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천만의 소식을 전할 수 있는 날이 빨리 오길

다시 살펴보는 기구한 가족사

어느 추운 겨울날 모스크바 변두리 한 호텔에서 47년 동안 생사를 몰라 안타까워했던 서울의 오빠와 평양의 여동생이 비밀리에 만났습니다. 오빠는 열 여섯 살, 여동생은 열 네 살 때 헤어진 후 이제서야 만났습니다. 백발이 다돼서야 만난 두 늙은이가 서로를 바라보는 순간, 손도 잡아보기 전에 터져 나오는 오빠의 외침.

“어머니께서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고 돌아가셨냐?”
그 짧은 순간에 세 번이나 되묻습니다.
“알고 가셨지?”
“틀림없지?”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려는 가장 단순한 외침. 그러나 일천만 이산가족에게는 가장 절박한 이 말의 아픔이 당신은 혹시 느껴지시는지요?

지은이 성혜랑씨는 김정일의 전처(前妻)인 성혜림씨의 언니입니다. 김정일과 성혜림 사이에서 태어난 김정남의 이모가 되는 셈입니다. 그의 아들은 1982년 남한으로 귀순, 김정일의 사생활을 밝힌 글을 썼다가 1997년 경기도 성남시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나오다 괴한들의 총에 맞아 숨진 故 이한영씨(본명 ‘이일남’)입니다. 또 그의 딸 이남옥은 ‘김정일의 수양딸’로 알려져 언론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성혜랑과 이남옥은 1996년 서방으로 탈출한 후 지금까지 베일에 가려진 채 은신하고 있습니다. 이한영이 쓴 책 『대동강 로열패밀리 서울잠행 14년』은 Keys 2호(2000년 4월호)를 통해 소개한 바 있으며, 성혜랑이 쓴 또 다른 책 『등나무집』은 Keys 16호(2001년 7-8월호)에서 만나보았습니다. 우리는 두 번의 서평을 통해 성혜랑씨의 기구한 가족사(家族史)를 들으며 함께 눈물을 훔쳤습니다.

남쪽의 가족들에게 띄우는 안부 엽서

아시다시피 성혜랑씨는 서울에서 나서 자란 사람입니다. 그러다 열성 노동당원이었던 어머니를 따라 전쟁 중 북으로 올라간 사람입니다. 그는 북한에서 40년 이상 살면서 남한 출신자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들의 기구한 사연도 많이 알고 있습니다.

성혜랑씨는 1996년 북한을 탈출하자마자 북한에서 만났던 이런 남한 출신자들의 이름을 필사적으로 적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대부분 의용군으로 입대했다가 가족과 헤어져 북한에 남게 된 사람들입니다. 오늘 소개할 책 『소식을 전합니다』는, 그들의 부모님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아들딸들의 소식만이라도 알려야겠다는 사명감으로 써 내려간 기록을 묶어 놓은, 일종의 ‘안부엽서’라고 하겠습니다.

이 책은 크게 3장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지은이가 비교적 잘 알고 있는 사람들 40여명에 대해서는 1장 ‘성혜랑 가족 이야기’와 2장 ‘얼굴은 환한데 목소리도 쟁쟁한데’에서 그들과의 추억, 생사여부, 알고 있는 삶의 과정을 요약해 서술하고 있습니다. 또 자세한 생활과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190여명에 대해서는 이름과 간단한 약력을 3장 ‘자다가 꿈결에 떠오른 이름’에 기록해 놓았습니다. 행여 해방 이후 북한으로 간 피붙이로 두었으나 생사여부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명단을 유심히 확인해 볼 수도 있겠습니다.

‘반동’ 소리 안 들으려고 아버지 나이 뻘 노인과 결혼을 하고...

지은이는 서문에서 자신의 ‘안부엽서’가 한 개인들의 단순한 소식전달을 넘어 “외부에 알려지지 않은 북쪽의 ‘인간생활’을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게 하는 창문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화여대 영문과를 수석 졸업한 여류작가 이정수. 그의 남편 배운성은 프랑스 유학생이고 서울의 큰 부자였습니다. 그 정수 아주머니가 성혜랑의 집에 찾아와 털어놓은 서글프고 비참한 고백은 이런 것입니다.

“맞은편 의자에 열서너살 먹은 사내애가 신문지에서 고구마 찐 것을 꺼내더니 먹었다. 그게 어찌나 먹고 싶은지. ‘나 그것 조금만 주렴’ 하는 소리가 입안에 뱅뱅 도는데 차마 그 말이 안나오더라. 그런데도 눈은 딴 데로 옮기지 못하고 그 애 손과 옆에 놓인 고구마에만 잡혀 있더라. 그 애가 고구마를 다 먹고 꼭지 부분을 시커먼 껍질과 함께 신문지로 뭉그려 버리려고 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얘, 너 그것 버리겠니? 버리겠으면...’ 했지.”
(아주머니는 말을 못 잇고 이마에 핏대를 세우며 우셨다.)
“나..., 그 고구마 껍질과 그 애가 씹다 버린 시커먼 꼭지를 정신없이 다 먹었다....”

1950년대 서대문 형무소에서 사형을 당한 혁명가 김태준에게는 두 딸이 있었습니다. 이름은 세연이와 세주. 두 딸을 혁명유자녀로 보살펴오던 조선노동당은 김태준이 죽고 나서 40년이 지난 어느 날 세연이와 세주를 유자녀 명단에서 제외합니다. 이유는 김태준이 40년 전에 혁명가답게 용감하게 죽지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대한 김태준씨 옛 비서의 증언입니다.

“49년도 그 재판정에는 나도 있었다. 사형 언도가 내리자 마지막으로 할 말이 없는가 묻더라. 최후의 기회라면 기회지. 그 때 선생님께서는 집필하고 있는 고고학 책의 집필이 끝날 때까지 사형 집행을 고려해 달라고 하셨다. 누가 그걸 40년이 지난 이제 와서 들추어 선생님이 비겁하게 죽었다고 고한 거야. 그래서 한 때 그 애들이 유자녀 명단에서 제명되었대.”

세연이는 고민 끝에 신경쇠약이 왔고 정신 이상이 심해지자 신의주 정신병원에 가게 됩니다. 나중에 다시 시정(是正)되어 유자녀 대우를 받게 되었지만, 세연이는 이제 동생이 면회를 가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동덕여중을 다니다 의용군에 나갔던 절친했던 친구 숙정의 동생 순정은 평양건설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같이 송환되어 온 포로출신과 결혼했습니다. 그런데 그 남편이 하루아침에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순정은 양강도 혜산으로 추방당합니다. 농장에서 일하게 된 순정. 그러나 농장원들은 반동이라고 몰아붙이고, 아이들은 순정에게 돌을 던지고 방에 뱀을 던져 넣기도 합니다. 그러던 순정이 어느날 결혼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일제 때 독립운동을 했던 반신불수 노인의 시중을 들면 박해를 좀 면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순정이 자진해서 한 결혼이었습니다. 뉘어 놓고 밥 떠 먹이고 업어서 병원에 다니고 햇빛 쐬어 주느라 고되지만 반동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 때 순정의 나이는 스물 다섯 이었습니다. 가정교사를 두고 피아노를 치던 그 화사하고 세련되었던 서울 여학생 순정의 ‘사회주의 건설기’ 생활입니다.

결국 사상은 인간의 행복을 위한 것

의용군에 참여했던 인텔리들의 대부분은 가혹하고 집요한 계급투쟁의 대상이 되어 꿈과 희망을 잃은 채 생을 마감하거나 핍박 속에서 평생을 살고 있습니다. 성혜랑씨와 인연을 맺은 수십 명의 안타깝고 서러운 사연들마저도 사실은 겨울밤 온 세상을 뒤덮으며 내리는 하얀 눈 가운데 고작 작은 눈 뭉치 한 덩이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는 여전히 사회의 발전과 역사의 진보를 위해 사상과 이념의 이름으로 이른바 ‘변혁운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때 그러한 생각에 매달려 본 사람도 많습니다. 이 책을 통해 사상, 이념이 ‘결국 인간의 행복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근본정신을 잃어버릴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인생과 희망을 꺾어버리는지, 그 투명한 역사적 ‘사실’과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만남이 보다 깊은 역사적 진리를 건져내는 기회가 될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겠습니다.

성혜랑씨는 200명 남짓한 사람들의 소식을 전해주었지만, 독재의 쇠창살을 끊고 2천만의 소식을 만나게 될 날이 곧 다가오리라 믿습니다. 이국에서 고생하고 있을 성혜랑씨에게도 안부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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