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한자능력검정협회가 2002년을 상징하는 한자로 '귀(歸'자를 선정하여 발표했다는 신문보도를 보았습니다. '귀'가 선정된 이유는 일본 경제가 장기 침체로 인해 거품이전 수준으로 회귀 한 것, 그리고 대중가요의 복고 열풍 등의 이유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북한에 납치됐다 생존한 5명이 24년만에 고향에 돌아온 것'이 가장 큰 배경이었다고 알고 있습니다.

2002년을 상징하는 두 번째 한자로는 북(北), 세 번째 한자는 납(拉)이라는 보도도 들었습니다. 많이 부럽고, 또 부끄러웠습니다. 한국에서 2002년을 상징하는 한자를 꼽으라면 축(蹴)이나 선(選) 정도가 될 것입니다. 상반기는 월드컵에 온 나라가 흔들렸고, 하반기는 대통령 선거에 온 국민의 이목이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문득 2002년 2월 일본 동경에서 열렸던 '북한인권 국제회의'가 생각났습니다. 한국의 '북한인권시민연합'에서 주최했던 이 행사에는 세계 각국의 인권운동가들이 모여 북한의 인권실태와 해결방안에 대한 진지한 발표와 토론이 이어졌습니다. 필자도 이 자리에 참석하였는데, 일본 납북자 관련 단체들의 적극적인 선전활동에 놀랐습니다.

한국에는 대표적인 납북자 단체가 3개 있습니다. 크게 보아서는 둘로 나눌 수 있는데요, 하나는 한국전쟁 이전 혹은 도중에 북한으로 끌려간 사람들을 위한 단체이고, 다른 하나는 전쟁이후 납북자 가족의 모임입니다. (한국전쟁이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난 이유로, 한국 사람들은 대개 6.25 전쟁이라 부릅니다.)

한국전쟁 중 북한으로 끌려간 사람의 숫자는 자그마치 8만여 명, 한국전쟁 이후에는 모두 3790명이 납치됐고 이중 486명은 아직도 북한에 억류되어 있습니다. 납치된 사람들은 북한정권의 체제우월성을 선전하는 도구로 활용되거나 남파 간첩을 훈련하는 요원 등으로 생활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거부한 사람들은 철저히 생활을 감시당하면서 최하층민으로 살아가거나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 혹독한 처벌을 받고 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끌려가고 억류되어 있지만 납북자 문제에 대한 국민적 관심은 불가사의할 만큼 저조합니다. 반면 일본의 경우 '단'10여명이 납치되었음에도 이 문제로 인해 열도가 들끓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앞서 말했듯 한편으로 부럽고 부끄러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왜'일본에서는 그럴까 하고 생각해보았습니다.

솔직히 저는 묻고 싶습니다. 지금 일본이 납북자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과연 일본인들이 인권의식과 민주주의 의식이 높아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이 있는 것인지. 자국의 국민이 납치되었다 오랜 시간 - 수년 혹은 수 십 년 - 만에 돌아왔으니 이에 관심을 갖고, 또 납치한 사람에 대해 분노의 감정을 갖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일본인'이 아니었다면 지금 일본이 저렇게 들끓고 있을까, 하고 생각해봅니다. 만약 중국인이 북한에 납치되었다 돌아온 사건이 있었다해도 일본은 그것을 자기 나라 국민의 문제처럼 생각하면서 관심을 가졌을까요?

일부 한국 사람들은 일본이 한국을 식민 통치하던 시절 수많은 젊은이들을 징용 징병 정신대 등으로 끌고 간 문제에 대해서는 큰 관심을 갖지 않으면서 자기 나라 국민들이 끌려간 것에 대해서는 호들갑을 떤다고 비난하고 있습니다. 사실 적지 않은 한국인들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결국 일본인이나 한국인이나 생각의 바탕에는 '국가'라는 전제가 짙게 깔려 있습니다. 내 나라의 사람들이 당한 일에는 마치 자기일인 듯 관심을 갖지만, 다른 나라 사람들이 당하는 일에는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대하는 것이지요. 그럼에도 사람들은 지구 반대편에 있는 어느 나라 영화배우가 이혼을 했다느니, 어느 나라 대통령이 스캔들을 일으켰다느니 하는 것에는 눈을 밝히며 관심을 갖고 알려합니다. 참 기가 막힌 '세계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진정한 세계화는 '인권'에서부터 이루어져야 할 것 같습니다. 인권을 '세계인의 권리와 의무'로 생각지 않고 '그 나라 국민들이 알아서 할 일'로 방치해두었던 무지몽매함이, 지금껏 김정일과 같은 독재자가 지구상에 존재하도록 만들었습니다. 다른 나라 연예인들의 사생활에 대해 갖는 관심의 십분의 일이라도 다른 나라 사람들 - 지구촌 우리 가족 - 의 인권에 관심을 갖는다면 독재의 만행은 지구상에서 사라질 것입니다.

저는 일본인 납치문제가 중요하지 않다거나 일본은 납치문제를 갖고 이제 그만 떠들라고 이 글을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을 독자 여러분도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일본의 울타리를 넘어, 그리고 한국의 울타리를 넘어, 미국, 중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필리핀, 아르헨티나, 호주, 남아프리카공화국, 쿠웨이트, 폴란드 전 세계 모든 나라의 울타리를 넘어, 이제 인권의 문제는 세계인의 문제로 삼자고, 그래서 전 세계가 손을 잡고 지구상에 잔존한 마지막 독재의 찌꺼기들을 걸러내자고, 국가의 울타리를 넘어설 때만 독재는 완전히 제거될 수 있다고, 이런 당연한 말씀을 드리기 위해 보내는 편지입니다.

인간이 하나되어 인간답지 못한 것들을 몰아내는 한판 승부의 시대가 이제 서서히 시작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