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6월 13일 김정일 2002년 9월 17일 김정일

북한 정권에게 이용당할 우려가 있다며 순안공항에 도착해서도 웃지 않고 시종일관 무거운 표정으로 카메라 앞에 섰던 고이즈미 총리…. 2002년 10월 10일 자 『주간조선』 (통권 1723호) 편집장 편지에는 ‘다급해진 김정일’이라는 제목아래 두 개의 사진을 나란히 싣고 있는데, 하나는 2000년 6월 13일 남북정상회담때의 김대중-김정일, 다른 하나는 2002년 9월 17일 북일정상회담 때의 고이즈미-김정일이다. 김정일의 표정과 자세에서, 누가 보아도 이 사진은 너무나 대조된다. 위풍당당 자신감 넘치던 희색 만연한 김정일은 그 옆 사진에서는 마치 항복문서에 조인하러온 패전국의 장수 처럼 주눅이 들어있다.

이 자리에서 김정일이 한 ‘발언’으로 일본 열도가 뜨겁다. 최근 일본을 다녀온 사람의 이야기에 따르면 ‘정말’ 뜨겁다고 한다. 느닷없이 김정일이 일본인 납치사건을 시인했기 때문이다. 일본 언론은 연일 이 문제로 지면(紙面)과 방송을 채우고 있다. 물론 사전에 북-일 정부 사이에 오고 간 흥정이 있었으리라. 그렇더라도 납북자, 국군포로, 테러문제 등에서는 입 벙긋도 못하고, 오히려 국민들 중에 이런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들을 향해 코 앞에 검지 손가락을 갖다 대고 ‘쉿!’을 외치는 대한민국 정부에 비하면 북일정상회담의 성과가 부럽기만 하다. 최근(10월 15일)에는 비록 가족을 동반하지는 못했지만 납치되었던 일본인이 일시적으로 귀국하는데 까지 이르렀다.
우리가 납북자, 테러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저 납북자 몇 명 송환받고 과거사에 대해 요식적인 사과나 한번 받자고 그러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북한정권의 본질을 분명히 가리는 운동이며, 북한인권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매개가 될 수 있는 운동이기 때문이다.

일본 정부은 지금껏 “납치 8건, 피해자 11명”이라고 제기해 왔는데 북한은 정직하게도(?) 요구하지도 않은 2명의 납치사실을 더 확인해 주었다. 물론 이것에도 일정한 포석이 있으리라고 판단된다. 그런데 일본인 납치를 시인한 북한 당국의 발표를 뜯어보면 그야말로 의문 투성이다.

13명중 살아있는 사람은 5명, 나머지 8명은 죽었다. 죽은 사람이 살아있다면 현재 나이는 40∼50대 정도가 된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아도 40∼50대의 사망률이 60%를 넘을 수가 있나. 거기다 그들이 죽은 시기는 70년대 말∼80년대 중반으로, 사망당시 대개 20대∼40대의 나이였다. 이때는 북한의 식량난이 심각할 때도 아니니 굶어서 죽었을 리도 없다. 북한이 밝힌 사망원인은 자살, 연탄가스 중독(2명), 교통사고(2명), 간경변, 익사, 심장병 등인데 이 역시 그 나이 또래의 사망원인으로는 적절하지 않다.
이게 사실이라면 답은 둘 중 하나다. 현재 북한 내 20대∼40대 사망률이 그 정도 치수가 되고 사망원인도 그와 비슷하든지 해야 한다. 물론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납치된 일본인들이 일반적인 확률이나 통계에 맞지 않는 ‘아주 특별한(?)’ 삶을 살았다는 것인데, 어떻게 납치된 일본인에게만 이런 불가사의한 확률이 적용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더구나 사망자의 유골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대목에서는 쓴웃음이 흘러나온다. 홍수로 인해 묘소가 모두 유실됐다고 하는데, 한꺼번에 모여있는 묘소가 아니고 북한 각지에 산재되어 있는 묘소가 어떻게 하나도 남김없이 없어질 수 있는지, 도대체 그것을 믿으라고 하는 말인지…. 이것 또한 사실이라면 답은 둘중 하나다. 현재 북한 내에는 홍수로 인해 기존 묘소의 90%이상이 유실되어 버렸던지, 납치된 일본인들의 묘소는 ‘아주 특별’했던지.

물론 유골이 남아 있는 경우가 한 명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유골은 고이즈미 방북 며칠 전에 화장된 상태였고, 나중에 일본으로 가져가 감식을 해보려 하니 유골이 두 번 화장되어 조사가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삼척동자라도 무언가 냄새가 느껴지지 않은가.

모르긴 해도 현재 이 시각에도 북한 땅 어딘가에서는 조작과 준비(?)가 한창일 것이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 카드를 한 두 번 더 꺼내기 위해 그에 맞는 사람을 골라내느라 한창일 것이고, 혹시 남한 국민 중 북한으로 납치된 사람을 어느 순간에는 일부 공개하기 위해 모종의 준비를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부산 아시안 게임에 갈 응원단을 골라내기 위해 한참 분주했을 것이고, 남한 가수들의 북한 공연에 동원될 사람을 골라내느라 바빴을 것이다. 이런 질문에는 이렇게 답하라, 저기 가서는 이렇게 행동하라, 머리 싸매고 고민하면서 자료집 만들고 외우게 하느라 참으로 고생이 많을 것이다. 이라크 문제가 종결되고 미국이 북한 핵문제 등을 거론하면 보여줄 공개용(公開用) 공장을 준비하고 있을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을 진두지휘하는 김정일은 겉으로는 “때가 될 때 하나씩 꺼내면 된다”고 느긋해하고 여유있는 척 할 테지만 속으로는 허둥지둥 무척이나 당황스러울 것이다. 이번 일본인 납치자 문제처럼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하면 예전에 하던 대로 모르쇠로 일관하든지 끝까지 우겨버리면 되지만, 그것도 한 두 번이지 이젠 국제사회도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
왜 그 고생을 하면서 그 자리에 계속 붙어 있으려 하는지, 김정일이야말로 ‘불가사의한’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