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영 / 1970년생. 서울대 국문과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월간 Keys 편집장과 조선일보 기자를 역임했다.

게이오대학의 '돌아오지 않는 학우'

지난 9월 16일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북한 방문을 하루 앞두고 열린 일본 납북자 관련 집회에 참석했다. 2000년부터 3년 연속 한국 납북자 문제에 대한 관심의 연장으로 이 집회에 참석했지만 올해는 좀 다른 시각에서 문제를 보고 싶었다. 도쿄 미다역 부근의 게이오대학(慶應義塾大學)과 구단시타의 야스쿠니신사(靖國神社)를 함께 둘러본 것은 이런 기대에서였다.

게이오대학에 가보고 싶었던 것은 오래 전부터 이 대학의 창립자 후쿠자와 유키치(福澤兪吉 : 1835. 1. 10 ～ 1901. 2. 3)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을 보슬비를 우산도 없이 맞으며 찾아간 대학의 교정은 '경로의 날' 공휴일로 텅 비어있었다. 경제학부의 몇몇 학생들은 매우 친절하여 후쿠자와 유키치 흉상이 있는 도서관 앞까지 안내해 주기도 하고 이것저것 설명해 주기도 했다. '우리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도 이제는 후쿠자와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이 많아요.'

일본 최고액권(만엔권) 도안의 주인공이기도 한 후쿠자와 유키치. 일본 문화에 서구 근대의 지식과 문물을 옮겨 심는데 열중했던 그는 확실히 일본이 20세기 세계사의 본무대에 등장하는데 큰 기여를 한 인물이다. 조선정벌을 주장하는 정치논설(征韓論)을 쓰기도 했던 후쿠자와는 우리 나라에서는 인상이 좋은 인물이 아니지만 김옥균 등 개화파 인물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던 것은 물론이고 우리가 쓰고 있는 근대적 개념들의 상당수가 후쿠자와의 학교에서 나왔으니 한반도도 그에게 빚진 바 없다고 할 수 없다.

그러나 필자가 게이오대학 교정에서 정작 인상적으로 본 것은 '대일본'을 꿈꾸었던 후쿠자와의 흉상이 아니라 그 부근에서 발견한 소박한 화강암 비석 하나였다.

돌아오지 않는 학우여
자네의 뜻은
우리들 가슴속에 살아있고
자네의 목소리는
우리 배움의 집에 울러퍼진다

거기에는 「'今次大戰'(제2차 세계대전)에 나가 돌아오지 않은 학생들을 기리기 위한 비석」이라고 적혀 있다. '일본 징병학생들도 못 돌아왔구나' '일본인도 전쟁의 피해자였구나'라는 생각은 미처 가져보지 못한 것이다. 일제 식민지를 겪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서양을 향해 터뜨린 전면전의 희생자 '조선사람'의 후예로서 '그들 가해자도 피해자였다'는 깨달음은 몹시 역설적이다. '일본의 군국주의'와 '사람으로서 일본인'을 구분해 내기가 이렇게나 어려웠던 것일까.

게이오대학의 친절한 학생들에게 일본 납북자 문제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일본에서는 너무나 유명한 문제랍니다. 북한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는데 이 문제 때문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90년대 초 대한항공 폭파범인 김현희가 증언한 일본인교사 이은혜(일본명 : 다구치 야에코) 사건에서부터 불거진 일본인 납치문제는 96년 요코다 메구미에 대한 북한 공작원 출신 안명진씨 증언으로 전 일본적 관심으로 확대되기 시작했다. 이 문제는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을 구출하기 위한 일본의 '국민적' 관심으로 치달아갔다.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질문은, 일본 열도가 이토록 이 문제에 뜨겁게 반응하게 만든 것은 '일본인'을 납치했다는 사실 때문 아닐까, 일본의 저널리스트 우노씨는 유태인들이 자신들의 핏줄을 구출하기 위해 지나치게 애써온 점에 대해 불쾌해 했었는데 일본인들이야말로 '일본인'에 대해 지나치게 집착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었다.

어떤 면에서 이런 질문은 질투심 때문이다. 몇 년 전부터 한국의 납북자 문제에 관심을 가져온 나로서는 한국인들의 참을 수 없는 무관심과 냉담함을 경험했다.
일본에는 전국의 시도에 납북자들을 구출하기 위한 모임이 있고, 민간인 자원봉사자들 또한 적지 않다. '일본인을 잡아가다니요.' 빠짐없이 집회에 참석한 고베의 한 음악선생님의 말이다. 집회에서 필자는 '고쿠민(국민)' '안젠(안전)'이라는 말을 셀 수 없이 들었다. 일본 납북자문제는 어쩌면 이 두 단어에 집약돼 있는지도 모른다.

일본 '국민'의 '안전'

게이오대학을 빠져나와 히비야공회당으로 갔을 때 이미 입추의 여지없이 꽉 메워져 있었다. 사쿠라이 요시코라는 백지연만큼 유명하고, 박찬숙만큼 지적인 방송인이 올해도 역시 사회를 맡고 있었다. 혹자는 일본에서 납치문제가 부상하는 데 그녀의 역할을 대단히 높이 평가한다. 빈틈없고 예의바르며 아름다운 사쿠라이 여사의 사회는 공회당을 채운 흥분을 마치 조련하듯 다루어내고 있었다. 예년에 비해 올해 특징적인 것이 있었다면 각 정당의 정치가들이 이 민간집회에 대거 참석했던 것이다. 그들도 역시 '고쿠민노 안젠(국민의 안전)'이라는 말을 거듭 거듭 부르짖었고, '고이즈미 총리 대신. 납치된 일본인을 데리고 오라'고 외치는 일치된 목소리에 힘이 실려 있었다.

고이즈미 총리로서도 북한에 갔다가 빈손으로 올 수는 없는 상황이었고, 김정일로서도 일본 총리가 직접 와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적어도 납치문제에 관한 한 뭔가 획기적인 국면을 기대해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김정일은 교착상태인 일북관계를 풀기 위해 결국 납치 사실을 시인했다. '해결'해 주겠다고 결심을 굳힌 듯이 그동안 일본 언론이 제기해 왔던 혐의를 거의 시인했다. 대남 공작원 훈련을 위해 일본인을 납치해 왔다는 것부터 그들 중 누가 살았고 누가 죽었는지에 대해서도 소상히 알려주었고, 책임을 아랫사람에게 돌린 비겁함을 빼면 김정일의 '납치 시인'은 북한 50년사에서 획기적인 고백으로 기록할 만했다.

물론 김정일이 바라는 대로 일북수교나 배상금문제의 돌파구가 열리지 않았다. 일본에 있는 조총련만 낭패한 것처럼 보인다. 어떤 전문가는 '김정일이 지뢰를 밟았다'고 말했고, 황장엽 전 노동당 비서는 '독재자만이 저지를 수 있는 실수'라고 했다 한다.

일본에서 이제 김정일은 '납치용의자'에서 '납치살인자'로 확정됐다. 일본 납북자문제는 '해결됐다'고 할 수는 없을지라도 국면의 전환을 이룬 것만은 사실이다. 9월 17일 김정일의 납치 시인 이후 일본은 '납치'와 '반북' '혐북' 정국이라고 한다. 김정일이 시인한 일본인 납치와 8명의 치사(致死) 사실은 일본인들의 거의 무의식화돼 있는 북한에 대한 '불안'을 건드려 놓았는지도 모른다. 이제 북한은 일본인들에게 지진보다 무서운 신체의 위협이 됐다.

야스쿠니의 흰비둘기

히비야공회당에서 4시경 집회가 끝났을 때 택시로 야스쿠니 신사로 갔다. 이 신사는 메이지시대 이후 대신들의 제사를 지내왔다. 유감스럽게도 이곳에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범인 도조 히데키 등의 대신들도 안치돼 있다. 얼마 전 고이즈미 총리가 이 신사를 방문했을 때 한국과 중국 등 일본이 일으킨 전쟁의 상처에서 치유되지 못한 나라들은 몹시 화를 냈다.

앞서 게이오 대학에서 만난 몇몇 학생들은 야스쿠니에 가보겠다고 했더니 이렇게 말해 주었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일본인의 30～40%는 야스쿠니에는 절대로 가서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대수롭지 않다고 여기는 사람이 60% 가량 되는 셈이지요.'

정작 자신들은 가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결코 가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30～40%는 어떤 사람일까, 그것이 궁금해졌다. 전쟁은 일본인 자신들에게도 상처였기 때문이 아닐까. 필자의 오랜 일본인 친구는 '야스쿠니에 간다고? 꼭 가봐야 돼. 정말 징그러운 사람들을 만날 수 있거든.' 우익 노인들을 빗대 이렇게 조소하는 것이었다.

야스쿠니신사에서 나는 참배하지 않았다. 신사앞에서 지키고 있던 보청기 낀 노인은 필자의 이런 모습이 불쾌했던지 '서울에서 왔다고?'라며 짐짓 못 알아듣는 척 했다. 젊은 일본사람 몇몇이 신사 앞에서 정중하게 목례했지만 서울에서 온 나는 그저 구경꾼일 뿐이다. 독일은 뉘른베르크 재판 이후 독일과 히틀러를 구분 짓기 위해 인류의 양심을 걸고 노력했다. 북한 인권을 위해 일하고 있는 노베르트 폴러첸씨는 몇 번이나 '히틀러와 독일의 인류에 대한 죄악'에 대해 사죄하는 마음으로 이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본은 도쿄재판 이후에도 도조 히데키를 포함한 전쟁기 대신들, 이른바 전범들을 감싸안았다. 도쿄재판 당시 일본인 변호사는'만일 연합군이 졌다면 이 자리에 처칠이나 루즈벨트가 서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했는데 이런 감각이 아직도 지배적인 것이 아닌가 싶다.

야스쿠니신사에는 평화를 상징하는 흰비둘기가 날고 있었다. 그것은 이상하게 전쟁을 연상시키기만 했다. 흰비둘기 나는 숲의 나무 마다에는 이곳을 다녀간 각종 참전단체들의 명패가 붙어있었다. 육군사관학교 몇 기라든가 무슨 무슨 고사포부대, 포병부대라든가. 연합군은 일본의 정규군을 해산시켰다. 이들 단체는 추억에나 존재하는 것일 터. 야스쿠니는 소멸돼야 옳은 추억을 제사지내는 곳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이름으로

북한 정권에 희생당한 일본인 납치피해자들에게 심심한 애도를 표한다. 후쿠자와 유키치와 야스쿠니신사를 돌아보며 연상했던 강력한 일본적 아이덴터티는 작금의 일본인 납치문제와 연관돼 있는 듯이 보인다. '일본인을 감히!'라는.

그러나 아무래도 이것은 요코다씨와 아리모토씨의 딸들, 메구미나 게이코에 관한 이야기가 아닌가 한다. 한국 납북자 가족을 대표하고 있는 이미일, 최우영씨들이 요코다 부인을 만났을 때 손잡고 울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의 눈물이며, 정치나 역사의 눈물이 아니다. 김정일의 납치시인으로 혐북 분위기에 휩싸여 있는 일본인들은 이제 '북한으로 쌀 한 톨도 보낼 수 없다'고 말한다고 한다. 어쩐지 지난 9월 이후 일본 납북자 소식만 들려오면 필자의 마음은 몹시 무거운데, 이번에야말로 일본분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북한에서 말입니다.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먹을 것, 입을 것이 모자라고 겨울이 오면 온기가 없어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겪습니다. 북조선사람들이라고 불리는 그들 역시 김정일에 의한 납치피해자에 다름없습니다.'

지금 일본사람들의 분노가 '조선'이나 '한반도'에 대한 분노가 아니길 바란다. 고이즈미 총리가 북한에 가고 한국에도 일본 납치문제가 보도되면서 적잖은 한국 사람들이 '자기들이 예전에 우리한테 한 건 생각도 하지 않고'라는 식으로 말하고 있다. 이런 한국사람들의 강퍅한 마음도 제발 녹아내리길 바란다. 그들은 지금 북한에서 우리 민족이 당하고 있는 일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니 문제가 아닌가.

95년 한국으로 온 탈북자 안명철씨가 증언했던 회령 22호 정치범 수용소 인공위성 사진이 얼마전 공개됐다. 북한에 아직 온존해 있는 야만적 폭력에 대해 가슴이 저려온다. '일본인'의 '북조선'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인류'의 이름으로 '인간'에 대한 김정일정권의 범죄행위에 대해 규탄하는 마음을 일본사람들과도 나눌 수 있길 바란다. 역사나 이념이나 정치의 거품을 걷어내고 '사람의 마음'으로 연대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다시 한번 김정일에 희생된 일본의 납치피해자 영전에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