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겨울과 올 봄을 이어 지루한 가뭄이 계속 되더니 지금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당신이 있는 그곳에도 빗님이 오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창문을 경쾌하게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나는 지금 당신에게 편지를 띄웁니다.

나는 당신의 이름을 모릅니다. 당신의 얼굴도 본 적 없습니다. 어디서 태어났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요즘은 어디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어딘가에서 나의 타전을 듣고 있을 당신이 지금은 왜 그곳에 있는지 나는 모릅니다. 물론 당신도 나에 대해서 모릅니다. 하지만 나는 당신을, 당신은 나를 “동지”라고 부릅니다.

내가 당신에 대해 확실히 알고 있는 진실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것 하나, 우리는 동지라는 것입니다. 뜻을 같이 하는 사람을 동지라고 합니다. 당신과 나, 동지인 우리가 알고 있는 또 다른 진실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목표가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입니다. 진실을 영원히 어둠 속에 가둬놓을 수 없다는, 독재와 불의는 반드시 패배하고 정의와 양심은 반드시 승리한다는 신념으로 살아가는 우리 - 당신과 나는 김정일 정권을 타도하고 북한을 민주화하자는 데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입니다.

혹시나 이 편지가 도착할 즈음 동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아니, 편지를 쓰는 이 순간에도 동지는 이미 하늘나라의 사람이 되어 나를 내려다보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동지는 맨발로 칼날 위를 걸어가듯 긴장되고 엄혹한 길을 걷고 있고, 이렇게 느긋하게 책상 앞에 앉아 깨끗한 편지지에 펜을 굴리고 있는 나는 그것이 늘 부끄럽습니다. 동지를 만날 수 없어 눈을 지긋이 감고 나는 동지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합니다. 굵고 거친 동지의 큼지막한 손을 맞잡은 내 하얀 손과 뽀얀 피부가 또다시 부끄러워집니다. 체포와 감시에 숨을 죽이고 어둔 밤길 달려 도시와 도시를 옮겨 다니며 결전의 날을 준비하고 있을 동지를 생각하면 내 따스한 잠자리와 푸짐한 밥상이 부끄럽습니다.

동지에게 나는 모든 것이 부끄럽습니다. 조금만 뛰어다니면 피로를 호소하는 내 발목이 부끄럽고, 하루 세끼 꼬박꼬박 기름진 밥알을 넘겨야 하는 이 목구멍이 부끄럽고, 조금만 추우면 전기난로를 켜대는 이 손가락이 부끄럽고, 흥청망청 기쁨에 겨워 순간의 쾌락을 좇는 내 몸뚱아리, 살아가는 모든 것이 부끄럽습니다.

2.

지난번에 동지가 보내온 국경 소식이 내내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지금 중국에서는 숱한 형제들이 하루에도 수십 수 백 명씩 북으로 압송되고 있다지요. 아비규환의 현장을 전하는 동지의 편지 글 한 자 한 자에 끌려가지 않겠다고 몸부림치는 여인의 비명소리가, 자지러지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차라리 죽겠다며 수갑을 찬 채 강물로 뛰어드는 사내의 피눈물 섞인 함성이 들려오는 듯 했습니다. 며칠 전 신문에는 체포된 탈북자 100여명의 코를 꿰어 끌고 갔다는 증언도 보도되었습니다. 그 소식을 듣는 순간 나는 온 몸의 피가 거꾸로 솟고 울컥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으스러질 듯 불끈 쥔 주먹은 부르르 떨려 왔습니다.

2천만 인민을 도탄에 빠뜨리고 수백만을 굶겨 죽인 장본인, 그가 작년에 러시아에 가서는 ‘우리나라는 인구가 많아 어느 정도 죽어도 괜찮다’고 태연하게 이야기했다죠? 더 이상 우리가 언제까지 참아주어야 하며, 그 가식적인 웃음을 얼마나 더 지켜보아야 하는지, 얼마나 잔인한 이야기를 우리가 더 들어주어야 하는지 … 때로는 자괴감마저 들 때도 있습니다. 때론 이젠 웬만큼 비참한 이야기엔 태연해진 나 자신을 보며 흠칫 놀라기도 합니다.

마치 반인륜적 범죄의 전시장이라도 만들려는 듯 참혹한 이야기들이 지난 몇 년간 우리 귀에 들려왔습니다. 한때는 애써 믿지 않으려 노력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사실임을 알았을 때, 나는 본능적으로 뛰어들어야할 우리의 투쟁이 어떠한 투쟁이어야 하는 지를 명확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야수와 인간의 투쟁’입니다. 나는 이 싸움이 인간과 인간의 싸움이라 생각지 않습니다. 만약 이것이 인간과 인간의 싸움이라면 나는 굳이 그를 타도하고 처단하려고 하지 않겠습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은 사랑과 믿음으로 대하면 그만큼 보답하고 언젠가는 변화할 수 있다는 내 신념과 확신에 어긋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를 인간으로 보지 않고 인간이기를 포기한 자 - 야수로 보기 때문에, 이 투쟁에 정당성을 부여하며 승리를 확신합니다. 우리가 걷는 이 길, 오늘의 투쟁은 야수의 손아귀에 들어간 인간의 존엄성을 되살리는 투쟁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세계만물의 영장이기 때문에 이 투쟁은 반드시 인간의 승리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고 굳게 믿는 것입니다. 이 싸움은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입니다.

3.

동지. 지난 편지에서 동지는 또한 내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대가 존재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내겐 세상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라고. 그 말이 내겐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동지, 남에서 북에서 그리고 3국에서 우리는 서로 만날 수 없고 볼 수 없지만, 얼굴 모를 동지들의 존재가 우리에겐 기쁨이고 희망입니다. 세상에는 성한 몸뚱아리 갖고 살면서도 손가락질 받는 사람이 적지 않지만, 내가 존재한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상대에게 기대와 확신을 줄 수 있다면 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남한에서 북한민주화를 위해 밤낮으로 뛰어다니는 나 같은 사람의 존재, 바람결 타고 들려오는 김정일 타도의 함성이 북에 있는 우리에게 천만대군을 얻은 듯한 힘이 되었다고 그대는 말했습니다. 지금 비록 마음속 깊은 곳에 신념의 비수를 숨겨두고 있지만 결전의 깃발을 높이 들 그날, 평양에서 개성에서 해주에서, 신의주에서, 함흥, 청진, 온성, 무산, 만포, 원산, 북녘 땅 곳곳에서 대열의 선봉에 설 동지의 존재가 내겐 온 우주와 다름없습니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싸우고자 모든 것을 버리고 주저 없이 3국에서의 활동을 지원한 또 다른 그대 역시 그 어떤 꽃보다 아름답고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함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동지, 북에서, 남에서, 3국에서, 세계 곳곳에서 싸웁시다. 나도 더 이상 내가 먹는 한술의 밥, 하얀 피부, 따스한 잠자리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겠습니다. 오늘을 사는 나의 하루를 2천만 북녘 동포에게 자유와 해방의 새날을 안겨다 줄 너무도 소중한 하루로 여기겠습니다. 배부르고 따뜻한 만큼 동지의 몫까지 더 열심히 싸우겠습니다. 촌음을 아껴 싸우겠습니다. 내 모든 힘과 정열, 젊음과 의지를 고스란히 2천만 동포를 위해 바치겠습니다. 사람이 태어나 한 세상, 내가 하나님 곁으로 다가갈 때, 나는 내 청춘시절을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운명에 처해있는 인민을 위해 다 바쳤었노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다면 이 얼마나 가슴 벅찬 일입니까. 내게 이러한 기쁨의 순간을 갖게 해줄 동지에게 나는 또 한번 감사합니다.

그리고 동지, 가슴아픈 약속이지만 살아서 만납시다. 언젠가는 만나게 되리라 확신합니다. 내 조국, 사랑하는 인민들 … 야수의 손에 더 피가 묻기 전에 만납시다. 어둠의 밤은 길지만 새벽은 반드시 오고야 맙니다. 동녘 하늘을 환하게 밝히며 태양이 떠오르기 직전 잠깐 싸늘하게 추위가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내 햇살은 온 대지를 따스하게 감쌉니다. 오늘, 우리 잠깐 어렵고 힘들지만, 때로는 자괴감에 그냥 모든 것을 포기하고플 때도 있지만 서로의 체온으로 서로를 녹여주며 한 발 한 발 힘차게 나아갑시다. 혁명승리는 확정적이고 그날은 멀지 않았습니다. 2천만 인민의 해방을 위한 혁명투쟁 만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