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2월 1일부터 열흘간 중국을 다녀왔습니다. 올해 북한관련 뉴스의 핵심은 단연 '주중(駐中) 외국공관을 통한 집단망명'이었습니다. 3월 14일 스페인대사관에 진입한 25명을 필두로 하여 타전된 집단망명 소식은 이제는 너무도 많은 탈북자들이 외국공관에 쇄도하고 있어 특별한 뉴스거리가 되지 않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베이징(北京) 주재 한국총영사관에는 60～70명에 이르는 탈북자들이 북적댄 적도 있다고 합니다.

집단망명의 진원지인, 외국공관이 모여있는 베이징시 자오양취(朝陽區) 싼리툰(三里屯)과 젠궈먼와이(建國門外) 거리를 걸었습니다. 탈북자 15명이 진입하여 성공사례를 만든 후 숱한 사람들이 성공과 실패를 반복했던 독일학교의 경우 담벼락 근처 인도(人道)에 조차 접근하지 못하도록 가로수 사이에 줄을 쳐놓았습니다. 담벼락 위에는 철조망이 올려져 있었는데 베이징에 오래 있었던 한 탈북자는 '최근에 생긴 것'이라고 설명해주었습니다. 그는 거기에 전기가 흐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제가 '설마'하고 고개를 저으니 자기가 직접 만져봤다고 우겨댔습니다. 아무튼 탈북자들은 대개 그렇게 믿고 있었습니다.

마침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중국 방문이 있어 거리 경계는 더욱 삼엄했습니다. 거의 2-3미터 간격으로 경찰이 늘어서 있는데, 지난 9월에 탈북자들의 대사관 진입을 막기 위한 비상경계령이 내려졌을 때도 그러하였다 합니다. 얼마나 살벌한 분위기였을 지 상상이 되었습니다. 그 엄청난 경계망을 뚫고 대사관에 뛰어들기 위하여 마지막 순간 호흡을 가다듬고 주먹을 꼭 쥔 채 물끄러미 이국(異國)의 깃발을 바라보았을 탈북자들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가슴이 아려왔습니다.

대사관 진입! 북한관련 활동을 하는 비정부기구(NGO)에서 대외적인 이목을 끌기 위하여 기획한 망명이라 하여 언론에서는 '기획망명'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이것을 두고 어떤 사람들은 '그 수 십 명을 살리기 위하여 수 천 명을 사지에 내몰았다'고 비판했습니다. 실제 탈북자들의 잇따른 외국공관 진입이후 중국 정부의 탈북자 체포가 더욱 적극적으로 이루어졌고 대단히 많은 사람들이 송환되어 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비판이 북한인권 민주화운동의 방향을 고민하면서 내놓는 진지한 조언이라면 얼마든지 건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으나, '제 한 몸을 위한 권력을 놓치지 않겠다고 수 천 만 동포를 사지에 내몰고 있는' 살인귀(殺人鬼)에 대해서는 입 한번 뻥끗 못하는 사람들이 그런 말을 하는 것을 보면 정말 역겨워서 못 들어주겠습니다.

중국에 있는 탈북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외국공관 진입을 통한 집단망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론 대부분의 탈북자들은 거세어진 탈북자 색출에 대해 걱정했습니다. 하지만 또한 대부분 '우리도 살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게되었다'는 말을 덧붙입니다. 숨어 지내고 당하고 지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던 사람들이 '내 삶을 스스로 개척해 나간다' '우리의 처지를 전 세계에 알리면 된다'는 메가톤급 각성을 얻게된 계기였다고 말입니다.
저는 '햇볕정책'에 대해서도 물었습니다. 한 탈북자는 대답대신 이러한 반문(反問)을 했습니다.
'고려호텔 연회장에 남북한 사람들이 모여 앉아 술과 음식을 나누는 모습을 TV로 보았는데 그게 다 어디서 나온 것인지 아느냐' 다른 음식은 모르겠지만 고추장과 돼지고기는 함경북도 회령에 있는 '22호 정치범 관리소'에서 공급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막역지우(莫逆之友)가 그곳에서 경비병으로 근무한 적이 있어 들은 이야기라고 했으며, 많은 사람들이 '22호에서 생산되는 돼지고기가 장마당에 비밀리에 흘러 들어와 높은 가격에 거래될 만큼 그 질이 좋고, 정상적인 통로로는 평양에 공급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귀국하여 밀린 신문을 읽다가 한 일간지(日刊紙)에 실린 인공위성 촬영 사진에 눈이 멈추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22호 수용소에 대한 글을 쓰려던 차에 때마침 그곳을 촬영한 위성사진이 공개된 것입니다. 이곳에서 경비병으로 근무하다 탈출한 안명철(安明哲 33)씨의 증언에 따라 사진에 나타난 각 건물의 용도까지 상세하게 적어놓았습니다.
검고 푸르고 황톳빛이 뒤섞인 사진, 수 만 미터 상공에서 찍었을 그 사진 위에, 자기 하루치 식량보다 더 푸짐한 음식을 먹으면서 피둥피둥 살이 오른 돼지를 부럽게 바라보고 있을 수인(囚人)의 얼굴이 겹쳐졌습니다. 여기는 정치범 마을, 저기는 탈곡장, 저쪽은 식료공장, 검게 보이는 곳은 탄광, 아침에 일어나 작업장으로 끌려가는 할머니와 누더기 같은 옷을 걸친 채 정치범 어린이 학교로 향하는 손녀의 모습도 보이는 듯 했습니다. 5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이곳에 있다고 합니다.

북한에는 이러한 정치범 수용소가 현재 5군데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습니다. 수용된 인원은 약20만 명 정도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원래 10여 곳에 이르렀으나 국제사회의 비난여론과 노출우려 때문에 90년대 초반 국경과 평양 인근의 수용소를 해체하여 통폐합했다고 합니다.

수인들은 강제노동에 동원되어 자신들은 써보지도 못할 물건을 생산합니다. 함경북도 회령시에 있는 22호 수용소는 농축산물을 주로 생산하고, 함경북도 청진시에 있는 25호 수용소는 갈매기표 자전거를 생산하는 것으로 전해집니다. 함경북도 화성군에 있는 16호 수용소는 외화벌이의 원천이 되는 송이버섯을 채취하고 있고, 함경남도 요덕에 있는 15호 수용소는 광석채취와 농산물 생산을 주로 하고 있습니다. 정치범 수용소에서 나오는 물건의 질이 아주 좋다는 것이 북한 사람들의 전언(傳言)입니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이후 봇물 터지듯 방북행렬이 이어졌습니다. 당신이 평양에 간다면 아마도 특급호텔인 고려호텔에 머무르게 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녁에는 남북 양측에서 교대로 성대한 만찬을 준비합니다. 분위기가 무르익을 무렵 '건배'제의가 들어옵니다. 모두가 일어서 대표자의 건배사(乾杯辭)에 이어 '위하여'를 외칩니다. 흥겹게 잔을 들이키고 자리에 앉은 당신은 테이블 가득 마련된 음식 중 먹음직한 고기보쌈에 젓가락을 갖다댈 것입니다. 22호 수용소에서 올라온 고기로 만든 음식입니다.

운동(運動)을 하는 사람에게 도덕성은 너무나도 중요하지만, 지나치게 도덕성을 강요하다보면 근본주의(根本主義)에 흐를 우려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제국주의의 식민통치에 항거한다면서 제국주의자들이 만든 옷과 음식은 입지도 먹지도 않았던 운동가가 있다면, 그의 순결한 마음이야 존중하지만 대중운동가로서는 적합하지 않은 자세와 전술입니다.

마찬가지로 방북단이 대접받는 음식과 물건이 북한 인민들의 피땀이라고 해서 그것을 먹고 말고 쓰지 말자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기억하자' '잊지 말자'는 것입니다. 현 정부가 햇볕정책을 취하였던 것도 애초에는 독재자의 외투를 벗겨 '북한 인민을 해방하는 것'에 목표를 두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여야 하며, 전술상 김정일과 머리를 맞대고 건배를 하는 상황이 온다해도 그는 2천만 인민을 도탄에 빠뜨린 장본인으로 꼭 타도되어야할 대상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경제협력, 대북지원, 교류사업 등으로 북한을 찾는 기업가나 예술인, 사회운동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몽룡이 '금 항아리의 좋은 술은 만 백성의 피요, 옥소반의 맛좋은 안주는 만 백성의 기름이라' 를 써 내려갈 때 새파랗게 질려서 잔칫상에서 슬금슬금 물러난 판관과 현감이 있었던 반면, 끝까지 그 뜻이 무엇인지 모른 채 변사또 옆에서 해죽해죽 웃고 놀기만 하다가 '암행어사 출두야!'소리에 혼비백산하여 마루 밑으로 허겁지겁 숨어들기 바빴던 백치(白痴)들도 있었습니다. 역사가 당신을 어느 쪽으로 기록할지, 곰곰이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