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정책을 나쁘다고 할 사람은 없습니다. 다만 누구에게 가는 햇볕이냐가 중요한 거죠. 지금처럼 김정일에게 가는 햇볕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햇볕정책이라고 하면 주는 쪽이 자긍심을 느껴야 하는데 왜 우리는 자꾸 굴욕감을 느끼게 되는 거죠? 그것은 북한주민에게 다가가는 햇볕정책이 아니라 김정일의 취향에 맞춰 굽신거리는 햇볕정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정부는 이미 잘못됐음이 만천하에 입증된 이런 햇볕정책에 왜 그리 미련을 갖는 것입니까"

이미일(李美一·53) 이사장.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는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햇볕정책을 일갈(一喝)했다. 사단법인 「육이오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의 초대 이사장을 맡아 지금까지 각종 활동을 진두에서 이끌어 오고 있는 이 이사장을 처음 만나 본 사람은 크게 세 가지에 놀란다. 우선 어릴 적 사고로 인한 성장장애로 크지 않은 그의 작은 체구에 놀라고, 그러면서도 어디서 그런 힘이 쏟아져 나오는지 쉼 없는 그의 열정에 탄복하고, 다음으로 육이오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 이사장이라는 묵직한 직함과는 달리 소탈하고 부드러운 그의 성격과 차분한 말투에 손을 맞잡게 된다.

이론에 우선하는 것은 현실이고 경험이라고 했던가. 삶 속에 깨달은 교훈으로, 그의 설명과 답변은 그 어떤 전문가보다 논리정연했다. 오는 6월 20일 열리는 「6·25전쟁 납북인사 후원의 밤」행사 준비로 여념이 없는 이 이사장을 협의회 사무실에서 만나보았다. 컴퓨터 석 대와 회의 탁자 하나, 그리고 각종 서적과 자료가 빼곡이 들어찬 작은 사무실은 납북자 데이터 베이스를 구축하는 작업과 명단 확인을 위해 찾아오는 손님, 그리고 각종 취재와 보도를 위해 찾아온 기자들을 맞느라 분주했다.

월북자들은 당당히 내려와 가족을 만나는데

- 먼저 육이오납북인사가족협의회의 창립배경과 과정에 대해 소개해주십시오.
"우리가 협의회를 구성하게 된 것은 지난 2000년 2월에 창립한 정전(停戰) 후 납북자 가족 모임의 영향이 컸습니다. 당시 비전향장기수 송환과 더불어 납북자도 송환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일었는데, 당시 우리는 이것을 지켜보며 이제야 납북자 문제가 공론화되는구나, 우리의 한이 풀리는가보다 하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각종 언론보도를 자세히 읽어보니 그 '납북자' 안에 6·25 납북자는 단 한 줄도 실리지 않고 아예 납북자의 범주에서 제외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어요. 결정적인 것은 2000년 10월로 기억하는데, 방송의 날 기념 기자회견에서 김대중대통령이 '납북자는 400여명이 있다'고 말씀하시는거예요. '납북자 400여명, 포로 4000여명 등 총 800여명의 억류자가 있다'구요. 나중에 우리 회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모두가 그런 통계에 한심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하더군요. 하지만 저도 그랬고 그 동안 너무 당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선뜻 나서지 못하고 누군가 해주기만을 기다려왔습니다. 하지만 대통령까지 그렇게 잘못 말씀하시는걸 보면서 이대로는 안되겠다, 6·25 납북자와 관련된 단체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죠. 그래서 우선 네 가정이 모였고, 2000년 11월 30일 창립을 하게 되었습니다."

- 외람된 질문이지만 6·25 납북자 가족의 경우엔 정전 후 납북자와는 다르게 살아서 돌아오는 '송환'을 기대하기는 힘들 것 같은데요.
"네 맞습니다. 사실 그때 끌려가시는 분들이 대개 40대 초반에서 5, 60대 나이였고, 지금 최소 70에서 100세에 이르는 나이에 다다랐습니다. 대부분 작고하셨을 거예요, 살아 계시기를 기대하기는 어렵죠. 다만 우리는 실질적으로 바라는 것이 있다면 유해송환 등이고 무엇보다 첫째로 두는 것은 진실을 규명하고 사실을 알리는 것입니다. 잘못된 것은 짚고 넘어가야지 일단은 묻어두자는 것은 말도 안됩니다. 잘 될 수 있는 것에만 집중하자면서 우리를 통일의 걸림돌, 거추장스러운 존재 정도로 제쳐두는 것을 용납할 수 없습니다. 납북자 문제에 대한 관심은 고사하고 말도 못하게 하고…, 그것이 우리는 너무 분한 거예요. 특히 일반인들이 납북자 가족을 480여명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럴 수 있다지만, 정부에서 이렇게 못박고 모른 척 하고 있는다는 건 이미 국가의 책임을 잊은 것으로 봐야죠."

- 그동안 6·25 납북자 가족들의 고통이 컸겠습니다.
"6·25 납북자 뿐만 아니라 모든 납북자 가족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지난 50년 동안 대한민국 정부는 우리를 위해 해준 것은 아무 것도 없이 연좌제를 비롯한 온갖 불이익 - 올가미를 뒤집어 씌웠어요. 우리는 그동안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살아온거죠. 해외를 나가지도 못했고, 공직에 진출할 수도 없었고, 신원조회가 젊은이들의 앞길을 가로막았습니다. 전쟁이후 북한이 납북자들을 교육시켜 간첩으로 내려보낸 사례가 몇 건 있었는데 이 때문에 우리를 월북자(越北者) 가족과 동일시하기도 했고…. 그런데 이 정부 들어 월북자들은 당당하게 내려와서 가족들을 만나는데 우리는 생사확인조차 못하고 있으니 이 얼마나 분하고 억울한 일입니까. 우리 회원 가족들 가슴 속에는 이런 마음이 꽉 차 있어요. 이제는 우리 목소리를 낼 때가 됐다는 생각에 그동안 불이익이 두려워, 혹은 다른 일이 바빠 결집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모여든 거에요. 6·25 납북자 전국 명부를 발견한 후에는 더욱 많은 가족이 가입하여 이제는 300여 가족이 되었어요. 아직도 관심은 있으나 선뜻 나서지 못하는 사람들은 더욱 많을 것이라 생각해요."

지난 3월 육이오납북인사가족협의회가 공개한 '6·25사변 피랍자명단'에는 1952년 당시 공보처 통계국이 작성한 전국 피랍자 8만2959명의 명단과 피랍장소, 신원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미일 이사장은 그러나 "실제 납치자의 수는 이보다 더 많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자신의 부모님이나 친척이 전쟁 전후 북한에 납치되었음이 확실한데, 명부 발견 후 찾아와 살펴보니 등재되어 있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당시 전국적인 조사가 이루어지긴 했으나 문맹자들이 많아 조사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전쟁 중에 일가족이 죽은 경우도 많다 실제 피랍자는 10만 여명에 이를 것이라는 것이 이 이사장의 추측이다. 이들은 대개 지주, 자본가, 공무원이라는 이유로, 또는 대한민국 정부를 도왔다는 이유로 끌려갔다. 실제 대지주나 큰 공장의 자본가, 정부 고위 관료들은 몸을 숨긴 가운데, '나는 벌받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없다'고 고지식하게 자리를 지켰던 양심적인 사람들이 이들 대부분을 차지한다.

납치는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비인간적인 범죄

- 납북자 가족들의 이야기를 모두 듣고 싶지만, 우선 이사장님 가족의 사례를 통해 당시 납북상황을 말씀해 주십시오.
"우리 아버지는 서울에서 유기(鍮器)공장을 하는 사업가이셨어요. 6·25전에 서북청년단에 가입을 하셨나봐요. 당시에는 정국이 불안하던 때라 나라의 웬만한 청년들은 청년단에 가입해 있었죠. 아버지도 사업가이시다보니 당연히 가입을 하셨고 금일봉(金一封)도 어느 정도 전달했나봐요. 또 직원들도 상당수 서북청년단원이었다고 해요. 그런데 인민군이 내려오고 나서 정치보위부 사람들이 집에 찾아와서는 평안북도 박천 출신이 왜 남쪽으로 왔느냐, 청년단엔 왜 가입했느냐, 무엇을 어떻게 도와주었느냐를 캐묻더군요. 그리고는 조사를 해야겠다, 금방 보내주겠다고 하고는 내무서(內務署 ; 지금의 경찰서에 해당)로 끌고 갔습니다. 당시 아버지는 반바지에 고무신 차림이었는데, 다음날이 되어도 오시지 않는 거에요. 어머니가 내무서를 찾아가니 다시 전철을 타고 어디론가 갔다는 겁니다. 더 조사할 것이 있어서 정치보위부에 갔다는데 그곳에 가니 바리케이트를 치고 접근도 못하게 하고... 그것이 영영 생이별이 되었습니다. 당시 정치보위부에 끌려갔던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묻는 걸 자꾸 또 물으며 죄를 만들어낸 다음에 형무소를 데려간다고 하더군요."

- 그후 가족의 삶은 어땠습니까?
"피난을 갔다가 9·28 수복이 되자 우리 가족은 되돌아 왔는데, 인민군이 퇴각하면서 사람들을 다 죽이고 갔다는 거예요. 어머니는 넋 나간 사람처럼 형무소, 내무서, 정치보위부 등 시체가 있는 곳마다 좇아가 아버지를 찾았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버지의 흔적은 그곳에서 찾을 수 없었어요. 다행히 우리 어머니는 의학공부를 하셨는데 그후 전문의 과정을 거쳐 병원을 개업하셨죠. 그래서 저희는 다른 가족들과는 다르게 경제적인 고통은 비교적 덜 받고 지내왔어요. 하지만 정신적인 고통은 만만치 않았죠. 어머니는 몇 번이나 자살을 생각하셨습니다. 특히 6·25때 저를 업고 있는 아주머니가 실수로 저를 떨어뜨려 척추가 손상을 입게 되었을 때 어머니는 하루에도 몇 번이나 가무러치는 저를 눈물로 지켜보셨고 밤새도록 치료하셨습니다.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참 부부애가 깊으셨어요. 아버지가 끌려가신 후 어머니는 아버지를 뵙는 날까지 머리를 자르지 않겠다면서 지금도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계십니다. 머리카락이 너무 길어지면 잘라낸 타래가 지금도 집에 몇 개나 있습니다. 나중에 아버지 오시면 내가 당신을 이렇게 기다렸노라고 보여 주신다면서..."

부군이 오실 때까지 머리를 자르지 않겠다고 수절하신 어머니의 이야기가 가슴을 울컥 메이게 한다. 포승줄에 묶여 북쪽으로 끌려갔을 아버지는 처자를 생각하는 마음에 또 얼마나 많은 눈물의 밤을 새웠을지.... 그래서 6·25 납북자들을 생각하는 자원봉사자들의 모임이 인터넷 포털사이트 다음에 마련한 카페의 이름은 '직녀의 손수건'(cafe.daum.net/hankorea)이다. 굳게 닫힌 분단 철문은 이 시대 직녀의 손수건을 더 이상 얼마나 적시어야 활짝 열릴 수 있을까.

"특히 우리나라에는 몹쓸 인습이 많았잖아요. 여자가 혼자 남으면 남편을 잡아먹었다느니 몸쓸 것이 우리 집안에 들어와서 이렇게 되었다느니 하는.... 남편을 빼앗긴 것도 서러운데 정부의 불이익을 받고 집안에서도 손가락질을 당하니 2중 3중의 고통이 많았습니다. 우리 집안은 그렇지 않았지만 요즘 찾아오는 회원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너무도 가슴 아픈 이야기들이 많아요. 홧병으로 죽은 사람도 있고, 다리에 몸을 내던진 사람도 있고, 애들은 흩어지고, 아마 그렇게 사라져간 가정도 꽤나 될 거에요."그러면서 이 이사장은 "납치는 세상에서 가장 더럽고 비인간적인 범죄"라고 그동안 나직이 이어가던 목소리를 한 톤 높였다. 피납자에게도 고통이지만 그 가족에게도 온갖 고통을 대를 이어 전해주는 것이 납치라고, 납치범에게는 가장 큰 벌을 주어야 한다고 이 이사장은 주장했다. 2천만 북한 주민들을 인질로 잡고 대량살상무기로 위협하며 국제사회를 상대로 흥정을 일삼는 김정일은 역사상 가장 악랄한 납치범이 아닐까.

반세기동안 잠들어있던 피해자 명부를 흔들어 깨우다

- 납치되어 북한으로 끌려가신 분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북한은 납북된 분들은 조평통(조국평화통일위원회) 같은 기구에 강제로 가입케 한 후 대남방송 등에 동원시켰어요. 납치된 분들의 대부분이 지식인들인지라 머리는 똑똑하셨죠. 북한 당국은 이것을 십분 활용해서 이분들을 협박하고 교육해서 써먹을 만큼 써먹었죠. 그러다 활용가치가 없어지면 지방으로 추방해 외롭게 죽어가도록 하던지 수용소로 보냈습니다. 김일성·김정일이 얼마나 교활한지..., 그런데 그렇게 헌신짝처럼 버리고는 돌아가시면 혁명열사릉에 묻고 영웅칭호를 주었습니다. '공화국을 위해 헌신하다 가신 분들'이라고 떠벌렸죠. 남쪽 가족들에게 더 큰 고통을 안겨 준 것입니다. 예를 들어 제헌의회 의원 중 70여명이 북으로 끌려갔는데 북한정권에 협조했다는 이유로 서훈(敍勳)을 철회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남한 정부는 북한의 이러한 속셈을 알고도 잡혀간 사람을 찾아올 생각은 않고 납북자 가족들을 더욱 서럽게 만들고.... 이러니 북한이 남한 정부를 점점 우습게 보았던 것 아닙니까."

- 6·25 납북자 명부는 어떠한 경로로 입수하게 된 것입니까?
"지난해 말에 고서(古書)에 관심이 많은 우리 회원들 중 한 분이 어느 장서가(藏書家)로부터 자신이 서울특별시 피납치자 명부를 갖고 있다는 말을 얼핏 듣게 되었어요. 그래서 우리가 그 책을 구입하겠다고 했더니 절대 안판다는 거예요. 그렇다면 구경만이라도 하자고 해서 우리 단체 회원 부모님 몇 분의 성함을 건냈더니 모두 명부에 있다고 하더군요. 가짜가 아니라는 생각에 장서가를 설득해 결국 손에 넣으니 발행처는 공보처 통계국이고 피살·납치·행불(行不)자로 분류되어 소상히 기록되어있었습니다."

- 그래서 그것을 곧장 공개하게 된 것입니까?
"아니에요. 그건 빙산의 일각에 불과했어요. 우리는 입수한 자료의 신빙성을 완전히 확신하고 있지 못하던 차에 이것을 언론에 어떤 방식으로 공개할까 고민하다 한 월간지 기자에게 이것을 넘겼어요. 그 기자가 납북자 가족 수 십 명을 취재하고는 혹시나 하는 생각에 통계청에 '6·25'라는 단어와 '명부'라는 단어가 들어있는 자료가 있는지 살펴 봐 달라 했다고 그래요. 그 다음달 담당직원에게 전화가 왔는데 그런 자료가 하나 있긴 한데 이름이 6·25 사변 피납치자가 아니라 '피입치자' 명부라는 거예요. 납치(拉致)를 음독을 잘못해서 그동안 입치라고 전산입력 되어 있었던 거죠. 그 자료가 국립중앙도서관에 마이크로필름으로 보관되어 있다는 말을 듣고 달려가 확인해보니 분명히 통계국 명의의 자료로 피납자 명부가 작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첫페이지에 전국적인 피납치자 현황이 나와있긴 한데 명단은 서울시만 있더라구요. 아쉽지만 이것이라도 일단 공개를 하자는 생각에 올해 1월 21일에 1차 기자회견을 갖게 된거죠."

바다 위에 떠다니는 빙산(氷山)은 겉으로 볼 때 뾰족히 작게 튀어나와 있지만 수면 밑으로는 큰 얼음덩어리를 숨기고 있다. 육이오납북인사가족협의회에서 전국적인 6·25 사변 피납치자 명부를 발견하기까지는 조그만 얼음조각을 더듬어 가다가 결국 커다란 빙산의 전모(全貌)를 찾게 되는 과정과 같다. 1월 21일 기자회견에서 공개한 명부는 '서울특별시 피해자 명부'로 여기에는 한국전쟁이 시작된 1950년 6월25일부터 9월28일까지 서울 지역에서 피해를 당한 4616명의 명단이 성명, 성별, 연령, 직업, 소속 및 지위, 피해유형, 피해장소, 약력, 주소별로 분류되어 있었다. 피해 유형은 납치가 2438명, 피살 976명, 행방불명 1202명.

이러한 명부발견 소식이 언론을 타고 보도되자 납북자 가족들의 문의가 잇따랐다. 그때 가족 중 한 분이 자신도 단체에 가입하게 해 달라면서 '납북자 가족임을 증명하는 자료'라며 복사된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가만히 보니 그 동안의 자료와는 달랐다. 이게 어디서 난 자료냐고 물으니 중앙도서관에 떼를 쓰니 꺼내준 자료란다. 그러면서 그는 "서고 자료실에서 5권을 내주더라"고 말했다. 마이크로필림도 아니고 원본으로, 그것도 5권이나 있다는 사실을 믿기지 않았지만 그는 "분명히 두꺼운 책 4권에 추가분 1권을 보았으며 내 아버지도 추가분에 등재되어 있었다"고 했다. 곧장 중앙도서관에 찾아가 보니 정말 '6·25사변 피납치자 명부'는 불면 날아갈 듯 낡기는 했으나 전국 명단을 고스란히 담고 그곳에 보관되어 있었다. 여기에는 8만 661명의 납북자 명단이 담겨있었다. 50년 동안 아무도 찾아주는 이 없이 잠들어있던 책이 이제야 세상을 향해 아우성을 시작한 것이다.

- 육이오납북인사가족협의회의 향후 활동 목표는 무엇이니까
"우리는 무엇보다 정부가 6·25 납북자의 존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이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적극 나서줄 것을 바랍니다. 통일부에서 매년 발행하는 <북한인권백서>에 6·25 납북자 문제가 다루어져야 하고, 우리가 발견한 납북자 명부를 데이터 베이스화 하여 현재 살아있는 가족을 찾고 북한에서의 생사여부를 확인하는 것도 정부가 나서야 할 일입니다. 현재 우리는 8만여 명의 납북자 명부를 부족한 재정과 인력을 동원하여 스스로 데이터 베이스화하고 있습니다. 통일부에 '이런 건 정부에서 할 일 아니냐'고 따져 물었지만 오히려 '우리가 그걸 왜 하냐'는 듯한 답변에 어처구니가 없더군요. 대한민국 정부가 조금만 성의가 있었더라도 납북자 문제가 공론화되던 초기에 찾을 수 있었던 자료를 우리가 백방으로 뛰어서야 기적적으로 찾을 수 있었던 것이 한편으로는 서러운데, 아직도 6·25 납북자 가족을 걸끄러운 존재처럼 대하는 관계자들을 보면서 도대체 누구를 위한 정부인가 하는 생각마저 듭니다."

- 구체적인 활동계획을 말씀해 주십시오.
"일단 6월 20일에 후원의 날 행사가 있구요, 9월경에는 모의 국재재판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피고인석에는 북한의 위정자들을 앉혀 일반인들에게 그들의 죄상(罪狀)을 깨우칠 생각입니다. 또한 우리는 9월 2일을 '납북자의 날'로 널리 알려 추념(追念)할 생각입니다. 아시는 분이 많지 않겠지만 그날은 2년 전 비전향장기수가 송환된 날입니다. 형평성의 견지에서도 당연히 돌아와야 할 납북자들이 여전히 북한에 억류되어 있는 현실을 두고두고 상기시킬 것입니다. 또한 지금까지 우리가 확보한 자료 등을 모두 모아 '자료전시회'를 개최할 계획도 있습니다. 납북 당시의 상황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 각종 자료를 통해 많은 이들이 처참한 납북 현장을 상상으로나마 느껴보았으면 합니다. 우리는 납북인사들의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도 적극 촉구할 것입니다. 이밖에도 회원들의 총의(總意)를 모아 할 일이 많습니다."

지금도 내 이름 부르며 대문 열고 들어오실 것 같은 아버지!

이 이사장과의 인터뷰 도중 납북자 홍모 선생님의 따님이 명부 확인을 위해 사무실을 찾았다. 납북자 명부의 경기도 편(編)에서 아버지의 이름을 발견한 홍 씨는 "아버지 이름 석자만 보아도 눈물이 난다"며 울음을 터트렸다.

"아버지가 끌려가시고 난 후 나는 동구밖에 양복 입은 사람만 멀리 보여도 '아버지다!'하면서 뛰어나갔어요. 당시에는 양복차림으로 출근하기는 분들이 얼마 되지 않았거든요. 지금도 자전거를 타고 내 이름을 부르며 찾아오실 것만 같은데...."

홍 씨의 아버지 역시 인민군이 내려오자 "내가 뭘 잘못했다고 몸을 숨기나"하면서 자리를 지키다 변을 당하셨다. 같이 끌려갔다가 극적으로 탈출한 다른 분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홍 씨의 아버지는 이미 뭇매를 맞어 빠져 나올 기력도 없었다 한다. 홍 씨는 아버지가 끌려가신 이후 자신의 가족은 '웃음을 잃어버린 50년'이었다고 말했다.

필자는 한국전쟁을 겪어 보지 못한 세대이다. 털어놓고 고백하건 데, 과거에 어르신들이 6·25를 거론하면서 "안 겪어본 너희들은 몰라"라고 호통치면 '또 저런 고루한 말씀으로 이어지는구나'라고 비웃기도 했었다. 육이오납북인사가족협의회는 지난 5월 한달 동안 '북한, 그 진실과 허위'라는 제목으로 <제1회 청년강좌>를 개최하였다. 매주 2회씩 총 6차례에 걸쳐 진행된 강좌에는 젊은 대학생으로부터 환갑을 넘긴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참석자들이 북한문제를 놓고 진지한 토론의 자리를 마련하였다. 수구 보수니 좌경 빨갱이니 하면서 서로 삿대질하고 욕하기에 바쁜 요즘, 할아버지뻘 되는 노인과 손자 나이의 젊은이 - '겪어본 세대'와 '안 겪어 본 세대'가 서로의 생각을 경청하며 의견을 나누는 보기 드문 자리였다.

이 이사장은 "납북되신 분들의 고난을 생각하면 피눈물이 난다"고 이야기했다. 그들이 굴비처럼 포승줄에 엮어 끌고 가면서 조금 걸음이 늦으면 거치적거린다고 사살하고, 낮에는 재우고 밤에만 이동하면서 돌부리에 채이고 산비탈에 굴러 떨어져도 욕하며 짐짝처럼 끌고 가던 납북길의 상황을 이 이사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전해주었다. 그러면서 그는 "기성세대로서 젊은이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고 말했다. "젊은 세대들에게 공산주의가 어떻다는 것을 제대로 가르쳤어야 하는데 윽박지르듯 가르쳤으니 그 역효과가 지금 나타나고 있는 것 같다"며 "이제부터라도 피부에 닿게 가르치고 북한인권문제에도 관심을 갖게 만들어야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북한민주화운동의 열렬한 지원자가 되고 싶다"는 이 이사장의 배웅을 받으며 사무실을 나설 때, 그의 작은 키가 오늘따라 왜 그리 커 보였는지 모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