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소프트랜딩

‘쿵’하는 작은 떨림과 함께 비행기가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하늘 위를 시속 수 백 Km의 속도로 날아왔던 비행기는 지상에 내려앉기 싫다는 듯 조금은 귀에 거슬리는 마찰음을 내며 활주로 위를 미끄러졌다. 날개 위에 부착된 스포일러(Spoiler)가 펼쳐 올려지면서 속도가 조금씩 줄어든다. 이내 비행기는 안정을 되찾고 유유히 공항 안을 맴돌았다.

“승객 여러분 우리 비행기는 방금 연길공항에 도착했습니다. 현재 시각은 11시 15분이며, 현지 날씨는 맑습니다.”

소프트 랜딩-.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고 일순간 기내가 분주해졌다. 안전벨트를 푸는 소리, 짐을 꺼내는 소리, 승객들을 안내하는 승무원…. 그 틈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앞으로 중국에서 머무를 동안의 일정을 생각해보았다. 지금 중국에서는 하루에도 수 백 명씩 탈북자 송환이 이루어지고 있다는데 과연 예정한 대로 탈북자들을 만날 수 있을까 걱정이 됐다. 지금 중국에서는 이른바 ‘기획망명’의 배후인 NGO를 뿌리 뽑는다며 목사와 활동가들에 대한 검거 색출이 한창이라는데 혹시 오해를 받지 않을까 걱정이 됐다. 그러나 나의 이 걱정이 생의 막다른 곳에서 신음하는 북한 인민과 탈북자들의 고통과 불안, 그것에 감히 견줄 수나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요즘 탈북자들이 대거 검거되어 송환되는 것을 보고 “일부 NGO의 무분별한 행동이 빚어낸 비극”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물론 나도 대사관 진입하는 방식의 투쟁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비난하는 사람 중에 그동안 탈북자 문제에 관심을 갖고 꾸준히 활동해 온 사람은 드물다. 오히려 평소에는 관심도 없던 사람들이 꼭 이런 문제에는 거품을 물고 달라든다. 도대체 양심이라는 게 존재하는 사람들인가?

언젠가 탈북자 송환을 반대하는 집회에 참석한 적이 있다. 중국대사관 앞에서 였다. 모인 숫자는 고작 스무명 남짓이었다. 집회하는 방식도 어찌나 투박하던지…. 나는 취재 겸 참가 겸 해서 그 자리에 있었다. 조금 부끄러웠다. 옆에 있는 외국인 기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그는 동유럽에서 온 사람이었다. 그의 말이 정답이었다. “숫자가 적긴 해도 안하는 것 보단 낫다.” 지극히 상식적인 이 말에 나는 더욱 부끄러워졌다.

대사관 진입투쟁도 마찬가지다. 공과(功過)야 나중에 따질 일이지만, 아무튼 그렇게 해서라도 탈북자 문제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 않은가. 자기 혼자 살겠다고 숱한 사람들을 사지에 몰아넣었다고 하는데,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쥐 죽은 듯 가만히 계속 있으란 말인가. 그 투쟁방식이 잘못되었으면 다른 투쟁방식을 제시해보던지, 아니면 그들이 그렇게 대사관에 뛰어들 수밖에 없는 절박한 현실을 알려야 할 것 아닌가.

그렇게 해서 비행기에 올랐다. 일주일의 여정이다. 욕심 같아서는 수백 수천 명을 만나서 그들의 절규하는 목소리 하나 하나까지 담고 싶지만 여러 가지 여건이 그것을 충족시키지 못한다. 짧은 기간동안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한다. “요새 중국에 가면 탈북자들을 만나기 어렵다”는 어느 기자의 탄식을 들으며 속으로 피식 웃은 적이 있다. 탈북자들을 만나기 어려워진 건 사실이지만, 자신이 그만큼 열심히 뛰지 못했다는 고백은 하지 않고 무슨 정세 타령인가. 아직도 중국에는 수만 명의 탈북자들이 있다.

창 밖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눈부셨다. 김정일이라는 미친 조종사의 곡예비행을 우리는 어떻게 해서 멈추게 할 것인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소프트랜딩’은 과연 언제쯤이나 이루어질 것인가.

“인민 여러분, 우리는 방금 역도(逆徒) 김정일을 처단하고 자유와 해방을 쟁취했습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앞으로 새 조국 건설에 일로매진할 것입니다.”

북한이 민주화되는 날에는 이러한 안내방송이 조선중앙방송을 통해 흘러나오지 않을까? 트렁크에서 짐을 내리며 혼자 이러한 생각을 하며 빙그레 웃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