 하야시) 총 16명이 함께 있을 때 두려울 것은 없었다. 단지 멋진
한 팀이요 한 마음 한 가족이었다. 일상으로 돌아 온 지금, 추억의 책장을 넘기듯 7박 8일간의
이번 행사의 전체 여정을 펼쳐 보련다.
이번 자전거 행진은 '제3회 북한인권·난민문제 국제회의' 개회에 앞서 한-일 청년·대학생들이
북한의 인권문제해결에 대한 세계 및 일본현지 언론에 관심을 촉구하고 호소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또 이번 행진은 북한 인권·난민문제 해결을 위한 한-일 청년·대학생들간의 교류와 연대의
장을 마련하고 향후 화합을 다지는 자리이기도 하다.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 우리와는 오랜 역사 속에서 수많은 곡절로 얽혀 있어 남다른 의미를
지니는 나라이다. 솔직히 일본 여행은 이번이 초행이라 많은 기대를 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지난 학기 강의시간에 '일본연구' 수업을 들으면서 일본의 역사와 발전과정에 대해서는 간략하게나마
공부한 덕분에 일본여행은 자신만만하기도 했다.
처음 일본에 도착하고 실제 일본을 접하니 신선한 충격을 많이 받았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세계 경제 대국임을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직접 육안으로 보았을 때는 그렇지 만도 않았다는
것이다.
맨 처음 숙소에 도착했을 때의 작은 방, 좁은 엘리베이터, 소형자동차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길거리, 사치스러움과는 거리가 먼 일본사람들의 옷차림 또한 어떤가.
이런저런 풍물을 접하면서 많이 놀랐다. 아니 충격 그 자체였다. 작은 나라 일본이지만 결코
작지 않는 나라 일본임을 깨달았다.
▶ 2월 3 / 4일 : 오사카∼우에노
자전거 행진에 참가하는 우리 일행은 지난 2월 3일 인천 국제공항을 출발해 오후 2시쯤
일본 간사이 공항에 도착했다. 우선 도착하자마자 우리 일행은 숙소가 있는 오사카 시내로 자리를
옮겼다. 오사카에 대해서 짧은 글로 소개하자면, 일본 제2의 도시인 오사카는 오랜 전부터
긴키 지방의 중심이며, 상업의 도시로 알려져 왔다. 예전에 바다를 이용하여 중국·한반도와
왕래하였던 오사카는 현재는 간사이 국제 공항을 통해 전 세계로 펼쳐 나가고 있다. 잠시 후
일행은 일정에 따라 일본측 참가자들과 상견례를 가졌다. 밤이 깊어 가는 동안 우리 일행과
일본측 참가자들은 비록 의사는 잘 통하지 못할 지언정 내내 웃음과 어설픈 언어로 의사소통을
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우정을 쌓았다.
자전거 행진 첫 날인 2월 4일은 일명 ‘고난의 행군’이란 타이틀이 붙여졌다. 우선 우리
일행은 ‘길수가족 그림 전시회’ 행사장으로 가서 전시회를 도왔다. 전시회장에 도착한 우리는
판넬을 옮기고 길수 가족이 접었다는 종이학을 작은 비닐 봉지에 담는 일도 도왔다. 전시회
준비를 마치고 간단하게 출정식도 가졌다.
출정식을 끝내고 우리는 서둘러 이번 행진에 사용할 자전거가 보관된 곳으로 이동했다. 일본
오사카 현지 시각으로 오후 1시 10분.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시간이 다가왔다. 우리
일행들은 모두 다 같이 손을 모으고 ‘파이팅’을 외치며 힘차게 자전거 페달을 밟기 시작했다.
우리 일행은 첫날 하루 동안 80여㎞를 달려 ‘우에노’에 도착했다.
▶▶ 2월 5일 : 우에노 ∼ 요카이치
행진 둘째 날인 5일 아침이 밝았다. 다들 피곤한 기색이 역력했다. 나 또한 자전거를 꽤
오랜만에 타는 것이라 엉덩이와 허벅지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오늘은 일본의 진면모를 감상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일본의 산과 공기, 들판 등 일본의 일부분이마나 살갗으로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들판을 달리고 오르막길을 오르고 내리막길을 달리며, 힘들고 빡빡한 일정
속에서도 일본을 알 수 있는 시간이 있어 고통은 반으로 줄어들기도 했다.
한 마디의 이야기조차 아까운 바쁜 일정 속에서도 미리 정한 목적지까지 힘차게 자전거 페달만
밟아야 했다. 오늘 하루도 우리 일행에게는 맛있는 음식과 편히 쉴 수 있는 숙소는 마련되어
있겠지만 목적지까지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충분치 않았다.
행진 일정동안은 누가 먼저 이야기를 시작하기가 무섭게 침묵 속에서 자신과의 싸움이 계속
이어졌다. 이런 침묵 속에서 서로를 위로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마음속으로, 눈빛으로만
북돋아 줄 수밖에 없었다. 이번 행진 통해 일본 대학생들도 그렇고 우리 일행도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낯설고 어색했지만 시간이 차츰 흐르면서 서로를 이해 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오늘은
자전거 주행 중에 자전거 펑크가 나는 등 사소한 사고가 일어났다. 이번 행진이 마음처럼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반증이라도 하는 듯 했다. 앞으로의 여정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짐작했다.
‘우에노’에서 ‘요카이치’까지 갔다. 내일은 또 어떤 예기치 못한 일들이 우리가 달리는
길 위에서 기다리고 있을지 설레임과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내일을 기약했다.
▶▶▶ 2월 6일 : 요카이치 ∼ 하마마쓰
행진 셋째날인 2월 6일, 비가 내린 다음 날이라 화창한 아침을 맞이했다. 햇빛에 얼굴이
붉게 달아 올랐다. 오르막길을 걸어서 오르고 해안선을 끼고 내리막길을 달릴 때는 엉덩이와
다리가 아픈 것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오늘 하루도 쉽지 않는 여정동안 함께 달려준 일행들에게 고마울 따름이었다.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는 것이며, 왜 여기에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 확실하게 떠오르는 답은 없었다. 하지만
우리들이 꿈꾸는 세상은 똑같지 않을까 한다. 그런 우리들이 꿈꾸는 세상을 위해 우리는 오늘도
뜨거운 가슴을 안고 달렸다. 따르릉 자전거 벨소리가 북한에서도 울리는 날이 하루 빨리 왔으면
좋겠다.
더욱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이었다. 일본측 참가자인 ‘시바’의 생일이었던 것이다. 조촐하게나마
생일파티를 준비했다. 피곤하고 지친 일과의 연속이지만, 오늘을 계기로 다시 한번 젊음의 패기와
열정으로 끝없는 한계에 도전하기 위해 정신을 재무장했다.
오늘은 ‘하마마쓰’에서 바다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곳으로 숙소를 정했다. 깜깜한 밤에 밝은
빛으로 수놓은 듯한 ‘하마마쓰’의 야경을 감상하며 두 눈을 살며시 감았다.
▶▶▶▶ 2월 7일 : 하마마쓰 ∼ 유이
2월 7일 행진 넷째날, 멀리서나마 후지산의 만년설이 자태를 드러냈다. 후지산의 장대한
설경이 정말 아름다웠다. 배고픔과 오르막길 그리고 맞바람까지 엎친 데 겹친 격이요 설상가상이라
하늘이 노랗게 보일 지경이었다. 우리 일행은 보조차량이 도착하기도 전에 가까운 가게에 들러
과자로 급하게 나마 요기를 때웠다.
안타깝게도 일행 중 한 명이 횡단보도를 지나면서 신호대기중인 아주머니와 어린아이를 피하려다가
작은 사고가 났다. 일행이 넘어지자 앞서가던 사람도 뒤에서 따르던 사람들 모두 멈춰 섰다.
잠깐이지만 모든 것들이 일시 정시한 듯이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자리에 있던 일행들은
심장이 콩알만큼 작아졌다. 내가 이제껏 살아오면서 오늘처럼 심장이 작아지기는 처음이 아닐까
한다. 오늘처럼 심장이 콩알만큼 작아지게 하는 일은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면 한다. 다행이랄까
큰 상처가 아니라 한 숨을 돌렸다. 오늘은 ‘하마마쓰’에서 ‘유이’까지 110여㎞를 달렸다.
▶▶▶▶▶ 2월 8일 : 유이 ∼ 히라츠카
행진 다섯째 날인 2월 8일, 오늘 우리가 가는 길에서 3776미터의 후지산을 곁에서 보았다.
후지산은 일본의 상징이며, 사철 다른 모습으로 여행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곳으로 유명 관광명소이다.
우리는 후지산을 끼고 있는 도로를 따라 주변의 산을 넘었다. 아무튼, 오르막길을 오를 때면
‘오르막 길이 있으면 내리막 길이 있다’는 내면(內面) 독백으로, 인생의 보편적인 진리를
위안 삼아 산 정상에서의 내리막길을 기대해 보았다. 오늘은 주행 내내 후지산의 풍경을 감상하며
달렸다.
점심을 간단하게 도시락으로 해결하고 오후시간에 산을 오를 때는 세 팀으로 나눠 자전거를
탔다. 나는 치헌 형과 이자와, 유미 이렇게 한 팀을 이루게 됐다. 산을 오르는 길은 정말
만만치 않았다. 거기에다가 날씨까지 덥고 하니, 이번 ‘유이’에서 ‘히라츠카’까지는 고난
행진 중 ‘최대의 고난의 행군’이라 명하였다.
▶▶▶▶▶▶ 2월 9 / 10일 : 히라츠카 ∼ 도쿄
행진 여섯째 날인 2월 9일, 도쿄탑이 육안으로 들어왔다. 드디어 도쿄에서 열린 북한 인권국제
회의장에 도착했다. 도쿄 중심부는 도쿄 역을 중심으로 마루노우치 빌딩가, 가스미가세카 관청가,
일본의 상징인 고쿄(일본의 천황과 그 가족들이 살고 있는 궁성)가 모여 있는 곳으로, 전통
상점과 최첨단의 패션가, 고급 레스토랑과 서민적인 뒷골목이 공존하는 곳이다. 도쿄 중심부의
관광 명소는 대부분 걸어서도 가능하다.
이번 기회로 평소 북한 인권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이라면 북한 인권에 대한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며, 행동으로 보여주는 활동을 지속적으로 계획하고 실행했으면 한다. 또 평소
관심이 없었던 사람이라면 이번을 계기로 조금이나마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하고 북한 인권과 관련된
작은 소식이 있으면 귀기울여 주었으면 한다.
자전거 행진이 끝나자 마침 미국 솔트레이크시에서 동계올림픽이 개막했다. 개막식 첫 날 ‘빛의
소년’이 탄생하며 세계 평화를 기원했다. 나는 생각했다. ‘빛의 소년’이 북한사람들을 가리고
있는 검은 먹구름을 뚫고 한 줄기 강한 ‘인권의 빛’이 되어, 북한사람들이 꿈과 희망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그들 곁에서 영원히 ‘희망의 빛’으로 발하길 말이다.
"600㎞를 자전거로 달렸다." 자전거로 600㎞를 달렸다하면, 그것도
우리나라가 아닌 일본 오사카에서 도쿄까지 달렸다고 하면 어떤 이는 정신이 이상하다는 말투로
다시 되물어 볼지도 모른다. 정말이냐고. "정말이다." 우리는 5박6일간
자전거로 오사카에서 도쿄까지 달렸다. 우리는 해냈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말이다.
문득 ‘민족의 스승’이라 일컫는 백범 김구 선생이 백범일지 중 ‘나의 소원’에서 “문화대국이
되길 바라며 통일된 조국을 소망했다”고 한 글귀가 뇌리를 스친다. 마찬가지로 지금 나의 소원을
누군가가 물어본다면, 두 동강난 우리나라가 하나 되는 것이며,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인권 국가’가 되는 것이다. 첫째도 ‘인권 국가’요 둘째도 ‘인권 국가’요 셋째도 ‘인권
국가’이다. 여기에는 북한도 예외가 아니다.
끝으로 구름 낀 하늘, 비가 내리는 날이라도 태양은 일시적으로 보이지 않을 뿐이지 항상
우리 지구를 향해 빛을 발하고 있다는 불변의 진리를 다시 한번 기억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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