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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난 5월 14일 오후 인천공항에는 취재진이
몰려들었습니다. 입국 통로를 통해 세 사람이 들어서자 여기 저기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습니다. 이들은 바로 그 달 8일과
9일 중국 랴오닝성 선양주재 미국총영사관에 진입하여 한국으로의 망명을 요청했던 탈북자들이었습니다. 다음날 신문에는 이들의
사진이 크게 실렸습니다.사람들은 의아해 했습니다. 여느 한국인과 다를 바 없는 복장… 양복이나 구두 같은 것은 한국으로
출발하기 전에 대사관측에서 지급한 물건일 수 있으니 그렇다 칩시다. 이날 눈길을 끌었던 건 스무살 먹은 한 신세대 탈북자의
행색이었습니다. 그는 붉은 갈색으로 머리를 염색하였고, 검은 선글라스까지 걸친 채 카메라를 향해 손가락으로 V표시를 해보였습니다.
그날 점심시간, 한 신문사 기자와 식사를 했습니다. 탈북자들의 계속되는 대사관 진입 문제가 화제로 올랐고, 아침 신문에
실린 그 한 장의 사진이 또한 입방아에 올랐습니다. 그 기자 분이 그러더군요. “아침에 그 사진 봤어요? 양아치 새끼가
따로 없더구만. 탈북자들이 몰려오니 이젠 별의 별 녀석이 다 오네….”그날 저녁 늦게, 중국에서 탈북자들을 많이 만나
본 한 유학생과 인터넷 채팅을 했습니다. 저는 탈북자들의 대사관 진입 사건 이후에 대대적인 탈북자 색출이 있다는데 과연
실태가 어떠한지 알고 싶었고, 아침 신문에 실린 그 한 장의 사진이 또한 대화 소재가 되었습니다. 그 유학생이 말하더군요.
“아침에 인터넷을 통해 저도 사진을 봤습니다. 그 친구 대단히 위장을 잘했더군요. 요즘에 검문을 피해가려면 그 정도로
꾸미고 다녀야 합니다.”이게 바로 가치관의 차이입니다. 현지(field)에 있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입니다.
2. 한때 각종 언론매체에서는 앞다투어 중국,
러시아 등 제3국에 있는 탈북자들의 실태를 보도한 적이 있습니다. 딱 3-4년 전의 일입니다. 어느 신문사에서는 아예
국경지역에 기자를 장기간 파견하였고, 어느 방송국에서는 목숨을 걸고 국경지대를 누비면서 강을 건너는 탈북자들의 모습을
화면에 담았습니다. 요새 이런 거 보도하는 언론, 별로 없습니다. 그네들 거창한 말로는 ‘뉴스밸류’가 안되기 때문이고,
평백성이 이해하기 쉬운 말로 표현하자면 ‘이젠 별 재미없는’기삿거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여전히 ‘특종이다’ 싶은
것에는 우루루 몰려다닙니다. 최근에는 대사관 진입사건이 좀 뜨니까, 대사관 앞에 기자를 아예 상주시켜 놓는다지요?
얼마 전에는 북한에서 배급제가 폐지되었다느니, 임금이 10배 이상 오르고 국정가격이 올랐다느니 하는 정보가 흘러 들어오니까
앞다투어 이것으로 지면을 채웠습니다. 이런 기사들에 꼭 빠지지 않는 것은 무슨 연구소 선임연구원이니, 무슨 대학 교수님이니
하는 분들의 ‘분석’입니다. 학문적으로 꼼꼼히 따져보고 파헤쳐 보는 거야 좋은 일이지만, 제가 좀 건방진 소리를 해보겠습니다,
그런 연구원이나 교수님들 한 트럭을 실어온대도 제가 볼 땐 가소롭습니다. 책상머리에 앉아 펜대 굴리며 습득한 북한에
대한 지식으로 이러쿵저러쿵 점잖은 분석하셔봤자, 헷갈리기만 합니다. 또 얼마 전에는 무슨 연구소 주최로 ‘탈북자증가현상과
향후처리방안’ 이라는 주제의 세미나가 열렸는데, 탈북자들이 많아지면 남한 재정과 실업문제가 심각해진다, 탈북자 문제에
대해 정부는 할 일이 없으니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된다는, 박사님들의 발표가 있었다지요? 정말 이런 분들, 돌아다니지
말고 그냥 연구실에 가만히 계셔 주시는 것이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이로울 것 같습니다.
3. 갑자기 감정이 복받치는 바람에 좀 격하게
쓰고 말았군요. 본의 아니게 기자나 지식인들을 적대시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겼는데, 너그러이 웃어줄 것이라 생각합니다.
다만 분명히 말씀드릴 것은, 치기 어린 말속에도 뼈가 있습니다. 저는 먼저 그놈의 ‘냄비근성’에 대해 따지고 싶습니다.월드컵이
끝나고 사람들이 냄비근성을 이야기했습니다. 4강 신화가 펼쳐지자 너도나도 축구에 관심을 갖고 열광하며 K리그를 활성화해야되느니
유소년 축구를 육성해야 하느니 한마디씩 거들다가, 막상 월드컵이 끝나고 나니 언제 그랬냐는 듯 축구경기장에 파리만
날리게 되는 경우를 상정하며 사람들은 ‘냄비근성’을 우려했습니다. 이렇게 축구에서 냄비근성 찾는 관심과 애정의 십분의
일만이라도 북한 인권문제나 탈북자 문제에 쏟았더라도 과연 현재 북한인민들이 지금도 저렇게 비참하게 살고 있을까 생각해봅니다.
강의실을 벗어나 대학로에서 학생들과 함께 붉은 옷을 입고 ‘짝짝짝 짝짝’ 손뼉치며 ‘대∼한민국’을 외쳤을 교수님,
책으로 둘러싸인 연구실을 벗어나 넥타이 풀고 나팔 불며 ‘오 필승 코리아’를 외쳤을 연구원님, 우리 그것을 ‘감동’이라고
했습니다. 태극기를 치마처럼 두르고, 예순 노인과 열일곱 고등학생이 자연스럽게 어깨를 걸고, 홍명보의 마지막 슛이
골네트에 꽂히자 옆 사람이 누군지도 모른채 껴안고 팔짝팔짝 뛰었던 그 순간을, 우리는 ‘권위와 격식을 벗어 던진 대한민국’이라고
감격해 했습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광장으로 모여들어 붉은 물결의 한 점이 되길 마다하지 않았던 참여의 정신,
지식인들이 점잖은 가식의 껍데기를 벗고 목청껏 외쳤던 함성의 백 분의 일만 북한 인권문제나 탈북자 문제에 실었더라도
오늘 김정일이 저렇게 기고만장하게 살아있을까 생각해봅니다.
4. 이번 호는 Keys 전체를 특집으로 내보냅니다.
인터넷으로 들어오는 뉴스속보를 통해, 정부기관에서 나오는 자료를 통해, 북한 당국이 발표하는 각종 문헌을 통해, 우리는
그런 것으로 북한을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참고사항’일 뿐입니다. 북한 ‘인민’들의 목소리를 통해,
밤새워 묻고 답하고 때로는 논쟁하고 같이 웃고 울며, 우리는 그것으로 오늘의 북한을 듣습니다. 지금 북한에서는 그저
배불리 밥 한번 먹어 보는 게 꿈인 2천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거창하게 개혁 개방은 아니더라도, 장마당에서 자유롭게
장사하게끔만 해줘도 원이 없겠다는 2천만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꿈★은 이루어진다.’ 그들의 소박한 꿈에 비하면 2002년
6월에 대한민국 국민들이 품었던 꿈★은, 어쩌면 너무도 사치스런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꿈★은 4년 뒤에 다시
오고, 그때 못하면 또다시 4년을 기다리면 되는 것이지만, 지구상에서 가장 끔찍한 삶을 살고 있는 북녘 2천만의 꿈은
너무도 절박합니다. 하루가 급합니다. 사람들이 기뻐 우는 광화문 앞 인해(人海)에 휩싸여 나도 울었습니다. 평소 스스로
‘나는 애국심이 좀 부족하다’고 생각해왔지만 그날만큼은 대한민국이 너무도 자랑스러워 울었고, 이 기쁨과 감동을 모르고
있을 북녘 동포들이 너무도 그립고 애처로워 또 울었습니다. ‘꿈★은 이루어진다’는 카드섹션에 담긴 희망을 이제 우리의
가슴에서 북녘 벗들의 가슴으로 전해줍시다. 멀리 중국 땅에서 발로 뛰며 쓴 이번 호의 생생한 리포트가 북한 인민들의
현실을 아는 조그만 계기가 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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