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중생 두 명이 미군 장갑차에 치어 죽은 사건에 항의하는 대학생들의 시위를 지켜보았습니다.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이 친구들은 주한미군을 ‘살인집단’ ‘범죄집단’이라고 이야기하더군요.
어느 한 집단을 범죄집단이라고 규정지으려면 다른 집단과의 상대적인 비교가 필요합니다. 주한미군을 범죄집단으로 낙인찍으려면 그와 유사한 군사집단과의 비교가 필수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한국군의 범죄율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둘 다 한국에 있는 군대이니 한국군이 민간인을 치어 숨지게 한 비율과 주한미군의 그것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고, 한국 군인이 휴가를 나와 강도·강간 범죄를 저지르는 비율과 주한미군의 그것을 비교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 결과 주한미군의 범죄율이 월등히 높은 수치가 나온다면 ‘범죄집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도 문제는 있습니다. 예를 들어 범죄자의 비율이 20% 정도라 하더라도 나머지 80%까지 싸잡아 범죄집단으로 모는 것은 선량한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닙니다.)

“자국을 지키는 군대와 만리 타향 외국 땅에 있는 군대를 단순 비교하는 것은 무리”라는 지적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한미군과 ‘다른 나라 미군’의 범죄율을 비교해 보면 됩니다. 현재 미군은 일본, 파나마, 푸에르토리코, 터키, 그리스, 이탈리아, 포르투갈, 스페인, 프랑스, 독일, 영국, 벨기에, 네덜란드 등 세계 20여개 나라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이들 나라에 있는 미군의 범죄율과 주한미군의 범죄율을 비교하여 후자가 높다면 역시 ‘범죄집단’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도 확실히 하자면 각 나라의 전체 범죄율, 즉 그 나라가 치안이 약해 원래 범죄 발생률이 높은 사회인지 여부도 따져 보아야 하며, 주둔방식과 주둔성격 등도 폭넓게 따져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주한미군의 범죄가 단 한 건 발생한다 하더라도 우리 땅에 남의 나라 군대가 왜 들어와 말썽을 일으키느냐”고 항의하실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분은 “범죄율이 문제가 아니라 주한미군 범죄자 처리에 관한 한미행정협정의 불평등성이 문제”라거나 “약소국의 설움”을 지적하실 것입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그렇다면 ‘딱 그렇게만’ 말하면 되고 그러한 방향으로 시민들을 설득해 나가면 됩니다. 주한미군 주둔의 부당성과 철수의 필요성을 논리적으로 설명하면 되고, 한미행정협정의 내용은 이러한데 앞으로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하면 됩니다. 그렇지 않고 자꾸 논리와 사실에도 맞지 않은 살인집단이니 범죄집단이니 하는,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는 표현을 써가면서 운동의 성과를 쌓으려 하는 모습이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제가 볼 땐 상당히 비겁해 보입니다.

여중생 사망 사건에 대한 대책위원회의 명칭이 <미군장갑차 여중생 ‘살인’사건 범국민대책위>이던데 이것도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자신들이 생각하는 이 사건의 본질을 명확히 하고자 하는 취지는 이해가 되나, 일전에 운동권 학생들이 민간인을 정보기관 프락치로 오인해 구타하다 죽인 것이나 시위 진압중인 경찰이 돌이나 화염병에 맞아 죽은 사건에 대해서도 ‘민간인 살인 사건’, ‘경찰 살해 사건’이라고 스스로 말할 수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또한 미군 사병의 운전 실수로 인한 사건에 대해 미국 대통령의 공식 사과까지 요구했던데, 그럼 북한 정부기관에 의한 민간인 납치와 테러에 대해 김정일의 공식 사과를 요구할 의사는 없는지도 묻고 싶습니다.

더구나 장갑차에 치어 죽은 사체가 적나라하게 찍힌 사진이 큼지막하게 들어간 포스터를 지하철 역 등 공공장소에 부착하는 행동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겠다’는 태도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런 잔혹한 현장을 보고 싶지 않은 사람(특히 청소년)의 인권을 침해하는 행동이며, 망자(亡者)에게도 인격이 있는 법인데 오히려 죽은 여학생들을 모독하는 행위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 포스터를 보고 제가 ‘죄지은 사람들이 잔혹하게 죽는 모습을 억지로 보여주어 공포의 효과를 노리는 북한의 공개처형 방식’을 떠올렸다면 너무 큰 비약인가요?

“원래 선전이란 사람의 감정을 고무하여야 하지 않느냐”고 반문하실 분도 있습니다. “선전이 무슨 논문 쓰는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일일이 그런 것을 다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설명하느냐”는 목소리도 들려 옵니다. 하지만 ‘정확한 논리’야말로 사람들을 가장 쉽게 이해시키는 길입니다. 감정에 호소하여 전진하는 운동은 결국 그 감정의 부메랑에 맞아 패퇴(敗退)하게 될 것입니다. “논리로 설득하려면 복잡하지 않느냐”는 대꾸는 명쾌한 자기 논리가 없다는 증거이며, 입으로는 ‘민(民)을 하늘처럼 섬긴다’고 이야기하지만 사실은 ‘민중은 이렇게 복잡하게 이야기하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싫어할 것’이라는 내심의 ‘민중 무시 사상’에 대한 고백이고, 저급한 포퓰리스트(populist)라고 자처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북한민주화네트워크 편집장을 맡은 지도 이제 2년이 되어 갑니다. 한 달 한 달 땀과 눈물로 만들었던 <Keys>도 올해 12월이면 30호를 맞이합니다.

겉으로는 “한 10년 정도는 걸릴 각오를 하자”고 말하면서도 솔직히 속으로는 ‘2-3년 안에 어느 정도 결판(?)이 날 것’이라고 생각해오던 북한민주화운동이었습니다. 물론 우리 운동의 성과가 전혀 빛을 내지 못하고 어떤 돌발적 변수에 의해 김정일 정권이 허무하게(?) 무너진다 하더라도, 하루 빨리 그런 날이 와 북녘 인민들의 고통의 사슬이 어떻게든 끊어졌으면 하는 바램은 분명히 갖고 있습니다.

여하튼 그 ‘2-3년’이 후딱 지나가 버렸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북한 문제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떤 분들은 김정일의 사기행각에 현혹된 한국(남한) 실정을 개탄하기도 합니다. 그 목소리를 들으며 저는 <Keys>를 펴봅니다. ‘북한민주화운동의 선전일꾼을 자임해온 나는 얼마나 내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며 반성의 시간을 가져 보았습니다.

사회적 운동을 하는 사람이 경계해야 할 것 중 하나는 ‘사람들이 나와 같은 사고방식을 갖고 있을 것’이라는 착각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건에 대해 내가 분노하면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분노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분노를 느끼는 사건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주었는데, (자기는 제법 잘 전달했다 생각하는데도) 상대의 반응이 시원찮으면 상당히 당혹스러워 합니다. 혹은 자기는 상당히 이상적인 비전이라고 흐뭇해하며 다른 이에게 솜사탕처럼 달콤하게 미래사회를 그려 보여줬는데 사람들이 시큰둥하면 역시 당혹스러워 합니다.

이러한 일이 자주 반복되면 ‘편향(偏向)’이 나타납니다. 좀더 자극적인 방법을 쓴다든지 사실을 과장하게 되고, 심지어는 억지로 윽박질러 자기 주장을 관철하려 듭니다. 이것을 우리는 ‘좌(左)편향’이라고 합니다. 반대로, 계속 해보다가 안되니까 절망하여 포기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무언가를 잘못 생각했어’라고 고개 숙이며 물러나던가 ‘사람들은 다 이상해’라고 세상에 침을 뱉으며 물러나던가, 둘 중 하나겠지요. ‘우(右)편향’입니다.

운동가는 늘 이런 좌·우 편향을 늘 경계하면서 앞길을 개척해 나가야 합니다. <Keys>를 찬찬히 다시 읽으며 저는 주로 ‘좌편향’에 대해 반성했습니다. 북한의 실정을 차근차근 설명하며 꾸준히 사람들을 설득한다는 편집원칙을 정해놓고 매호를 만들어왔지만 때론 논리보다는 감정이 앞서 억지춘향 식으로 사람들을 잡아끌려 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주장을 확실히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과 논쟁할 때 때로는 ‘참 바보 같은 사람이군’하고 속으로 비웃기도 했습니다. ‘왜 사람들은 북한을 민주화해야 한다는 이 지극히 정상적인 생각을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하면서 답답해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설명보다는 강변(强辯)을 일삼고 설득보다는 비난에 치우친 적도 있었습니다. 혹 독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부분이 있었다면 이 자리를 빌어 잘못을 인정합니다.

북한민주화운동을 하는 우리 대열 속에서는 벌써부터 우편향에 빠져 든 동지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벌써부터’라고 표현했듯 우리가 한국에서 북한민주화운동의 깃발을 들게된 것은 이제 고작 2-3년의 일입니다. 북한의 인권상황은 아직도 여전히 열악하고 참혹하며, 북한 민주화에 뜻을 갖고 있는 북한 내의 개인이나 집단을 우리가 직접적으로 지지·지원할 수 있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 동안 우리가 해 놓은 것이 도대체 무엇이냐”고 푸념할 동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북한민주화운동은 너무 어렵고 불가능한 일이 아니냐”고 고개를 흔들며 “더 쉬운 방법을 찾아보자”고 이야기할 동지도 있을 것입니다.

그 답변을 저는 오래 전 한 선배로부터 들은 적이 있는 “혁명은 옳아서 하는 것이지 쉬워서 하는 것이 아니다”는 말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김정일이 존재하고서 북한 인민의 처지가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는다, 김정일을 타도하는 것만이 북한 인민의 처지를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다는 ‘뜻’이 옳다면, 그 길로 가면 됩니다. 어렵고 힘들어도 원칙대로 가는 것이 정도(正道)이지 성과가 당장 눈에 띄지 않는다고 다른 길을 찾는 것은 운동하는 사람의 자세가 아닙니다.

아주 오래 걸릴 수도 있지만 우리는 꾸준히 북한의 실정을 세계에 알려나가야 하고, 아주 작은 변화일 수 있지만 그것이 북한 정권에 압력으로 작용하여 인권상황을 개선하도록 하며, 북한 내에 혁명적인 전변(轉變)이 일어날 때까지 영영 확인이 안될 수 있지만 어떻게든 북한내의 혁명 역량을 찾아 이들과 연대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북한민주화운동입니다.

굳이 쉬운 길을 찾으려 한다면,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북한민주화운동은 ‘북한의 실정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일’입니다. 아니 그전에, ‘자신이 북한에 대해 잘 아는 것’입니다. 한국 내에 3천명이나 되는 탈북자들을 찾아가 만나보고, 지천으로 깔려있는 그들의 증언이 담긴 책도 읽어보고, 북한 정권을 옹호하는 입장의 글도 한번 읽어보고 비교해 보십시오. 진정 ‘줏대 있는 운동가’라면 덮어놓고 못 믿겠다, 과장이다, 정보가 한정되어 있다고 말만 하며 앉아있지 말고, ‘내가 이 진실의 끝을 보겠다’는 자세로 뛰어드는 오기(傲氣)를 한번 가져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Keys>가 그것에 길잡이 역할을 하겠습니다. 사실을 가감(加減)없이 전하겠습니다. 인민의 자주성을 유린하는 수령독재에 대한 분노의 마음은 가슴속에 이글거리나, 섣부른 감정으로 앞서가려 하지 않고 독자들 앞에 딱 ‘반걸음’ 앞서서 왜 김정일 정권을 타도해야 하는지 차분히 설명하고 설득하겠습니다. ‘선전일꾼’으로서 다시 한번 가다듬는 제 다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