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대통령님,

저는 지난 해 6월 30일 북경의 UNHCR을 통해 한국으로 온 장길수의 외할머니인 김춘옥입니다. 우리 장길수 일가 10명은 그동안 대한민국을 대표한 김대중 대통령의 따뜻한 배려와 전 국민들의 관심 속에 그토록 그리던 자유대한에서 하루하루 행복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한 시간이 흐를수록 중국에서 북한으로 강제 송환된 딸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오랫동안 참아오다가 이 슬프고 답답함을 대통령께 호소해야 되겠다고 결심을 했습니다.

이 세상 그 누가 딸을 잃은 어머니 마음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 이 늙은 어머니는 다행히도 자유대한에 오긴 했지만, 지금 북한의 정치범 수용소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정순애, 우리 딸을 생각하면 아무리 이곳에서 좋은 집에서 잠을 자고, 좋은 옷을 입은들 마음이 편치를 않습니다. 좋은 음식을 먹어도 살로 가질 않습니다.

김대중 대통령님, 부디 우리 가족이 함께 살 수 있도록 노력해주시기를 빕니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님,

이번에 한국에 오셔서 나의 고향인 북한주민에 대한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갖고 계신 것을 확인하고, 저는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얻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우리 가족이 대한민국으로 올 수 있었던 것도, 사실 미국의 도움이 없었다면 성사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지난 6월 베이징의 유엔사무소에 들어가자 즉각적으로 보여준 미국의 관심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이제는 북한에 있는 우리 딸의 안부만이라도 알 수 있도록 힘써주시기를 빕니다. 죽지 않고 살아만 있어도 언젠가는 만날 수 있겠지요. 그런 날이 속히 올 수 있도록 당신의 도움을 요청합니다.

강택민 주석님,

우리들은 지난 3년여 동안 중국에 살면서 잠시나마 굶주린 배를 채울 수 있었음을 다행으로 여겼습니다. 그 어디를 가나 아귀가 득실거리는 북한에 비하면, 먹을 것이 가득한 중국은 천국이나 다름없었지요. 이 세상에서 배고픈 슬픔보다 더 큰 슬픔이 또 있을까요? 배고픔을 잊게 해준 중국에서 평생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16명의 가족 중 5명은 지난해 3월 중국공안 당국에게 붙잡혀 북한으로 강제송환 되고 말았습니다. 나와 내 딸 정순애는 국경 도시인 함경북도 회령을 거쳐 온성수용소에서 취조를 받았습니다. 거기서, 나는 나이든 늙은이라고 간신히 석방되어 중국으로 탈출해왔습니다. 그러나 내 딸은 그 후 온성군 보위부 감옥으로 끌려간 후 소식이 없습니다. 특히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으니 북한정부로부터 무슨 박해를 받을지 모르겠습니다.

강택민 주석님,

우리 가족이 다시 만나 한 곳에 모여 살 수는 없습니까? 당신께서 조금만 힘써주신다면 고맙겠습니다. 비록 불안한 가운데 있었지만, 그래도 우리 딸과 같이 지냈던 지난날 중국에서의 생활을 잊을 수 없습니다. 중국이 아니었다면 우리 가족은 모두 남들처럼 굶어죽는 신세를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정말 감사한 일은, 중국의 크나큰 배려로 우리가 이곳 한국까지 올 수 있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귀중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을 생각하면 중국은 나에게 한없이 감사한 은혜의 나라입니다. 그렇지만 한편 딸을 붙잡아서 북한에 넘긴 것을 생각하면 용서 못할 원수의 나라이기도 합니다.

강택민 주석님,

부디 저에게 당신의 나라가 좋은 나라로만 기억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기를 두 손 모아 빕니다.

김정일 장군님,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이 늙은이는 이렇게 살아서 감히 장군님께 편지라도 쓸 수 있건만, 우리 딸 정순애는 지금 어디서 무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6월까지 화대군 보위부 감옥에서 보았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지금쯤 살아있는지 죽었는지 소식을 몰라 가슴이 찢어질듯 합니다. 내가 북한에 살았을 때는 자유가 무엇인지, 인권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중국을 거쳐 한국에 와서야 비로소 자유의 소중함을 알았습니다. 사람의 생명이 얼마나 귀한 지도 알았습니다. 사랑이 무엇인지도 알았습니다. 그것이 소중한 까닭은 북한에서 경험했던 험한 세상 덕분임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마음껏 자유를 누리고, 배불리 먹고, 자유롭게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면 그런 소중한 경험을 맛볼 수 없었을 것입니다.

김정일 장군님,

당신의 강한 훈련 덕분에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았습니다. 당신의 그런 통치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그토록 뼈저린 자유의 소중함을 영원히 맛보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목숨을 바쳐서라도 찾아야할 자유라는 것을 체험케 한 당신에게 어떻게 감사함을 돌려야할지... 아마 장군님께선 하느님으로부터 21세기 북한 인민들에게 가장 특별한 훈련을 시키도록 명령을 받은 것이 아닙니까?

김정일 장군님, 바라건대 지난해 3월에 중국에서 송환된 우리 딸 정순애를 살려주십시오. 이 늙은이의 마지막 소원입니다. 내가 죽기 전에 딸의 음성이라도 듣기만 하면, 지금 눈에 흙이 들어가도 좋습니다. 그래야 장군님의 은혜를 죽어서도 잊지 않을게 아닙니까? 장군님, 제가 조선에서 그토록 경모했던 그 모습대로만 영원히 기억될 수 있도록 대영단을 내려주실 수 없습니까?

장군님,

지금 이때야말로 한국으로 오실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부디 오셔서 월드컵대회도 지켜봐 주시고, 그리고 멀리 고향 땅에 딸을 두고 온 이 늙은이의 타는 가슴을 보아주십시오.

2002년 2월 22일 서울에서 장길수 가족 김춘옥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